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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4)

188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31일)

 

벌써 2022년도 1월이 다 지나간다. 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이고, 월요일인데, 설 연휴로 세상이 조용하다. 코로나 확진 자가 사흘 연속 1만 7000명 대이다. 보통 설 전날에는 고향에 가는데, 역병으로 사람을 안 만나는 게 미덕이 되었기 때문에 집에 머물고 있다. 세상은 3월 9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온통 시선이 빼앗기고 있다. 내일부터는 2월이 시작된다. 2월 하면, 나는 오세영 시인의 시 <2월>이 생각난다.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벌써 2월/지나치지 말고 오늘은/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세계는/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드러내 밝힌다." 

오늘 <인문 일기>는 어제에 이어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한다. 우선 어제 하지 못했던 스승 이어령이 말하는 영성 이야기로 이어간다. 소제목 "인사이트는 능력 바깥의 것"이라는 말을 하려 한다. 사람의 능력을 따질 때 어릴 때는 먼저 체력을 본다. 그 다음엔 천자문, 구구단, 기억력, 아이큐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이 영성이다. 영어로 하면, body, mind 다음이 spirit이다. 그는 신의 가장 가까운 자리가 영의 세계라고 하시면서,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인사이트는 내 능력 바깥의 것"이라 했다. 무언가를 구하고 끝없이 탐하면, 자기 능력을 초월하는 영감이라는 게 들어온다고 했다. 물론 기본적인 노력과 능력을 우선 갖추어야 한다. "빛이 물처럼 덮치듯 신도 갑작스럽게 우리를 덮친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영적이다. 모든 사물, 모든 현실 속에는 엷은 막(inframince, 미세한 차이)이 있는데, 그것을 뚫는 게 영성이다. 다시 말하면 엷은 막을 뚫고 저 너머의 것을 보는 거다. 영성은 바깥에서 오는 거다. 다만 흡수할 수 반사판이 있느냐 없는가에 차이이다. 필름의 감광지처럼 빛을 받아서 반응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다. 스승은 그걸 '영적 판'이라 했다. 인화지가 있어야 셔터를 눌렀을 때 빛이 담기는 것처럼 말이다.종이 넣고 아무리 셔터를 눌러봐야 거기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0,001초의 셔터를 끊어주는 그 짧은 순간에 감광지에 비치는 모습, 그게 영의 세계라 했다. 오늘의 화두는 '흡수할 수 있는 반사판'이다.

이어서 스승은 배우이자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을 총지휘했던 송승환 이야기로 이어갔다. 송승환은 올림픽이 끝난 후에 눈이 멀었지만, 오히려 시력을 잃고 나서 더욱 활화산처럼 자기 인생을 녹여낸 진실한 연기를 <더 드레서>에서 보여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스승은 실제로 위기 상황에 닥치면 인간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고 했다. 고난 앞에서 네거티브로 가면 인간은 짐승보다 더 나빠지고, 포지티브로 가면 초인이 된다. 고난이 자신의 그릇의 넓이와 깊이를 재는 저울이 된다는 거다.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다. 스승은 고난에 처했을 때 인간은 비참 해지거나 숭고 해지거나 두 부류로 갈린다면, 그것을 가르는 것이 영의 일이라 했다. 육체와 지성, body와 마인드로 살아가는데 극한에 처했을 때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spirit, 영적인 면이 되살아난다고 했다. 

인간은 기껏해야 눈, 귀, 코, 입, 피부와 뇌를 도구로 가지고 살지만, 위급할 때는 가끔 육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자신을 초월한 영성은 궁극적으로 몸의 바깥에서 온다. 기도를 통과해 서든, 고통을 통과해 서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힘이다. 그 힘은 필록테테스가 섬에서 고통을 통과하며 숭고한 사람이 된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했던 고백이다. "그의 활만 훔쳐갈 수는 없다. 그의 상처와 활은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스승은 "인간은 타인 에 의해 바뀔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바깥에서 나를 바꾸도록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다. 인간이란 존재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게 실존이다. 우리는 혼자이다.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휩쓸려 다니는 것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게 자족이다. 자족에 이르는 길은 '자기-다움'이다. 남하고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경지를 우리는 군자라 한다.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스스로 알고 깨닫는 자, 홀로 자족할 수 밖에 없는 자가 군자이다. 그래 군자는 필연적으로 외롭다.

인사이트를 한국어로는 통찰(洞察)이라 한다. '본질을 꿰뚫어 봄'이란 뜻이다. 시를 한 편 감상하고, '본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이어갈 생각이다. <겨울 숲>에서 "겸상"을 본 시인의 은유의 힘을 기르고 싶다. 딸의 걷기 운동을 독려하려고, 어제와 오늘 계속 밖을 나간다. 오늘 아침 사진은 우리 동네에 있는 카이스트의 교정에서 찍은 거다.


겨울 숲/조향미

마른 가지들 듬성듬성한 숲
짙은 그늘에 가려
늘 눅눅하게 젖어 있던 흙이
고슬고슬 햇볕을 쬐고 있다
볕살은 묻힌 뿌리까지 깊숙이 비춘다
따뜻한 흙 속에서
뿌리도 꼼지락거리며 몸을 편다

오종종한 자식들 틈에
밥 한술 느긋이 못 들던 노부부
막내까지 다 출가시키고
겸상으로 느지막이 조반을 드신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두 눈을 통해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을 ‘나’라는 렌즈를 통해 쉴 새 없이 보고 해석한다. 그 해석된 정보들은 ‘나’라는 정체성을 건설하는 조그만 벽돌들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표현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다. 내가 두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적극적으로 관찰 할 수도 있다. 그래 오늘 아침은 본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층위를 정리해 본다.

(1) look-수동적으로 그냥 보다: 수동적으로 ‘그저 보는 행위’는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본다. 그저 보는, 그러나 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정보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보는’ 행위를 영어로 ‘룩’look이라고 부른다.
(2) look at-우리 시선이 그 대상에 머물러 소통을 시도한다:  ‘그저 보는 행위’와 다른 ‘보는 행위’이다. 한자로는 '시(視)'다. 영어 단어 ‘룩’look에 전치사가 붙기 시작한다. ‘쳐다보다’(look at; look upon), ‘돌보다’(look after) 혹은 ‘(사전에서 낱말을) 찾아보다’(look up) 등이다. 
(3) see-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겨, 내 시선이 따라가 그 대상에 머무는 것이다. 그 행위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씨(see)'이다. ‘본다’는 의미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원래 ‘눈으로 따라 가다’라는 의미다. 관찰자가 그 대상을 자신의 눈으로 끌고 들어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관찰자의 눈으로 그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행위다. 
(4) watch: 우리는 대개 사물들을 무심코 보는 습관대로 보며(look), 그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눈으로 따라가지(see) 않는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과학자, 예술가 혹은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마주친 관찰의 대상을 인내하며 보고 또 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보고, 눈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관찰(觀察)’한다. ‘관찰’이란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 대상에 관한 선입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영어로 ‘워치(watch)'라고 부른다.*
(5) perceive:  영어단어 ‘워치’가 관찰대상의 겉모습을 관찰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라면, 영어단어 ‘퍼시브(perceive)'는 관찰 대상의 속 모습 혹은 자신의 속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행위다. ‘위치’watch가 눈으로 보는 행위라면 ‘퍼시브’perceive는 마음으로 보는 행위다. ‘퍼시브’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동원하여 ‘철저하게’(per)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에 감추어진 핵심이나 원칙을 자신의 소유로 ‘장악하는’(ceive <*capere) 행위다. ‘퍼시브’를 ‘꿰뚫어 보는’ 행위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7에서 “통찰은 직관(直觀), [직관을 기초로 한]유추(類推),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의] 증언(證言)"이라 했다. 이 통찰의 세 가지 유형인 직관, 유추, 그리고 증언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핸드폰 게임에 중독된 초등학생을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평상시에 아이의 핸드폰 사용시간을 제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출근하여 집에 돌아와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를 직접 목격한다(직관). 아버지는 아이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후,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가 십중팔구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유추). 혹은 아버지가 출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다. 어머니는 아이가 게임만 한다고 말한다(증언). 직관을 직접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이며, 유추와 증언은 간접경험을 통해 획득된다. 유추는 이전의 직접경험을 통한 이성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생성된다. 증언은 자신이 그 현장에는 없었지만,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한다.
① 직관은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듣고, 맛보기, 즉 오감 중 하나 이상을 동원한 직접 경험을 통해 얻는 올바른 지식이다. 파탄잘리는 통찰에서 직관을 유추나 증언보다 우위에 둔다. 유추나 증언은 직접경험인 직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직관을 다시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오감을 통해 감지한 그 대상만의 개별적인 ‘특성(特性)'과 그 대상이 다른 물질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보편성(普遍性)'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보는 것이 직관이다.
② 유추는 관찰의 대상이 가진 특별한 범주가 다른 대상들과 공유하는 공통적인 범주를 인식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저 먼 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당연히 그곳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③ 증언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나 믿을 만한 증거를 통한 정보에 의지한 지식이다. ‘믿을 만한 사람’은 환각, 나태, 어리석음과 같은 흠이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말은 나의 귀로 들어가 올바른 정보로 수용된다.

통찰은 일상에 대한 재발견이다. 일상을 재발견하기 위해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보는 수련이 필요하다. 여기서 영성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응집력이 없는 모래도 시멘트와 물을 만나면 강한 응집력을 갖기 마련이다. 나 혼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만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제 아무리 능력과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여건과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노력한 것만큼의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능력과 재주 못지않게 가져야 할 것이 바로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통찰력인 듯하다. 삶에 있어 누구를 만나느냐 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는데,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통찰력이다. 이렇게 잘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배철현 교수의 <묵상> 덕이다. 감사하다. 

나는 인문 정신을 ‘전진하는 분석’과 ‘후퇴하는 종합’, 즉 통찰하는 정신이라 본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총체적으로 모두 훑어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인문 정신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잘 볼 줄 알게 해준다. 통찰은 두 가지 의미이다. 영어로 말하면 insight, penetration이고 overview이고, 한문으로는 洞察이면서 通察입니다. 이러한 통찰의 힘을 기르는데 최고의 자양분이 인문학, 후마니타스(humanitas)이다. 그리고 진정한 통찰의 힘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참고로, 영어 단어 ‘워치’는 ‘깬 상태에서 보다’라는 의미이외에 ‘손목시계’ 혹은 ‘(야간) 경계’라는 뜻으로 모두 같은 어원에서 다양한 의미로 파생되었다. 혹은 종교에서는 ‘신앙적인 이유로 참회하며 잠을 삼가는 행위’인 ‘철야’徹夜라는 의미도 있다. 원인도-유럽어 어근인 ‘웩’(*weg-)은 원래 ‘강하다; 살아있다’라는 의미였다. 이 어원에서 유래한 라틴어 ‘위길리아’vigilia (영어의 virgil)은 ‘저녁의 한 기간’을 의미한다. ‘웩’이 영어가 속한 게르만언어 어근인 ‘왁얀’(*wakjan)으로 변화하여 ‘야간 경계를 서다’ 혹은 ‘깨어 있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영어단어 ‘워치’는 두 눈으로 보는 육체적인 행위를 넘어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를 취하였다. 이 영어단어와 유사한 의미군(意味群)을 가진 단어가 프랑스어 ‘옵세르베(observer)'이다. ‘옵세르베’는 ‘준수하다’, ‘고수하다’ 혹은 ‘스스로를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의 조상언어인 라틴어 ‘오브세르바레’observare에서 유래했다. ‘오브세르바레’는 ‘미리’(ob) 자신이 관찰하려는 대상을 특별한 이유를 위해 ‘지키는’(servare) 행위다. 이 단어에는 특히 관찰의 대상에 ‘자신’이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