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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5유(有)에서 5무(無)로 '건너가기

189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일)

 

오늘부터 2월이 시작된다. 그리고 음력 새해이다. 올해는 호랑이의 해이다. 호랑이의 기상으로 코로나-19도 종식되고, 미래를 말할 수 있도록 상호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잘 구축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그 민 낯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니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 젊은 세대의 욜로 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등.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서 희생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오늘은 육십간지 중 39번째 ‘검은 호랑이의 해'가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전래동화와 조선시대 민화의 단골 소재였던 호랑이는 한반도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2022년은 임인년으로 검은 호랑이의 해이다. 임(壬)이 흑색, 인(寅)은 호랑이를 뜻한다. 자연에서 가끔 목격되는 백호와 달리 흑호 발견 사례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고 한다. 실존하는 호랑이 가운데 흑호라 불리는 호랑이는 엄밀한 의미의 검은 호랑이가 아니라 무늬나 점이 크고 짙어지는 아분디즘(abundism)이 발현된 것이라고 한다. 이 현상은 특이하게 벵골호랑이에게서만 매우 드물게 관찰된다. 

내 딸이 호랑이 띠이다. 띠는 목성(木星)이 정한다. 목성의 공전 주기는 대략 12년이다. 목성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띠가 정해진다. 그만큼 목성의 크기가 크고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호랑이 띠는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3시부터 5시까지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인시(寅時)라 부른다. 호랑이는 칼자루를 상징한다. 그래서 호랑이띠에다가 호랑이 시에 태어난 사람은 독립적이고 보스 기질이 강하다. 한군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역마살이 강하다. 

그러나 나는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은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호랑이 통찰과 현안에 대해서는 우보천리(牛步千里)하는 소의 실천력을 같이 겸비한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호시우행(互市牛行)이라고도 한다.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소의 우직함으로 현실을 행동하라. 호랑이는 먼 곳을 보지 않는다. 소는 달리는 법이 없다. 보는 것은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의 눈처럼, 실행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소의 걸음처럼, 사람도 호랑이처럼 너무 먼 곳에 목표를 두지 말고 너무 현실에 메여 있지도 말고, 소처럼 겸허하고 착실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옮겨 가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쨌든 예로부터 호랑이는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새해가 되면 호랑이를 그려 문 앞에 붙이고, 어린아이에게는 호랑이 가면을 씌우기도 했다. 선한 것은 지켜주고 나쁜 것은 없애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아침은 희망을 말하고 싶다. "옛 것이 가면 새 것이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나의 꿈은 나의 얼굴에 아무런 ‘번뇌'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거다. 그러려면 앎과 실천을 함께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얼굴에 그늘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오늘 아침도 다시 한 번 다짐한다. 2022년에도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보며, 마음 비우고, 웃으며 살기로 다짐한다. 딱딱하고 굳은 것은 죽음의 길이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이 삶의 길임을 깨닫고, 몸과 마음이 유연(柔然)하게 갖는다. 세상 일에 다 원인과 이유가 있음을 알아서 그저 남의 탓만 하지말고 먼저 나를 돌아보고 나로 말미암아 시작하는 2022 임인년을 살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노자 <<도덕경>> 제45장의 5가지 도(道)ㅐ 모습이다. 2021년에 '건너 가야' 할  5 가지의 '고졸(古拙)의 멋'의 세계, 즉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의 세계를 늘 기억할 생각이다. 지난 달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함께 읽고 있다. 올해는 가급적 매일 매일 노자의 한 문장을 찾아 외우고, 남은 내 샒을 노자 철학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1. 대성(大成)의 세계에서 결(缺)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성약결(大成若缺) - 'Big ME'에서 'Little ME'로; 대성약결이면 기용불폐(其用不弊)라 했다. 즉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여도 그 쓰임이 쇠갈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읽는다.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잘난 척 하지 말고, 좀 모자란 듯이 행동하여야 그 쓰임이 계속 된다로 읽는다. 완성된 거라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2. 대영(大盈)의 세계에서 충(沖)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영약충(大盈若沖) = 가득함에서 비움으로: 대영약충이면, 기용불궁(其用不窮)이라 했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여도 그 쓰임이 궁진함이 없다. 도올의 번역은 금방 와 닿지 않는다. 그냥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자꾸 채우려고, 빈 틈을 메우려고 하기보다는 그 틈을 오히려 가득찬 것으로 생각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3. 대직(大直)의 세계에서 굴(窟)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직약굴(大直若窟) - 직진, 바른 길에서 곡선, 구부러진 길로; 구부러진 것이 오히려 크게 곧은 것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4. 대교(大巧)의 세계에서 졸(拙)의 세게로 건너가기: 대교약졸(大巧若拙) - 화려와 정교함에서 질박과 서투름으로; 서툰 것이 오히려 크게 솜씨 좋은 것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5. 대변(大辯)의 세계에서 눌(訥)의 세계로 건너가기: 대변약눌(大辯若訥) - 웅변에서 눌변으로; 더듬더듬 거리는 말이 크게 말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자는 말이다.

<<도덕경>> 제45장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다 완성된 것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쓰는 데 불편함이 없고,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바른 길이며, 질박하고 서툴러 보인 것이 화려하고 정교한 것이며, 어눌한 눌변이 곤 완벽한 말 솜씨인 것이다. 고요함은 시끄러움을 극복하고, 냉정함은 날뜀을 극복한다. 맑고 고요함(淸靜)이 세상의 표준(천하의 정도)이다." 자연스러운 무위의 삶 속의 말고 고요함이 하늘 아래의 정도이다. 그래 올해도 습정양졸(習靜養拙)을 실천하고 있다.

큰 그릇은 흙이 많이 들어간 그릇이 아니라 빈 공간이 많은 그릇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을 '그릇 론'이라 부른다. 자신을 큰 그릇으로 만들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모자란 듯이 보이는 것이 크게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빈 듯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득 찬 것으로 생각하고, 구부러진 것이 오히려 크게 곧은 것으로 생각하고, 서툰 것이 오히려 크게 솜씨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더듬더듬 거리는 말이 크게 말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떨면 추위를 이겨내지만, 이렇게 더워진 것은 고요함(靜)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맑고 고요함(淸靜)이 '하늘 아래 바름(모든 힘의 근원, The still point)'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5유(有)에서 5무(無)로 '건너가기"를 실천할 생각이다.
1. 자족/탐욕(99의 노예)
2. 침묵/TMT(too much talk)
3. 여유/초조, 조급(생존)
4. 다양성/투덜거림
5. 양면성/하소연이나 푸념

오늘 아침 사진처럼, 버릴 건 버리고, 높이 오르고 싶다. 그래 이성선의 시인의 <새해기도>를 올린다.

새해의 기도/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역병으로 단절된 세상 속에서, 노자의 <<도덕경>>이 커다란 위안을 준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유튜브 노자강의는 세월을 잊게 한다. 산책하면서, 그의 강의를 들으며 얻는 통찰은 내 영혼을 살찌우고, 정신의 근육을 부쩍 키워준다. 유튜브 강의를 듣고, 그 도올이 쓴 책, <<노자가 옳았다>>를 훑어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얼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끝내고, 노자 <<도덕경>>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설 명절 아침이다. 형제들과 부모님들 선산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했다. 아내의 산소도 당연히 만난다. 성묘를 가기까지 스승 이어령의 말씀을 다 들어 볼 생각이다. 

스승은 '지금의 나'라는 좌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정신병 이야기를 했다. 정신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데, 하나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또 다른 하나는 편집증(paranoia)이다. 흩어지는 게 정신분열이고, 집중하는 게 편집증이다. 모든 인간은 다 정신분열과 편집증 적인 증세가 있다. 심각하냐 그렇지 않으냐 만 다르다. 편집증 적인 면이 강하면 시야기 좁고, 하나의 점을 향한다. 동물들 중 늑대, 호랑이 사자는 앞쪽에 눈이 달려 있다. 이들은 먹이를 쫓아갈 때 전부를 쫓지 않고 한 마리만 쫓는다. 반면 사슴, 소, 말은 눈이 옆에 달려 있다. 쫓는 놈은 목표물을 향해 달리지만 도망가는 놈은 이리저리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시야가 넓어야 한다. 독재자는 전부 편집증이다. 반면 보통 사람들은 무리지어 살고 도망가는 초식동물에 가까우니 눈이 흩어져 있다. 그들은 착한 게 아니라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눈이 모인 사람들은 늑대처럼 공격성이 있다. 

나는 인생을 흩어진 눈으로 살려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인생이 산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로 플라네(flâner)라는 말이 있다. 아무 목적 없이 도시를 건들건들 걸어 다니는 거다. 그런 사람을 '플라뇌르(flâneur)'라 한다. 한가로운 구경꾼이다. 그런데 하나의 목적으로 직장에서 점찍고 집으로 오는 사람은 편집증적 사람들이다. 어떤 눈을 가졌는가에 따라 사람의 시야는 다르다. 

스승 이어령은 인간을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 했다. 지혜를 갖는다는 게 매우 슬픈 일이다.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다. 인간 안에는 신과 동물이 함께 있어 비극인 거다. 지혜가 있으면 죽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인간은 신과 생물의 중간자이다. 그래 인간은 슬픈 존재이고 교만한 존재이다. 양극을 작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스승 이어령은 일 밖에 모른다고 하지만, 그에게 그 일은 노는 거였다고 한다. 나도 매일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노는 거다. 죽기 전까지 바느질하는 샤넬을 보고, 주위에서 '좀 쉬세요' 걱정했더니 샤넬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너희들은 이게 일로 보이니? 나는 이게 노는 거고 쉬는 거야.' 노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고, 노동에서 벗어나는 걸 쉰다고 하는 거라 말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생명자본에 대한 것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생명과 관계된 가치가 물질 가치보다 높아졌기에 그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다. 세상의 경제 흐름이 물질보다 생명 자본 중심으로 가고 있다. 생태적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들자는 거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간다. 모든 생명가치는 교환인데, 핵심 교환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피의 교환 (2) 언어 교환 (3) 돈의 교환. 세상이 복잡해 보여도 피, 언어, 돈 이 세 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간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 되고,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 선, 가치는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이미 했던 말이라 한다. 

이 부분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스승의 말은 피의 교환과 돈의 교환은 경계가 다르다는 말이었다. 돈의 교환으로 피의 결혼을 하고 언어의 교환을 하려 들면 비극이 생긴다는 거다. 3대 교환은 서로 제 갈 길이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언어 교환도 돈이 명령하면 슬퍼진다.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은데, 출판사는 저렇게 쓰라고 하면 작가는 의욕을 잃어 버린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돈이 가장 큰 힘으로 모든 길을 빨아들인다는 거다. 돈의 비극이다. 돈의 교환가치가 언어의 교환가치, 피의 교환가치를 침입할 때 이 3대 평행성이 부딪혀 충돌할 때 비극이 생기는 거다. 그러니 그냥 돈은 돈으로 보고, 사람은 사람으로 보면 되는 거다.

오늘 하고 싶은 말의 마지막은 사랑과 용서는 동의어라는 스승의 말이다. 기독교 교리는 사랑의 교리이지만, 그 사랑은 용서와 통한다는 거다. 사랑은 쉽지만 용서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려면 커야 되고 높아야 하기 되고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사람이 진정한 강지이다. 그 사람이 신이다. 그러니 하느님만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 우리는 용서받을 사람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 여기서 멈추고 나머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내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