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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 자신의 얼굴이 공개되는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왜 스스로 그런 삶을 멈추지 못했을까? 이런 측면에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우리가 침대 가까이 놓고 자주 읽어야 할 책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묵상>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야기를 자주한다. 그래 나도 최근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두 번에 나누어 아침 글쓰기에서 정리 해 본다 (2) 첫번째 이야기는 지난 3월 9일에 썼다. 그 내용을 보려면,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가면 된다.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을 운영하며 미성년자 등의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 유표한 혐의로 조사 받는 자가 오늘 아침 얼굴이 공개되었다. 몇 가지 생각이 겹쳐졌다. 왜? '박사방'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그 개인의 일로 몰아가며, 그에 대한 지나친 보도는 '권력'을 가진 자들과 일부 언론이 짜고 '무엇'을 숨기고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검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디지털 성범죄의 구조적 측면을 가릴 우려는 없는가? 성 범죄의 원인이 그의 개인적 성격적 결함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철학자답게 (…) 욕망에서 생겨난 잘못이 분노에서 생겨난 잘못보다 더 중대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욕망으로 인해 범죄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쾌락에 사로잡혀서 훨씬 더 제멋대로 방탕하고 비열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보며, 언론이 보도에 좀 더 신중했으면 하였다.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보도는 오히려 범죄자의 영웅심리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감수아라는 교수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가해자에게 내러티브(서사)를 만들어 주는 보도는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가해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오늘 그 가해자도 자신을 '박사'로 칭하며 회원들을 상대로 과시욕망을 드러내곤 했다 한다.

이런 집중적인 보도로 모든 국민들이 관심을 집중할 때 누군가는 웃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거리의 봄 꽃들은 다 안다. 난 이 걸 믿는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주철환 PD)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월이 이긴다. 의도하지 않는 격리 생활에 주말 농장이 그냥 농장이 되었다. 오늘도 말 없이 응답하는 흙과 모종한 상추와 지낼 생각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농장 가는 길에 만난 개나리이다. 믿거나 말거나, 슬픈 개나리 전설을 공유한다. 옛날 오두막에 삯바늘질 하는 어머니와 개나리라는 이름의 딸, 그 밑 사내 동생 둘까지 네 식구가 모여 살았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개나리는 동생들을 동냥으로 먹여 살린다. 하지만 추운 날 아궁이에 군불을 피우고 잠들었다가 그만 모두 목숨을 잃는다. 그해 봄, 그 자리에 나무가 자라서 꽃이 맺히자 사람들은 개나리라고 불렀다. 그래서 꽃잎이 네 개라니 슬프다. "언론은 사회 안전망 부재, 범죄 예방 체제 미비 등 성범죄를 유발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국가인권위원회의 '성폭력 범죄 세부 권고 기준')

개나리/이해인

눈웃음 가득히
봄 햇살 담고
봄 이야기
봄 이야기
너무 하고 싶어

잎새도 달지 않고
달려나온
네 잎의 별꽃
개나리꽃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길게도
늘어뜨렸구나

내가 가는 봄맞이 길
앞질러 가며
살아 피는 기쁨을
노래로 엮어 내는
샛노란 눈웃음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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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심오한 의미는 이 책의 그리스어 원제목에서 숨어있다. 원제목은 『타 에이스 헤아우톤(ta eis heauton』이다. 이 제목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자면 "그 자신(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부탁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는 이 일기를 자신을 위해 기록했다.

배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2000년이 지나 우리가 그의 일기를 읽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랄지 모른다. 자기수련을 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일기를 ‘내 자신을 위한 책’ 정도로 책 제목을 잡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책 제목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자신’(헤아우톤)에게 썼다. 자신을 1인칭으로 여기지 않고. 3인칭으로 여겼다. 왜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했는가? 우리의 마음속엔 자신에게 편하고 익숙한 ‘내 자신’(myself)과 그런 자신을 정복해 자신이 수련을 통해 구축해야 할 숭고한 자신인 ‘그 자신’(himself)이 있다. ‘내 자신’은 과거의 나, 욕심으로 가득한 채, 유기해야 할 나이고 ‘그 자신’은 미래의 나, 나를 초월한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융의 ‘슈퍼 에고’, 그리고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우파니샤드의 ‘푸루샤(Purusha)'다. 아우렐리우스는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수련하여 도달해야 할 ‘우주적인 자신’ 혹은 ‘신적인 자신’을 ‘그 자신’이란 3인칭으로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스스로를 나비가 고치를 버리듯이, 새가 자신을 감싸는 알을 깨고 나오듯이, 과거의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무아'(無我) 혹은 ‘비움’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커다란 한 기지 지혜를 얻었다. '무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I'm nothing)'가 그냥 말만으로,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놓고, 과거의 '자신'을 유기하는 큰 도전 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I'm evrything)"라거나 "나는 무언 가이다(I'm something)"라고 생각하는 것은 버려야 할 과거의 '자신'이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는 '우주적인 자아가 바로 진정한 자아'라고 말한다. 힌두교 스승이 학생에게 무화과 열매를 가져왔다. 스승은 학생에게 무화과 하나를 갈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학생은 “수많은 씨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스승은 조그만 씨 하나를 다시 열어보라고 시킨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스승이 말한다. “네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이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자라났다.” 그 없음이 있음의 원천이다.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온 우주인 ‘브라흐만’(Brahman)은 눈이 보이지 않은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자아라는 ‘아트만’(Atman)에서 출발했다. 아우렐리우스의 ‘그 자신’은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이다. 그는 매일 아침 우주와 자연이 자신에게 부여한 의무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했다. 3인칭은 그가 열망하는 자신의 모습이자, 그가 존경하는 신이며, 그의 삶의 원칙인 자연의 조화와 이성이다." 이것도 배철현 교수의 말이다.

1인칭이 누구인지 전혀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 사상가가 놀랍게도 로마 황제다. 그는 황궁에서 환락과 사치로 인생을 보낸 사람이 아니라,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로마 군인들을 지휘한 야전사령관이었다. 그가 오늘 아침 배철현 교수를 통해 알게 된 로마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121-180년)이다. 아우렐리우스는 170에서 180년까지 동유럽 전선 깊은 곳에서 전쟁을 치뤘다. 그는 매일 저녁 목욕개계沐浴齋戒하고 의관을 갖춘 후, 군 진영 막사에 홀로 앉아 일기를 썼다. 그것이 후대에 『명상록』이라고 알려진 책이다.

『명상록』의 원제 ‘타 에이스 헤아우톤’(ta eis heauton)에서 두 번째 단어인 ‘에이스’(eis)가 의미심장하다. 에이스는 그리스어 전치사다. 그 의미는 ‘(장소) 안으로 깊이 진입하려 하다’라는 의미다. 그 장소는 누구나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쉬운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노력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요새(要塞)다. 아우렐리우스는 지상의 요새보다 정복하기 어려운 요새를 자신의 마음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이 요새를 고대 그리스어로 ‘아크로폴리스’(akropolis)라고 불렀다. 그가 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장애물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것들은 자신을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것들이었다. 편견, 충동, 욕심 그리고 욕망 따위들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무절제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습관을 장악하는 마음을 ‘헤게모니콘’(hegemonikon), 즉 ‘지배적인 이성’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지배적인 이성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자족의 상태에 이를 때 난공불락이다. (···) 욕심을 제거한 마음은 요새(akropolis)다.” (『명상록』 8. 48)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위치한 요새로 들어간다. 이곳은 우주와 내가 하나로 신비하게 하나가 되는 공간이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마음을 태양계의 태양과 같은, 우주의 블랙홀과 같은 힘이라고 말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궁극적인) 힘을 존경하십시오. 그것이 모든 다른 것들을 사용하고 만물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궁극적인) 힘을 존경하십시오. 이 힘도 다른 힘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이것이 모든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이것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명상록』 5.21)

아우렐리우스는 이 요새로 들어가 자신이 그 힘을 획득했다. 나도 아침 글쓰기를 통해 그 요새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나도, 그처럼, 이 힘으로 그 날 해야 할 일을 스스로에게 촉구한다. 그가 매일 아침 자신에게 그날 자신이 반드시 행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에게 추천하고 권고(勸告)하여듯이,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명상록』의 원제 ‘타 에이스 헤아우톤’의 첫째 단어인 ‘타’(ta)는 고대 그리스어 3인칭 중성 복수형 대명사로 ‘것들’이란 의미라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에게 자신을 정복하고 승화하기 위해 매일매일 수련한 것들을 이 책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가 로마제국을 통치하고 전투를 해야 하는 외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요새로 매일 이른 새벽에 들어갔듯이, 나도 나의 심연으로 들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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