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지난 해부터 시작한 <땅끝마을까지 걷기 프로젝트>가 올해로 넘어 와 다시 시작한다. 어제는 익산에 갔었다. 낯선 도시의 겨울 들판을 걸으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겨울 들판은 "편히 쉬며", '자기기만'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다. 우리 안에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고 치면, 의식이 모르도록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편집하는 거다. 자기기만에 빠진 행동양식에서, 동물은 상대가 나타나면 털을 곤두세우고 몸집을 부풀리며 요란한 색깔로 몸을 바꾼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기 부풀리기를 한다. 겨울 들판은 있는 그대로였다.
문제는 이런 자기 평가를 과하게 하는 '자기기만' 경향은 소득 불평등 기울기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소득 편차가 작아 불평등 기울기가 완만한 독일은 과대평가 경향이 낮은 반면, 소득 편차가 커서 불평등 기울기가 가파른 미국은 과대평가 비율도 높다.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에서는 사람 사이가 멀다. 다들 서로 내가 너보다 낫다고 하는 분위기에서는 감정 소모도 극심하다. 그래 불평등이 심할수록 서로 비교하고, 타인과의 유대감이 약해지며, 폭력과 집단 왕따 같은 문제들이 함께 증가한다. 그래 "겨울 들판을 거닐며/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 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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