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26일)

사진 김지유
한 주 동안 사람들은 '왜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유혹을 받는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인문 운동가의 입장에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몇 일동안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가 <민중의 소리> 이완배 기자에서 그 답을 얻었다. 칼럼 제목은 "윤석렬 주변에 미신과 점술이 난무하는 이유를 추정해보자"였다.
왜 윤 후보 주위에 무당이 끝없이 출몰하며, 특히 그의 반려자는 왜 그렇게 점에 집착할까? 이 완배 기자의 추정은, 이 둘 모두 자신들의 성공에 대해 절대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윤 후보가 사법고시에 패스한 이유는 깔끔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성공에는 미신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가 뭘 했다고 대통령 후보인가? 반면 그가 지금 유력 대통령 후보가 된 이유를 생각해보라. 이건 깔끔은 커녕 지저분하게도 설명이 안 된다. 도대체 그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유력 대통령 후보인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하지 않겠나? 이때 무당이나 점쟁이가 끼어들어 “점을 쳐보니 당신 이야말로 왕이 될 상입니다” 뭐 이런 말을 한다. 여기서 꼴딱 넘어가는 거다.
그의 부인 김건희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랑하는 수많은 화려한 이력들, 그가 그 이력에 걸맞은 실력을 갖고 있나? 그에 걸맞은 노력은 했고? 박사 학위 소유 자라는데 논문 내용이 ‘관상으로 궁합을 알아 보기’란다. 게다가 그의 논문에는 ‘회원 유지’가 영어로 ‘member Yuji’로 적혀 있단다. 학사밖에 안 되는 나도 글을 그 따위로는 안 쓴다. 이 정도 되면 본인도 본인의 성공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거다. 이때 무당이 속삭인다. “당신은 국모(國母)가 될 운명입니다. 내가 점을 쳐보니 점괘가 그래요”라고 말이다.
행동경제학에는 '통제력 환상(Illusion of Control)'이라는 용어가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헛된 심리를 뜻한다. 이 기자의 눈에, 이 부부는 지금 능력에 비해 너무 과도하게 출세했다. 그런데 이 기쁜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이유를 설명을 못한다. 주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미신의 유혹은 피할 수 없다. 통제력을 잃은 사람이 더 미신과 점술에 의지한다는 실험 연구는 블로그로 옮긴다. 어쨌든 신(神)의 시대가 저물고 이성의 시대가 열 린지 무려 200여 년이다. 그런데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내가 점을 더 잘 치네, 쟤가 점을 더 잘 치네, 이런 걸로 대선을 치르고 있다.
이 기자는 이 상황이 실로 슬프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되려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오늘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의원도 이 문제를 매주 잘 지적하였다. 송 위원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가 한 유튜브 채널 직원과 주고받은 무속 관련 발언은 씁쓸히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며, "김 씨의 자의식(自意識)은 단순한 무속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무속인이다"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을 좀 공유한다.
사실 굿의 세계에서는 참과 거짓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 그 세계는 효험(effect)만이 중요한 세계다. 그러니 허위 이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 넣었던 것 같다. 굿 하고 점 보는 것 자체를 욕할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도 불교도도 샤머니즘적인 신자가 적지 않다. 교회나 절에 다니면서 복을 비는 것과 굿이나 점을 보며 복을 비는 것이 뭔 차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에 빌던 어머니들의 정성을 기복(祈福)신앙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굿을 하든 점을 보든, 교회를 다니든 절을 다니든 그런 정성으로 훌륭한 삶을 산다면 누가 뭐 라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문제를 삼는 것은 김 씨는 허위 이력을 적은 서류가 적지 않게 드러났다는 거다. 그의 어머니는 은행 통장 잔액을 위조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 씨는 주가 조작한 도이치모터스에 돈을 빌려준 데 대해 수사를 받고 있다. 그 집안이 검사 사위를 얻는 데 집착한 이유와 무속을 가까이 한 이유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부정한 방법으로 아슬아슬 살아왔으니 늘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더 염려하는 것은 송위원이 다음과 같은 지적이다. "김 씨가 샤머니즘에 빠졌다는 사실 이상으로 충격적인 건 통화 공개 이후 ‘원더우먼’ 등 영화 포스터에 김 씨 얼굴을 합성하며 ‘걸크러시’하다고 두둔하는 반응이다. 물질주의와 무속의 결합이 김 씨 같은 서울 강남 졸부들에게 이상한 것이 못 되듯 이준석이나 ‘이대남(이십대 대학생 남자)’에게도 그런 것인가. 국민의힘은 이런 반응을 내세워 윤 후보 자신이 그 일부인 샤머니즘의 문제를 뭉개고 넘어가려 한다"는 거다. 이 문제는 그냔 넘어갈 일이 아니다. "조선 고종 때 민비는 임오군란으로 쫓겨났다가 환궁하면서 박창렬이라는 무녀를 데리고 들어와 국(國)무당으로 세우고 대소사(大小事)를 의논했다. 민비는 그를 언니라고까지 부르며 가까이 했다고 한다. 무녀에게 놀아난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장희빈에 이어 민비, 그리고 샤머니스트가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사죄로 퉁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납득할 만한 처리가 있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의 주장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외 다른 주장들은 블로그로 옮긴다.
"개인이 무속을 믿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겠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무당이 개입하여 비선 실세가 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에 비할 바가 아니다. (…)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이라는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정이 묻게 되고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은 색이 묻게 된다는 뜻이니, 곧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위정자가 무당을 가까이하면 이 나라 국정 운영이 무당들의 굿판에 휩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쯤 되면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국정을 합리적 절차와 민주적 의사 결정에 따라 운영하느냐, 무당이 개입하여 미신으로 좌지우지하느냐의 문제, 다시 말해 정상 국가냐, 무당 국가냐의 문제다.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선진국이며, 경제 규모 10위권인 대한민국이 자칫하다 가는 무당 국가로 추락하는 길로 들어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창피하고 어이가 없어 얼굴이 다 뜨뜻해 진다." 유시민 전의원이 자신의 페북에 쓴 내용이다.
코로나가 더욱 걱정인데, 어제는 서울 강의에 다녀왔다. 그런데 매우 고생했다. 골목에 주차하고 기차를 탔는데, 다시 내려와서 차를 찾지 못해, 본의 아니게 1시간 반을 헤매며 걷기 운동을 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노자 강의>를 유튜브로 들으며, 엄청 많은 통찰을 얻는 바람에, 지겹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걷기 운동이라 생각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리가 아프고 힘들었다. 사람이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
자꾸 정치 이야기를 아침 <인문 일기>에서 하는 이유는 이번 대선 정국을 잘 설명할 수 없어서 이다. 거대 담론도 없다. 내 주변의 40대 이상 기성세대들, 특히 60대 이상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7차례의 대선과 세 번의 정권 교체를 겪으면서 어느덧 어느 한 세력의 일원이 됐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가슴 뛰는 민주화 투쟁의 추억은 퇴색했고, 이상과 이념을 좇는 가치 추구의 정치의식은 많든 적든 뭔가 내 삶에 실질적 보탬이 되는 정치세력을 좇는 이익 추구형 정치 행태로 바뀌었다. 가치와 이익이 뒤섞인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렸고, 내 편이 얼마나 유익하고 안온한 존재인지, 네 편이 얼마나 음습하고 불길한 존재인지 문재인 정부에서 충실히 배웠다. 그리고 이제 이재명 빗자루와 윤석열 도리깨를 맞겨루고 이재명 형수 욕설과 김건희 녹취록을 꺼내 흔들어도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우리가 됐다. 그래 우리는 좌파가 없다. 이 시를 소개한 <먼산 바라기>님의 덧붙임이 지금 나와 비슷한 상황이다. '동창 모임에 나가면 제일 고역이 석고처럼 보수화 된 친구들의 견해를 묵묵히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태클을 걸면 모두가 불편해지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문다. 싸우다가 친구를 잃기도 싫기 때문이다. 나는 싱싱한 청일점이야, 자위를 하지만 얼른 주제를 바꾸는 게 내가 할 일의 전부다. 어쩌다 비슷한 부류끼리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가뭄에 물 만난 고기가 된다." 사진은 지인 김지유가 보내준 거다.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오늘 공유하는 시에는 피어 싱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서두에 붙어 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약자와 빈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착취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들이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조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주저한다면, 우리는 더는 좌파가 아니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이완배 기자에 의하면, 2008년 <사이언스>에 ‘자기 통제력이 약한 사람이 미신을 더 잘 믿는다(Lacking control increases illusory pattern perception)’라는 논문이 있다고 한다. 미국 텍사스주립대학교 제니퍼 윗슨(Jennifer R. Whitson) 교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애덤 갈린스키(Adam Daniel Galinsky) 교수의 공동 연구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대기업 마케팅 부서의 직원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 발로 왼쪽 발을 세 번 밟고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이 너무 급하게 회의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 습관을 실시하지 못했죠. 그리고 그날 회의에서 당신이 낸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어요. 당신이 평소와 달리 발을 세 번 밟지 못하고 들어간 것과, 당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은 사건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까요?”
발을 세 번 밟지 못한 것과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은 사건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그냥 그 아이디어가 별로 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기 전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 중 절반의 자기 통제력을 고갈시켰다. 예를 들자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다 보면 절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계속 풀게 하는 식이다. 이 과정을 거친 이들(문제 풀이에 계속 실패한 이들)은 ‘세상은 절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라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라는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된다.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통제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앞의 그 질문에 어떻게 답을 했을까? 통제력을 가진 사람들은 발을 밟지 못한 것과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은 일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답을 했다. 반면 통제력을 잃은 사람들은 이 둘의 연관성이 매우 높다고 믿었다. 특히 이들은 ‘발을 구르지 않으면 더 나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라며 더 많이 불안해했고, 발을 구르는 것뿐 아니라 특정 양말을 신는 등의 행동에도 어떤 음모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했다. 무당은 이럴 때 그들을 유혹한다는 거다.
윤석렬만이 아니다. 내 주변을 둘러봐도 은근히 미신과 점술의 유혹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연구팀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깔끔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이게 바로 자신과 주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다. 예를 들어 실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 교수 임용 과정에 원서를 냈다고 치자. 이런 사람이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기의 꿈에 대한 깔끔한 설명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이 하버드 교수가 되는 건 신의 뜻이야. 내가 어제 꿈에서 신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고!” 바로 여기서 통제력이 약한 사람들이 “그래, 바로 이거야!”라며 무릎을 친다. 갈린스키 교수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헛것을 더 잘 믿는다”라고 설파한 이유다. 이완배 기자는 이 연구를 윤 후보 부부에게 적용해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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