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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2)

188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24일)

 

오늘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은 제10장 "고통에 대해서 듣고 싶나?를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 본다. 

창조는 카오스에서 생긴다. 질서에서는 안 생긴다. 질서는 이미 죽은 거다. 카오스의 대립이 코스모스이다.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처음'이란 이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이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질적인 시간이고, 동시에 문지방, 현관이다. 현관의  '현(玄)'자가 가물가물하다는 말이다. 그래 아직은 손에 뭔가 잡히지 않지만, 가물가물하게 뭔가 보인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번역하는 '창조하다'의 히브리어가 '바라(bara)'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이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창조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

카오스가 질서보다 우선한다. 카오스가 정리정돈보다 더 우위에 있다.  코스모스가 되면 죽은 거다. 스승 이어령에게 혼돈은 호기심 덩어리라 했다. 혼돈은 목마름 그 자체였다고 했다. 카오스에서 이것 저것을 해야 계속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를 만하면 갈증을 남겨두고 길을 떠나는 거다. 왜냐하면 올라가면 끝나는 거니까. 스승은 카오스를 불안의 흑점이 아니라, 창조의 밝은 점으로 바라본다. 혼돈 앞에서 오히려 생명력이 용솟음 친다. 스승은 묻는다.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돌멩이인가?" 흥미로운 질문이다.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한다.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독은 차만 그만이다. 채우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든다. 물질의 속성이다. 두레박의 속성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나 자신도 질문을 해 본다. 물독은 제 인생을 남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산다.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 하다.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는다.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다.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린다. 지적 보헤미안이다. 스승은 그런 사람을 "늘 우물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레박 인생은 노마드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직업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이다. 인생이 변화무쌍해서 '나는 왜 이럴까' 곧잘 후회는 해도 자살은 안 한다. 다음이 또 있으니까. 그런데 물독 인생들은 다 채우면 허무 해진다. 그래서 남 쫓아가는 욕망으로 산다면 물독도 아니고, 두레박도 아니고 돌멩이다.  아름답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멩이처럼 된다.

어젯밤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신 때문이다. 게다가 난생 처음으로 유튜브 TV를 두 시간이나 쉬지 않고 봤다. <김건희 7시간 녹취, 미공개 파일 공개! - 김건희 발언의 의미와 취재 이야기, 진실과 거짓!>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 하기도 싫다. 억울하게 내 잠만 달아나게 했다. 김건희씨는 청와대 영빈관을 옮겨야 한다는 도사들을 말을 전해 듣고 "옮길 거야"라고 말하는가 하면, 열린공감 TV 등 일부 매체를 빗대어 "내가 정권을 잡으면 무사하지 못할거야"라고 하는 등 주요 의사결정을 본인이 주도하는 뜻한 표현이 곳곳에서 나왔다.

나의 바람은 국가는 헌법, 법율, 명령, 조례에 의하여 운영되어야 한다는 거다. 도사들의 자의적인 지시에 따라 헌법, 법률을 무시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무속통치'를 걱정한다. 우리 사회가 '무속 통치' 국가가 되는 불행한 일은 영원히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한다. 그래 오늘은 박순원 <가죽>을 공유한다. "사람의 가죽을 쓰고 태어났으면 가죽 값을 해야 한다."


가죽/박순원

이번에는 사람의 가죽이었다 태어나 보니 사람의 가죽을 쓰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더 낡은 가죽을 보면 인사를 하고 두 발로 서서 걷고 뛰기도 하였다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누가 빨리 뛰나 시합을 하기도 했다 누가 옷감을 짜서 옷을 지으면 그 옷을 입고 누가 닭을 길러 잡으면 그 닭을 먹고 누가 농사를 지으면 그 쌀과 배추를 먹었다 누가 담았는지도 모르는 술을 마시고 누가 집을 다 지어 놓으면 그제서야 들어가 살았다 단추를 누르면 낮처럼 환해졌고 봄처럼 따뜻해졌다 새로 태어난 가죽들에게 사람의 가죽을 쓰고 태어났으면 가죽 값을 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얘기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건들거리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가죽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달프게 이야기를 해 주고 돈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내 가죽은 늘어났고 늘어졌다 꺼끌꺼끌 잡티도 많고 군데군데 쭈그러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 쓰고 반납할 때 개수만 맞으면 된다니까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스승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스승이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 앞에 열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한 개는 행복의 문이고, 나머지는 지옥의 문이다. 하나의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다음과 같이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의 문 바깥만 서성거리는 사람,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와 또 다른 부류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행복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죽어라 올라간다. 거기 가면 또 행복은 다른 산꼬대기에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은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어딘가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산하게 행복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니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이다. 

두 번째 사람처럼 끝없이 추구하는 일이 행복이지만, 동시에 갈증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행복 추구는 쾌락이지만 동시에 고통이다. 행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OECD에서 정의하는 행복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다양한 평가를 포함하는 건강한 정신 상태"라 말한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측정은 인지적 평가인 '삶에 대한 만족도', 정서적인 측면인 긍정적, 부정적 정서감, 마지막으로 미래적인 관점에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 가치를 측정하는 유데모니아 항목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데모니아(eudaimonia,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상에서 느끼는 정서적인 행복은 플라톤의 행복론이 마음에 든다. 플라톤이 말했다는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財産)"
•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容貌)"
•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名譽)"
•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體力)"
•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이렇듯 일상의 욕구 중에서 뭔가 2%가 부족한 상태를 유지해야 행복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차고 넘치면 오히려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나는 이 다섯 가지에 모두 해당된다. 

옛 우리 조상의 삶의 지혜 중에도 비슷한 행복론이 등장한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일부러 자기 집 지붕의 기와 한 장을 엇비슷하게 놓아두고 '저 기와를 바로 놓아야 할 텐데'하면서 걱정거리를 만들어 둔다는 것이다. 사소한 걱정거리라도 일부러 만들어 두고 걱정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지혜라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삶에도 남들에 비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음에도 굳이 없는 것을 꼬집어 나는 ’남보다 돈이 없어 불행하다'거나 ’나는 왜 눈이 침침할까‘ 등으로 남들보다 튼튼한 사지육신은 제쳐 두고 2% 부족한 것들 때문에 불행하다고 애써 생각하는 못난이가 되어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걱정 앞에서, 나는 ‘나에게는 남에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오늘 아침에 예정했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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