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20일)

<<주역>>이 말하는 올해의 괘는 ‘천화동인(天火同人)’에서 ‘택화혁(澤火革)’으로 변하는 괘이다. 이건 점을 쳐서 나온 게 아니다. 임인년은 60년마다 돌아온다. 60간지에 의해 60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던 괘를 지금 말하는 거다. 그리고 주역의 괘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다. 체가 몸뚱이라면 용은 팔다리다. 체가 찰흙이라면 용은 찰흙으로 만든 형상이다. 체가 바탕이라면 용은 변화에 해당한다. 올해의 체는 천화동인이고, 용은 택화혁이다.
'천화동인'은 어제 <인문 일기>에서 말했다. 오늘은 '태화혁'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휘겸, 노겸이니 하는 말이 지난 밤에 다시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겸손도 다양하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택화혁 괘에는 ‘군자(君子)는 표변(豹變)이요, 소인(小人)은 혁면(革面)이다’는 대목이 나온다. 군자는 표범처럼 바꾸는데, 소인은 겉모습만 바꾼다는 뜻이다. 여기서 표변이란 '표범이 털갈이를 할 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갈아버린다. 겨울이 오면 춥다. 그래서 표범은 털갈이를 한다. 자신의 묵은 털을 다 뽑아내는 거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걸 통해 스스로 진정한 변화를 이룬다. 그래서 진정한 군자는 표변(豹變)을 한다. 진실로 속마음까지 다 바꾸는 거다. 그게 군자다. 내 이름 한표에서 표가 표범 표자이다.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럼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속은 바꾸지 않고 화장만 바꾼다. 낯빛만 고친다. 그래 놓고서 다 바꾸었다고 말한다. 딴마음을 먹기 쉽다. 그게 혁면(革面)이다. 겉모습만 잘하는 척, 남한테 잘 보이려고만 한다. 혁(革)괘의 진정한 바꿈은 그런 바꿈이 아니다. 반대로 표변(豹變)하려면, “주역은 휘겸(撝謙)과 노겸(勞謙)을 강조한다. 휘겸은 엄지손가락 휘자에 겸손할 겸자다. 엄지손가락은 최고다. 나머지 네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다스릴 수 있다. 그런데 네 손가락으로 엄지를 감싸보라. 그럼 엄지가 네 손가락 밑으로 들어간다. 표변의 지도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하늘로 삼아야 한다. 그게 휘겸의 지도자다.” 그리고 노겸의 지도자는 '수고로워도 겸손한 거다.' 자기가 공을 세웠어도 국민에게 돌리는 겸손함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이 노겸 이야기는 여러 번 나온다. 특히 제2장에서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이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거다.
어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좀 더 강조하고 싶어 오늘 아침 다시 말한다. 오늘은 우리 동네 주민자치위원에서 주민자치회로 전환하는 날이다. 새로운 거버넌스가 시작되는 거다. 지방자치는 주권자인 주민이 주인이다. 주민자치는 주민의 참여보장을 위한 민주적 절차의 제도화를 위한 거다.지방 자치의 주인인 주민이 주민자치를 통해 자방자치를 성장시킬 수 있다. 주민자치는 주민 참여를 위해 주민자치 사무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거다.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민자치위원들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선동보다 모범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 구성원들을 서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촛불 혁명이후 적폐청산(積弊淸算)의 실패는 촛불혁명 5년 뒤, 윤**과 점치검찰의 기세를 키워버리고 말았다. 윤** 무리들은 "니네가 크게 했잖아"라는 조롱을 김^^로부터 듣게 한 건 누구인가? 검찰 개혁의 선봉에 나섰던 조국, 추미애 그 누구도 보호하지 않은 정부와 여당의 무책임, 그 댓가를 왜 촛불을 들었던 우리 시민들이 치러야하는가라는 적절한 질문을 추미애만이 한다. 현재 민주당은 권력의 열매만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번 이재명의 승리는 민주당의 승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승리여야 한다. 나는 얌체를 싫어한다. 혁명의 열매만 따 먹는 사람들이 얌체이다. 어떻게 조민 양이 겪는 어이없는 고통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는가? 꿀먹은 벙어리인가? 인문 운동가로서 나는 격분하여 매일 공유하는 시 다음에 긴 글을 써 블로그에 남긴다. 정정래 의원의 경우도 그렇다. 불교 계가 자신의 기득권을 건드렸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아무 말 못하고 정의원을 쫓아내려고 하다니. 정의롭지 못하면 타락하게 되어 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잠든 사이에 도둑질 당한다. 저 패악질 하는 정치 검찰 족속과 국힘, 혹세무민하는 그 일당을 이번 기회에 완전 소탕하여야 한다. 조금만 뭉치면 가능하다.
우리는, 살면서, 대가 없이 많이 받아 먹는다. 문제는 주는 분은 모든 것을 내어 주었는데, 받은 사람은 값없이 받다 보니, 주는 이의 사랑을 모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 사랑은 무료가 아니다. 어머니의 남은 시간과 생살을 깎아서 나오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걸 무료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염치가 없는 것이다. 내 쪽에서 값을 지불하지 않다 보니 무료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무료이용권"을 끊고 하루를 입장하려 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데 말이다. 다 값을 치루어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준비하여,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는 <대전 와인 스클> 첫 강의 테이프를 끊어야 하고, 문체부 관광두레에서 공모하는 예비 으뜸두레 사업에 <우리마을대학>을 신청하여야 한다. 쓸 내용이 너무 많다. 오늘 아침 사진은 사람을 소외는 공간이었던 판교라는 신도시에서 찍은 거다. 거리가 이런 식이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무료이용권/임지만
‘한번은 시처럼 살아야 한다'라는 시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아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여기까지는 좋은데 어머니 사랑이 무료라고 그럽니다. 이 시인 감성만 있고 통찰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사랑이 어떻게 무료입니까? 어머니 사랑은 무료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아침 일출과 저녁 노을도 무료가 아닙니다. 지구가 한바퀴 돌아야 비로소 생기는 것들입니다. 무료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값이 지불된 것들입니다.
그래 인문 운동을 하는 거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오늘도 멈춘다. 지난 1월 18일, 참으로 마음 아픈 뉴스를 접했기 때문이다. 전 법무부 장관의 한 자녀가 국립대병원인 경상대병원 전공의 지원에 불합격했다는 뉴스다. 2명 뽑는데, 유일한 지원자였다. 2021년 12월에는 명지병원의 전공의 지원에서도 불합격을 당했다. 2명을 뽑는데, 2명이 지원했던 자리다. 경쟁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력과 자격이 미흡한 것도 아닌데, 불합격을 당했다. 불합격을 ‘당하게 한’ 주역은 누구인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언론사는 어디에 지원하는지를 ‘보도’하면서, 병원 당국에 갖가지 압력이 가해지도록 앞장섰다.
잘 알다시피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장 앞장서서 지켜내야 할 언론사가 그 권리를 짓밟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인권 파괴가 마치 ‘승리’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 일부 언론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한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난 특수한 것아 아니다. 이런 불공평하고 부당한 일이 사실상 한국 사회 도처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건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1) 한 개인의 삶에 침투해서 그 사람의 사생활이나 보호되어야 할 권리는 전혀 개의치않고, 일거수일투족 선동적 정보를 ‘기사’로 생각하며 내 보내는 언론
(2) 그러한 정보를 접하고 병원들에 ‘불합격시켜야 한다’는 압력을 가한 사람들
(3) 그러한 외적 압력과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면서 부당하고 불공평한 결정을 내린 결정권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대통령 후보의 배우자와 가족이 자행해온 셀 수 조차 없는 갖가지 ‘서류 위조’에는 침묵한다. 그들의 지독한 ‘이중 기준’과 ‘선택적 비난’은 결국 그들이 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처에서 경험하게 될 불공평성을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인문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인문 운동과 인문 운동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인문 운동가의 역할은 (1) 인간은 타인에 대해 공감하는,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다. (2) 그리고 우리가 상대하는 타자를 우리보다 못한 존재, 즉 인간 이하의 존재(lesshuman)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동시에 보게 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지각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고 부른다. 비인간화 심리가 현재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실수를 한다.
• 인종학살의 가해자는 희생자를 ‘해충’이라고 부른다.
• 노예는 길들여진 짐승이다.
• 원주민은 야만인이라 불렸고 이민자들은 전염병처럼 취급되었다.
• 아직도 유럽의 축구장에서는 흑인 선수의 등장에 원숭이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 치매환자들은 좀비로 인식되기도 하며 홈리스들은 투명 인간이다.
• 야동 중독자는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기 쉽다.
• 심지어 심신이 지친 의사가 환자를 무력한 몸뚱이로 대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직을 노리는 배우자로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소한도의 주의를 요하는 수준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투가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된 것"이라는 언급은 위험하다. 전 추미애 장관의 분석에 따르면, "윤 후보가 걸핏하면 '공정과 상식'을 들먹였던 것도 이번 선거를 조국의 선거로 몰고 가겠다는 김씨의 배후 조종이 작용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 구호도 자신의 학력 위조와 신분 사기로 인해 남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다. 이런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두 가지가 문제이다. 하나는 기준이 없어지고, 두 번째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 된다.
한 대통령 후보의 배우자가 무수한 허위 문서와 표절로 학위를 따고, 교직에서 가르치고, 갖가지 혜택을 누려온 것에 대하여는 아무런 비판적 문제 제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침묵하는 언론과 많은 사람들은, 전 법무장관의 자녀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에는 그렇게 목숨 걸고 반대를 하고 있다. 이들이 노골적으로 적용하는 ‘이중 기준(double standard)’은, 한국사회를 불공평 사회로 만들고 있다.
언론도 문제이다. 언론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라고 나는 본다. 하나는 기존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구상하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의 현실 ‘보기 방식(mode of seeing)’을 좌우하는 가치관, 정치관, 사회관은 매우 중요하다. 현실에 대한 복합적 이해는 물론, ‘진실’과 ‘사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사유가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이다.
다음은 강남순 교수의 바람이다. 나는 이게 인문 운동가가 기도 이전에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 여긴다. 강교수의 기도와 내 마음과 같고, 나 자신부터 그런 태도를 갖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레지던트 지원에서 ‘불합격을 당한’ 그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로서 이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최근의 사건들로 인해서 깊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한 개별인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사회보다 훨씬 크고, 다채로운 색채로 가득하고, 또한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무수한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이 도처에서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누구도, 또한 그 어떤 외적인 요소들도, 자신의 내면 세계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굳건히 내면의 정원을 보호하고 가꾸어 가면서, 지금 한국에서의 경험-너머에 펼쳐질 더 큰 세계를 꿈꾸는 ‘낮 꿈’을 치열하게 꾸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해 나가도록 매 하루마다 생명 에너지를 스스로 속에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강남순)
인문 운동가가 격렬하게 싸워야 할 이러한 비인간화(dehumanization) 현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하슬람 교수는 인간성을 두 개의 하위 차원으로 나눈다.
(1) 동물적 차원의 비인간화인데 이때에는 도덕성, 성숙함, 교양, 깊이, 그리고 정교함과 같은 인간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2) 기계적 차원 비인간화로서 따뜻함, 감정, 자율성, 융통성, 합리성과 같은 인간 본성을 부인하는 방식이다.
동물적 비인간화는 주로 인종학살과 같은 노골적인 형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미묘한 인종차별과 같은 형태로도 작동한다. 반면 기계적 비인간화는 주로 기술 사용과 의료 행위 시에 작동하는데 이때 인간은 물건이나 도구로 취급된다. 그러면 타자에 대한 비인간화를 더 쉽게 하는 사람들은,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위계를 공고히 하고 그 위계의 상층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권력을 가진 진보주의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비인간화가 전쟁이나 학살 같은 노골적 분쟁 상황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광범위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비인간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거긴 완전히 무사하지 못할 거야”라는 식의 위계적 말투는 상대 진영을 비인간화하는 시작일 수 있다. 2020년 봄 중국인을 비하하는 용어인 ‘짱깨’의 급증도 일상 속의 비인간화라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을 내뱉는 순간, 우리는 그 대상들을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다. 비인간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자주 접촉하는 거다. 이렇게 자주 만나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서로 핏대를 올리며 험한 말을 내뱉던 사람들조차도 반려견을 키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이 나와 같은 멀쩡한 인간임을 각성한다.
기금까지 비인간화의 문제는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칼럼(경향신문, <비인간화의 늪>, 2022년 1월 18일자)을 보고 얻은 생각들이다. 인문 운동가로서 나부터 많은 각성을 하게 했고, 내 일상부터 점검을 하고, 다 같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윤리적 감수성을 키우고 싶어 길게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장대익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며, 나도 같은 문제 제기를 한다. "대선 정국에서 상대 진영에 대한 비인간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찢재명, 윤도리 같은 밈 놀이가 자기 진영의 사기를 북돋을 수는 있겠지만, 상대 진영을 비인간화하는 늪으로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권은 이런 비인간화 말투를 매우 불편해 하는 시민들이 다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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