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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보았네."

186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8일)

 

나에게 페이스 북은 세상과 사람을 만나는 광장이자 학교이다. 믿고 만나는 분의 담벼락이 있다. 그걸 찾아내려면 안목, 아니 눈썰미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문해력도 필요하다. 올해 초에는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통해 이어령 교수님의 근황을 만났고, 교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많은 통찰을 얻었다. 이어령 교수는 지금 투병 중이시다. 암이신 데, 항암 치료를 받지 않으시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길 원하신다. 그런 와중에 지난 11월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대화> 내셨다. 내가 기본적으로 조선일보를 좋아하지 않는데, 몇몇 칼럼은 인터넷을 통해 읽는다.

 

1 인터뷰는 2019 10월에 했다. 그리고 김지수 기자는 1 동안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담은 깊은 라스트 인터뷰"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지난 11월에 냈다. 김기자가 1 여의 시간 동안 평창동을 방문하여 그의 지적 여정을 인터뷰로 기록한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책에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화하는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나도 책을 사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차에 금년 1 1일에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 믿으라" 이어령 넥스트> 제목의 [김지수위 인터스텔라] 페이스 북에서 보았다. 얼른 기사를 열었더니 눈물이 돌았다. 교수님의 초췌한 모습 때문이다. 2019 사진과 2022 사진을 공유한다.

 

시간은 우주의 주인이자 인간 운명의 결정자이다. 시간 앞에 당해낼 자는 아무도 없다. 이어령 교수는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죽음을 기다리시며 자신의 지성을 마지막까지 뿜어내시고 있다. 그분의 주옥 같은 말씀들을 정리한 , 인상적인 것들을 공유해 본다. 우선 2019 인터뷰 내용이다. 제목은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보았네"이다. 내용은 블로그로 옮긴다. 시간 있으신 분들은 찾아 보시고, 많은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란다.

  1. 건강해 보이신다는 말씀을 드리니, 대답이 "남은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허허." 나도 실제 그렇게 생각한다. 자존감을 잃지 말하야 한다. 자존감(dignity)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2. 우리의 죽음은 체험할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 없다.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는다.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만, 물고기가 자기가 사는 바다를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 그럼 우리는 죽음을 어디서 찾을까? 이어령 교수는 생명의 출발점인 탄생에서 찾았다. 그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깨달어야 한다고 말했다. 죽음을 탄생의 신비로 풀자는 거다.
  3. 그가 탄생을 생각하다 얻은 것이 '생명은 입이다'라는 거다. 태내에서도 생명은 모든 신경이 입으로 쏠려 있다. 태어난 후에는 입으로 있는 힘껏 어머니의 젖을 빤다. 그리고 입술을 비벼 소리를 낸다. "'' ''". 가벼운 입술 소리 ''으로 '엄마', '', 무거운  입술 소리 ''으로 '아빠', '' 말한다. 물은 맑고, 불은 밝다. 흥미로운 통찰이다. 물과 , 엄마와 아빠는 음과 양의 양태이다.
  4. 동아시아의 탄생과 서양의 유전학은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승이 10 가르친 뱃속에서 가르친 10개월만 못하다는 거다. 그래 우리는 뱃속의 아이를 이미 살로 보는 거다. 그리고 이어령 교수는 말한다. "처음부터 목숨은 빌린 거다. 바깥에서 멀리서 36억년의 시간이 쌓여 거다."
  5. 인격의 핵심은 무엇일까? 김형석 교수는 성실성이라고 보았다. 나는 비루하지 않고, 자존(dignity) 유지하는 있다고 본다. 일상 속에서는  있는 것도 한번 참고, 우회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자존감(dignity)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어령 교수님은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신다.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아니라, 다르고 유일하다는 평등이라는 거다. 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이든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라는 거다. 유니크함(유일함) 평등이고, 동시에 살아 있는 것은 공평하게 죽는다는 것도 평등이다. 그러나 자존감을 유지하는 인격의 핵심이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1 계율이고, 번만 있다. 그것이 2 계율이다." (에리히 케스트너, << 가지 계율>>)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 쓰신 이근후 교수의 글에서 만난 문장이다. 번만 살아야 하는 삶을 어떻게 것인가? 오늘 아침 화두이다. 신영복 교수의 사유를 이근후 교수는 인용했다. "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슬픔이 인내 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장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나이들어감에 겪는 슬픔을 달래 준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 사소한 기쁨과 웃음을 잃지 않는 , 우리의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사는 쉽지 않다. 욕심덩어리가 아직 가득 차 있는 탓일까. 나를 버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매시간 실감한다. 그러나 인생을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면 조금 속이 편해진다. 그래도 새해니까 나무를 닮고 싶다는 건방진 바람 한 번 품어본다. 사진은 우리 동네 초등학교 울타리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나무이다.

 

 

나무 기도/정일근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여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다 주는 나무로 살고 싶다

새해에는 그대를 위한 나무가 되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나무가 되어다오

우리 나무와 나무로 만나 숲을 만들자

그런 사랑이 만드는 새로운 숲이 되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1. 이어령 교수의 정체성은 '우물을 파는 ' 했다.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는 않았다. 미지에 대한 목마름, 도전을 했다는 거다. 그건 호기심이고, '두레박' 갈증이고,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으려는 거였다 한다.
  2. 인간에게도 퇴화한 날개 있다. 새는 날짐승인데, 무거운 새는 난다. 날개가 덮개가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마이너스 셈법으로 몸이 가벼워지면 난다. 고통을 통과해서 가벼워진 영혼은 위로 뜬다. 우리가 알다시피, 던컨 맥두걸의 실험에 의하면, 죽은 후에 떠오르는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 했다. 죽어갈수록 보태지 말고 불순물을 빼야 21g 무게로 있다는 거다.
  3. 이어령 교수가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모든 선물이었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려면, 공의보다 공감이 먼저라 한다. 물질이 자본인 시대는 지났다. 이젠 공감이 가장 자본이라는 거다. 공감이란 마음 장사인 거다. 아름다움을 찾는 거다. 이젠 돈으로 없는 삶의 즐거움을 사러 온다. 이를 마디로 말하면, 공감이 사람이 불러 모으는 거다.
  4. 2019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덮어 놓고 살지 말라' 거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 했다. 자기가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어놓고 산다는 거다. 젊은 사람들이 있는 남이 일을 해보는 거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것을 선택해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고, 못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위험 부담이 있고, 위험을 보상하는 것이 창조인의 모습이다.
  5. 이어령 교수에 의하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는 시기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만조의 시기로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고 있다.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한다.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갯벌이 생기니까.
  6.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어령 교수는 딸을 암으로 딸을 먼저 보냈다. 미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딸은 목사 안수를 받았고, 위암 발병 이후, 수술하지 않고 시한부를 택해 열정적으로 쓰고 강연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 보낸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는 항암 치료를 받지 않고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다 생을 마감했다. 이어령 교수도 현재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사용한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투병이라는 말보다 '친병' 좋다. 동양은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본다. 상호성이 있다는 거다. 육체도 나의 일부이니까.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싶다. 많은 사람이 죽음을 나와 상관 없는 남의 일로 생각한다. 영원히 거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내일이 없어, 오늘이 전부야"라고 생각하면 지금이 가장 농밀한 순간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는 것인 농밀하게 사는 거다. 때문에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다.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암이 뉴스가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거다.
  7. 그는 '어느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했다. 자신이 갈피를 넘기던 , 자신이 쓰던 컴퓨터,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다고 기도한다 했다. 전까지는 죽음의 의미, 생명의 선물을 마지막까지 알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고 죽음을 맞을 생각이라 했다. 나도 당하는 죽음보다 맞이하는 죽음을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보고 얻은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 인간에게 죽음은 역설적으로 구원이기도 하다.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선물을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이어령 교수에게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다.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돌려주는 거라 했다. 원래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 보내는 거다.그래 우리는 '죽는다' 하지 않고, '돌아간다' 한다.

 

 

2022 1 1일의 인터뷰와 작년 11월에 나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만난 삶의 지혜는 몇일 동안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