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청호 500리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대전시 동구 마산동에서 고려 말에 건립된 미륵원의 터를 만난다. 이곳은 서울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던 고려와 조선시대의 원(院; 역과 역 사이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었다고 한다. 고려 말 황윤보가 건립하고 조선시대에 후손들이 비영리로 운영했는데 길손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무료 제공하고, 행려자를 위한 구호활동을 벌이며 오늘날의 사회복지기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회덕(懷德) 황씨들이다. 그러니까 대전이 있기 전에는 회덕이 이 지역의 중심이었다. 난 이 마을 이름을 좋아한다. 회자가 '품을 회'자이고, 덕은 '덕 자'이다. 그러니 회덕은 '덕을 품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난 여기서 우리 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모습을 읽는다. 이 말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우리 사회는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기득권과 '갑'의 놀부 심보가 암처럼 퍼져 가고 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 윗사람이 우선 자기 것을 희생하는 문화가 부족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문화가 아쉽다. 자신이 기득권이 된 것은 다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많은 약자의 희생으로 기득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힘 있을 때, 약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기회가 살면서 쉽게 그리고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강자에게 당당히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 '을'과 약자에게는 내 것 일부를 양보해 함께 풍요로워지는 '너그러운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생활문화 운동이 시급하다. 미륵원지 앞에서 이런 생각에 잠겼다.
대승불교에서 미륵(彌勒)은 석가 다음으로 부처가 된다고 약속 받은 보살이고, 미륵 신앙은 미래불(未來佛)로서의 미륵을 믿어 현세에서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믿음이다. 이런 미륵 세상을 구현하려는, 이 미륵원의 부속건물 남루(南樓)가 1980년 이 터에 복원되었다. 몇 년 전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올 봄에 가보니 빈집이었다. 그래도 혼자 봄이 찾아 와 "봄 향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흙을 삐 집고/곱디 곱고 연하디 연한 몸으로/오직 삶의 염원으로 고개를 들어/새로운 세계에 눈부시듯 경이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봄 향기/이재기
오랜 시간 꿈꿔온 긴 기다림에서
버릴 수 없었던 삶의 욕구가
제철을 만나 무게 실린 흙을 삐 집고
곱디 곱고 연하디 연한 몸으로
오직 삶의 염원으로 고개를 들어
새로운 세계에 눈부시듯 경이로운 삶이 시작됐다
따스한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삶의 분주한 희망의 합창
그렇게 다가오는 봄의 제전에서
향긋한 내음과 연두빛으로 피어나는 새싹이 있다
오랜 인고의 세월 끝에
봄빛으로 자리잡고
영원히 들려올 멜로디로 감싸 안는다
정녕 이것이 나의 현실인지
돌아보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안고
설레이듯 흔들리는 마음 어디에 둬야 하나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최후의 봄 일거라는 생각에
이 시간 이렇게 소중함에 몸서리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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