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매주 목요일은 좋은 친구들과 <장자> 원문을 함께 읽고, 성찰하는 날이다. 어제는 제4편 "인간세"의 11장-14장을 읽었다. 심재(心齋, 마음 굶김) 라는 좋은 말을 깊게 생각해 보았다.
안회는 자기가 인의(仁義)를 갖추었기에, 요즈음 말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겉으로 나마 굽실거려야 할 때는 굽힐 줄 아는 타협심과 유연성도 있고, 필요할 때엔 옛말이나 고사(古事)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용해 쓸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박식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니 더 이상 뭐가 모자라는지 자기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도덕성, 참신성, 진취성, 두뇌, 학연, 건강, 젊음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아직 모자라다니, 제발 무엇이 모자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에 공자는 한마디로 '재(齋)하라'고 한다. '재'란 말은 '굶다'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비우는 것이 아니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안회는 그런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자기는 본래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나 굶는 것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라면 자기보다 나은 적격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말하는 '재계'란 그런 육체적인, 혹은 의식(儀式)적인 재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재(心齋)'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재(齋)'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齋戒)'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이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는 제2편에서 말한 '오상아(吾喪我)' 그리고 제6편에 나오는 '좌망(坐忘, 앉아서 잊어버림)'과 함께 <장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이 우리의 욕심, 분별 심, 이분법적 의식(意識), 일상적 의식, 자기 중심 의식인 보통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이를 초월하는 초 이분법적 의식, 빈 마음, 새로운 마음을 갖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은 오전에 마을공동체 공모 사업에 심사가 있어, 인문 일기 쓰기가 늦어졌다. 오늘 사진은 어제 동네 연구소 앞에서 찍은 목련이다. 지금 한창이다. 순백이다. 목련을 보면 이문재 시인의 <봄날>이 생각난다.
봄날/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그리고 심재를 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고 한다. "瞻彼闋者(첨피결자)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길상지지) 夫且不止(부차부지)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 이 건 한편의 시이다.
"저 빈 곳을 보라
텅 빈 방에 밝은 햇빛이 찬다.
행복은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것
고요함 속에 머무르지 못하면
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좌치)이라 한다."(오강남 역)
장자는 "마음의 재계(심재)"를 강조한다. 즉 이름이나 명예를 버리고 무심한 경지에 이르러야 일체의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재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재를 하면, 일상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옛날의 '작은 나(self, 小我)'가 사라지고, 새로운 큰 나(Self, 大我)'가 탄생한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을 때 명예나 실리 추구에 초연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새장 같은 조정이나 정치판, 사회 어느 곳에 있더라도 위험 없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어야 사물의 참된 모습에 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허(虛)와 무(無)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장자가 유가의 중심인물인 공자를 통해 자기의 지론을 펼치는 것도 재미있는 착상이다. 이는 역설과 해학으로 일관한 그 다운 수사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쉽지는 않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 몰라도, 사회에 참여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살기는 몹시 어렵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심재를 하며 마음을 완전히 텅 빈 방과 같은 상태가 되면 그 '텅 빈 방이 뿜어내는 흰 빛', 곧 순백의 예지가 생기는 것을 체험하리라는 것이다. 그 순백을 목련에서 보았다.
이를 위해, 1)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가만히 앉아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2)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을 모으는 일'이 기본 요건이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은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무릇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앎을 밖으로 향하게 하라." 장자는 우리의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여 깊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속하는 마음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앎을 '밖으로 하여' 버릴 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초월적 힘'이 발동하리라고 했다. 이런 신비한 힘이 들어와 작용하는 체험을 해야 비로소 정치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사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정치에 참여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는 마음, 자체가 문제이다. 간디는 "종교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하는 사람은 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종교나 정치 모두 우리 삶의 궁극적인 차원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대학>에도 정치에 참여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궁극의 이상이라고 했다. "사물을 궁구하고(格物), 앎의 범위를 극대화하고(致知), 뜻을 성실히 하고(聖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인격을 도야한(修身) 사람만이 가정을 꾸리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平天下)"고 했다.
<장자>의 역자인 오강남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대 이후 신유학에서는 처음 격물치지를 의식의 변화, 초월적인 밝음(明)의 획득으로 해석했다. 우리의 자의식(自意識)을 말끔히 비우고 진정으로 '남을 위한 존재'로 탈바꿈할 때 우리의 사회 참여가 이웃과 사회와 세계를 위해 진정으로 향내나는 산 제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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