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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방부제가 썩는 나라/최승호

1785.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19일)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 중 일곱 번째 rule(규칙)인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는 원하던 일을 중단했다. 이웃들과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들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이다. 속상하던 차에, 배연국 세계일보 논설위원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

류시화 시인이 쓴 인도 우화집 제목이 위안을 주었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이 책에서 한 소년이 말한다. 그는 먼저 벽에 대고 총을 쏜다. 그런 다음 총알 자국에 백묵으로 원을 그린다. 그러면 원마다 정중앙을 관통한 자국이 난다. 그러면 단 한 방도 과녁의 중앙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삶의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키기는 쉽지 않다. 화살이 빗나가거나 제대로 날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삶에서 활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삶의 기회는 이번 생에 단 한 번 뿐이니까. 그 때 우리가 취할 태도는 소년처럼 내가 선택한 것에 동그라미를 치는 절대 긍정의 자세이다. 오늘 비록 삶의 과녁이 빗나갔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어제 이야기를 이어간다. 피커슨은 기독교가 영적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본다. 기독교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성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고 정한 것이다. 이런 교리는 한계가 있었지만, 왕과 귀족들, 부자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켰다. 긴 시간 동안 온갖 험난한 과정을 거쳐, 모든 개인은 원칙적으로 동등하다는 생각이 서구 사회의 기본 전제로 자리를 잡아 갔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게 인정했을 뿐 실제로 그런 생각이 잘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 가르침 덕분에 유럽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노예에 기반을 둔 계급 사회, 즉 타인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관습은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개인과 사회를 재조직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 인간을 괴롭히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하자, 과학의 발전을 자극했다. 그러다가 니체가 등장하였다. 그는, 당시 유럽인들이 진리로 여기는 것들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기독교 핵심 교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야기에 담긴 도덕적, 영적 진리와 현실 세계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리로 구분된 두 개의 진리가 충돌을 했다. 그리고 니체는 기독교가 도덕적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받았다'이다.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구원했다고 믿는 자는 '모두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의 책임을 구세주가 떠맡았기 때문에 인간은 특별히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으로 보는 교리이다. 니체의 비판은 바울과 훗날 프로테스탄트(신교)들이 교인들의 도덕적 책임을 없애 버렸다는 거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을 중요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는 거다.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은 기독교에서 신성한 의무였다. 그것은 추상적인 교리에 집착하며 말로만 믿음을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구세주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이는 삶의 모범을 스스로 현실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었다. 심리학자 융은 이를 '영원불변의 양식에 살을 입히는 것'이라 표현했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명령한 행위를 한 번도 실천한 적이 없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뻔뻔스러운 주장이 나온 이유는, 예수가 요구한 행위를 널리 천명할 용기와 의지가 교회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세계를 구원했고, 구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를 위한 것이며, 구원은 노력과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다음 같이 세 개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강화된다.
(1) 내세를 중요시하고, 세속적인 삶의 의미를 과소평가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고통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회피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2) 구원은 이 땅에서 땀 흘리고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여겨지며 현재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3) 하느님의 아들이 중요한 일을 이미 모두 끝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다른 도덕적인 의무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당신이 인류에게 남긴 짐, 즉 진리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짐은 인간이 떠맡기엔 너무 무겁다"(도스토옙스키,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개인이 자유롭고 적법하게 행동하려면 엄격하고 일관적인 규율에 따라 파괴 직전까지 내몰릴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정신을 기르려면, '자유롭지 않은 상태'를 경험해야 한다. 그 상태가 전체주의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전체주의에도 반발하지만, 우리 자신의 전체주의에도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오늘은 조금만 먹겠어'라 아무리 다짐해도 폭식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성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천성이 있다. 우리는 그 천성을 찾아내고, 그 천성과 한바탕 씨름을 벌어야 한다. 그런 후에 자신과 타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나', 즉 '자각하는 나'야말로 어떤 회의에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초석이라 믿었다. 데카르트 이전에 이미 기독교 시대에 '나'가 로고스,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뀌어 혼돈과 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로고스를 세속화한 것이다. 로고스를 '자각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자각하고 생각하는 나'는 근대적 자아이다.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이겨내고 영원히 부활한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피조물은, 본능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하고 상황 변화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을 생각을 통해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 어려운 말이다. 행동하는 대신 생각으로 끝낼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의 극장에서 무수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그 아이디어를 다른 아이디어와 비교하고, 현실에서 검증하며, 타당성을 확인한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포기해도 상관없다.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아이디어가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라고 표현했다.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은 아이디어에 오류가 있더라도 아무런 제약 없이, 아무런 불이익 없이 다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아이디어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각의 전제 조건인 셈이다.

가을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 온 것 같다. 제법 춥다. 이런 날씨를 더 춥게 하는 것은 눈 감고 귀 닫으려 해도 연일 뉴스를 장식하면서 보이고 들려오는 부패한 자들의 뻔뻔함이다.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한다. 어느 날 농부가 호박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은 왜 이런 연약한 줄기에 이렇게 큰 호박을 달아 놨을까? 그리고 튼튼한 상수리 나무에는 보 잘 것 없는 도토리를 주셨을까? 며칠 뒤, 농부가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가 무언가 이마에 떨어져 잡을 깼다. 도토리였다. 순간 농부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휴~ 호박이면 어쩔 뻔 했을까?" 세상을 불평의 시선으로 보면 온통 불평 천지이고, 감사의 시선으로 보면 온통 축제의 장이다. 참으로 오묘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내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누구든지 똑같이 선택의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오직 모두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긍정적인 생각은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매력이 있다.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방부제가 썩는 나라/최승호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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