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10)

오랜 만에 <<장자>> 이야기를 한다. 어제는 한글날로 휴일이었고, 오늘은 주일이다. 그리고 내일은 대체공휴일로 연속되는 연휴이다. 그러나 동네를 벗어나지 않고, 동네 일을 하고 있다. 오늘은 마을 공유공간 <이음> 공간지킴이 봉사를 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 마을의 교통/주차 문제 해결을 위한 리빙랩 프로젝트로 10월이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 <<장자>> 함께 읽기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달 9월 27일 <인문 일기>에서 말했던 '득도의 7 단계'를 다시 소환한다. 그 7 단계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외천하(外天下)에서 시작하고,
(2) 외물(外物)
(3) 외생(外生)을 거쳐,
(4) 조철(朝徹) 단계와
(5) 견독(見獨) 단계에 이르고, 여기서
(6) 무고금(無古今), 무시간의 경지와
(7) 불사불생(不死不生), 곧 사생의 구별이 없어지는 경지를 맛보는 단계이다.
일정한 수련을 통해 일상적 의식에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들어가므로, 우선 외부 세계, 물질 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나'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들은 전체적으로 잊음, 비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갑자기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하나'를 보게 된다. 이런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어지는 무시간(atemporal)의 경지,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머물기에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장자>>에서 중요한 흐름인 제2편 '제물론'의 오상아(吾喪我), 제4편 '인간세'에 나오는 심재(心齋)나 제6편 '대종사'에 나오는 좌망(坐忘)과 같은 맥락이다. 우선 오상아는 유기체의 감각에 매몰되어 만들어진 편협한 ‘나’를 죽이고, 항상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느끼며 세상과 하나되는 ‘나’를 살려내는 것이다. 1년에 한번이, 한달에 1번으로, 한달에 한번이 매일 1번으로, 매일 한번이 시시각각으로 편협한 ‘나’를 죽이고 세상과 하나인 ‘나’를 살려낼 수 있을 때, 물질을 지배하며, 자연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깨달으며 진정한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마음(心)을 빼내면(咸),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마음인 감성(感性)이 생겨, 자존심(心)으로 똘똘 뭉친 我가 죽고 자존감(感)이 충만한 吾로 부활한다 싶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진정으로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제6편 "대종사"는 진인(眞人)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진인이 되려면, 다른 말로 참된 인간, 즉 참 나(진아)를 찾으려면, 우리의 일상적인 굳은 마음(成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말끔히 비우는 '마음 굶기기(心齋)'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진인'도 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궁극적으로 도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 혹은 스승 중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도덕경>> 제25장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습니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이어령 교수님도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삶을 그리는 바탕은 인법지(人法地)라 했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산다. 그 다음은 천법도(天法道)이다. 하늘은 도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따르는 것이 도이다. 사회 속에서 이렇게 살기 쉽지 않지만, 나 스스로의 생각과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현상이라 기보다는 억지로 지어낸 행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것", 즉 무위성(無爲性)을 자연이라 한 것이다.
심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특히 복잡하고 비정한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 기여(寄與)하면서 보람 있게 사는 길인지를 말하는 제 4편 '인간세"에서 이런 맥락 속에서 나온다. 안회는 자기가 인의(仁義)를 갖추었기에, 요즈음 말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겉으로 나마 굽실거려야 할 때는 굽힐 줄 아는 타협심과 유연성도 있고, 필요할 때엔 옛말이나 고사(古事)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용해 쓸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박식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니 더 이상 뭐가 모자라는지 자기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도덕성, 참신성, 진취성, 두뇌, 학연, 건강, 젊음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아직 모자라다니, 제발 무엇이 모자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에 공자는 한마디로 '재(齋)하라'고 한다. '재'란 말은 '굶다'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비우는 것이 아니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안회는 그런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자기는 본래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나 굶는 것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라면 자기보다 나은 적격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말하는 '재계'란 그런 육체적인, 혹은 의식(儀式)적인 재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재(心齋)'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재(齋)'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齋戒)'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이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심재가 이루어지면, 제6편 '대종사'에서 나오는 좌망이 실현된다고 나는 본다. 이 단계가 득도의 6과 7단계가 아닐까? 일정한 수련(오상아)을 통해 일상적 의식에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들어가므로, 우선 외부 세계, 물질 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나'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들은 전체적으로 잊음, 비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 까지가 심재이다. 그리거 완전히 잊어버리면(좌망하면), 갑자기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후 '하나'를 보게 된다. 이런 단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어지는 무시간(atemporal)의 경지,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머물기에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으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하나'로 보는 것, 다시 말하면,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다. 장자는 이를 "인시(因是)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을 '명(明')으로 본다. 공자가 <<대학>>에서 말하는 "도재명명(道在明明)"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는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 말한다.
이런 사유를 이어가다 보니, 다음 시가 생각난다. "불샹불사(不生不死)",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병원에 있어도 좋고, 집에 있어도 좋다. 오늘 사진처럼,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다. 그냥 "먼지가 되겠다." 그러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먼지가 되겠다/송선미
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이어지는 <<장자>>의 문장은 우리들을 크게 위로한다.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한다. 사물을 대할 때,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허물어뜨리지 않는 것이 없고, 이루지 않는 것이 없다. 이를 일러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다 한다. 어지러움 속의 평온이란 어지러움이 지난 다음에는 온전한 이룸이 있다는 뜻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殺生者不死(살생자불사), 生生者不生(생생자불생) 其爲物(기위물) 無不將也(무불장야) 無不迎也(무불영야) 無不毁也(무불훼야) 無不成也(무불성야) 其名爲攖寧(기명위영녕) 攖寧也者(영녕야자) 攖而後成者也(영이후성자야)"
'양녕(攖寧)'이라는 말이 눈길이 간다. '어지러움 속의 평온'으로 해석된다. '변화 속의 안정', 즉 변화가 있은 후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따르는 길을 우선 '오상이(내가 나를 장례 시킨다)'를 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작은 삼, 작은 나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죽지 않는 길이고, 우리의 작은 삶, 작은 나를 살리는 것이 사실은 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에 죽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나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과 비슷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그 한 생명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것이 썩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좀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나'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을 지닌 진정한 '나', '우주적 나'가 새로 탄생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죽음과 부활하면, 예수가 소환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모든 인간이 신적인 존재라고 말했다는 것이 원인이다. 게다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선행이 신에게 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당시 자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세뇌를 당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인 신앙의 터전을 흔들어 버린 이단으로 예수를 대했다. 이단이란 자기네 끼리 모여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불안한 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소수에게 권력을 남용하며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단이라는 말의 그리스어의 뜻이 '(힘 있는 자들의)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통인가? 사람은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정통도 사실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만든 절충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들도 항상 분파와 분당을 만들어 쪼개고 쪼갠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소수 의견이 유일한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런 상황에서 불안해 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는 부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기를!(에이레네 휘민)" (요한 10장 19절)
평안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에이레네'의 기본적인 의미는 '일상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고 평온하여 고요하다'는 의미이다. 물론 당시 예수는 자신들이 하는 인사인 '샬롬'이라 했을 것이다. 샬롬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안정 뿐만 아니라 영적인 고요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말은 아카드어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인생과업이 있다. 그런 과업을 알고 그것에 몰입할 때 그 사람에게 단비처럼 내려오는 것이 샬롬이다. 그러니까 샬롬은 단순히 안녕이 아니라, '당신은 자신이 꼭 해야 할 그것을 깨달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경주하고 있습니까'라는 촉구이자 명령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된 삶을 추구하는 자가 평안하다. 하나로 일치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에서 복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감동적인 하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하나를 찾으면 축복이다. 그 축복은 마치 신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내리는 복이다. 생명의 축복을 나는 주말 농장에서 만난다.
예수는 '너희에게 평안이 깃들기를'이라고 말하고, 그는 입김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말한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장, 22절) '입김을 불어넣는다' 것의 의미는 바람이 나간 풍선과 같은 물건에 바람을 불어넣는 행위이다. 그래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너의 손을 가져다 내 옆구리 안으로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되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배철현 교수는 '되어라!'에 방점을 찍었다. 영어로 말하면 be가 아니라 become이다. Become은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향해 마일 매일 조금씩 가는 수련과정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그 한 가지를 찾는 고독의 시간을 갖고, 그 한 가지를 향해 정진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평안이다. 주말농장에 가 보면, 자연은 그렇게 사는 것을 본다. 지금은 죽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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