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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안온한 일상을 한 번에 하루씩 살고 싶다.


370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9일)

1
안온한 일상을 한 번에 하루 씩 살고 싶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인정 받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걸 버리면 안온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준비가 덜 되었어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아도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그 조급함에 우리는 삶이 더 불안해 진다. 몸은 지치고, 마음 바싹 말라 있다. 마음에 습기와 따뜻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려움 때문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 인정 받지 못하면 무가치해질 것 같다는 두려움
§ 멈추면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

그런 경우는 잠시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거다. 사실 우리는 크게 성공하지 않아도 하루가 무너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정 없어도 내 존 재는 흔들리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나 답게 숨 쉬며 살 수 있다. 이걸 알게 되면, 나라는 나무가 잘못 자라던 방향을 가지치기 해야 한다. 너무 위를 올려다보느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이젠 조급하게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오늘 하우의 일상을 조용히 살아내는 거다. 이런 평범하고 괜찮은 하루 위에 내 삶의 뿌리는 단단히 내려가 퍼진다.

안온함의 반대가 조급함이다. 조급함이 덜어내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정신적 우회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안온함은 편안하고 조용하며, 마음에 근심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안온함은 잘 비운 날, 괜히 더 채우지 않은 날에 역설적이게 찾아온다. 생각을 버리면, 마음이 채워진다.
§ 해 보고 싶은 것은 기쁜 마음으로 도전하고 끝까지 힘쓰되, 그 결과 값에는 마음을 덜어낸다.
§ 물건은 조금 덜 가지는 대신 마음이 풍요롭게 지속되는 삶을 산다.

안온함을 방해 하는 것이 조급함이다. 조급이란 말은 참을성 없이 몹시 급함을 말한다. 자연을 둘러 보면, 조급함이 없다. 다 때가 있고, 그 때가 되면 자기 할 일을 한다. 자연을 믿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감사하고, 지금, 여기, 하루를 즐겁게 단순한 기쁨으로 살자. 우리가 자주 쓰는 빨리 빨리가 조급함과 재촉을 뜻한다. 하늘의 시간을 믿으면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느긋함은 그 하늘의 시간을 믿을 때 나온다. 믿고 기다리는 거다.

2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느긋하지 못하는 이런 조급함은 우리의 마음 속에 초조함이 만들어 낸다. 초조(焦燥)함은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상태이다. '그슬릴 초(焦)'는 불에 타거나 애가 타는 모습이고, '마를 조(燥)'는 습기가 없어 바씩 마르는 상태이다. 마음이 급하고 불안한 것이다. 그건 느긋함,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거다.

누구보다 초조함에 시달렸고 그것의 문제를 잘 알았던 작가 카프카는 초조함이 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두 개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 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카프카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초조함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충분히 지켜볼 수 없기에 어떤 대체 물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 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많은 지름길들, 금방 치료가 되고 금방 구원이 되고 금방 개선이 될 것으로 보이는 그런 많은 길들이 실상은 비극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우리의 초조함이 닦아 놓은 것들인 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인문학이라고, 인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인문학은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 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 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한마디로 초조해 하지 않는 것이다."(고병권)

3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 가’에 있다.” AI 시대에 인류는 호모 스피리투스 돼야한다고 주장하는 정용화 광주과학기술원 부총장의 말이다. 그는 최근 인공지능(AI) 시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한 책 <<라스트 휴먼>>을 출간했다. 책은 생성형 AI와 자동화 기술이 빠르게 확산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다운 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AI의 기술 발전이나 노동 대체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과 공동체, 자유와 영성의 미래까지 폭넓게 조명했다. 책은 AI 문제를 기술윤리 차원에만 한정하지 않고 인간 진화와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생성형 AI와 디지털 통제, 민주주의 위기, 자본주의의 한계, 기후위기 등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분석하며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강조한다. 특히 인간을 단순한 도구적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며 지성과 감성, 영성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스피리투스’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인간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또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언급하며 기술 발전 속에서도 인간 내면의 성숙과 관계 회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자가 말했던 "기심(機心)"이라는 말이 소환되었다. 기계를 이용하여 편리함을 구하는 기심이 일어나면 순박함이 사라져 정신이 사나워지고 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편리와 쉬움과 이익을 구하려는 갖가지 욕망이 차례로 일어나 마침내 '도'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다. 오늘날은 문명의 이기가 첨단을 달리고 일상 생황의 편리함이 극에 이르렀다. 

“양수기를 사용하면 편리하다는 것을 난들 모르겠소. 그러나 한번 기계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기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기계가 있으면 그에 따라 기계의 일(고장, 사고)이 있고, 또 기계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機心)이 있게 마련이오. 기계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면 순박함을 잃게 되오. 순박하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오. 불안정하면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지킬 수 없소. 그래서 나는 기계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스스로 그것을 쓰지 않소.” (<<장자>> 외편 ‘천지’)
 
신이 준 고마운 선물인 손을 쓰지 않고 머리와 기계로만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엄숙한 경종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을 더 이상 손으로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손은 신이 우리에게 준 귀중한 선물이다. 기계에 대한 열광이 지속되면 결국 우리는 무능력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생명의 손을 잊어버리게 된 것을 스스로 저주할 날이 올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인공지능(AI) 시대의 인재는 산업 시대의 인재 하고는 사뭇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탄생할 것이다. 인간을 잘 이해하고, AI를 어떻게 같이 접목할 것인지, 새로운 각도에서 쳐다보는 사람이 인재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이 묻는 말에 답하는 '리스닝 AI' 시대를 거쳐 지시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에이전틱 AI'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러니까 생산 패러다임이 상품에서 지능으로 전환되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특정 분야에 얽매일 수 있는 전문가(스페셜리스트)보다 AI와 공존하는 사회 시스템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제너럴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이 물리적 상품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공장이 AI를 생산하는 'AI 팩토리'로 변모해 지능 자체를 만들어내는 세상이 됐다. 전환기에는 에이전트를 잘 다루는 개인과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며 양극화가 심해질 수 있지만, 기술이 궁극적인 범용인공지능(AGI) 단계에 도달하면 상황은 역설적으로 상향 평준화된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역량이 10, 뛰어난 사람을 100이라 할 때 기존 격차는 10배지만 1000의 능력을 지닌 AI가 도입되면 1010 대 1100이 돼 실제 차이는 9% 수준으로 줄어든다. 격차가 무의미해지는 미래에는 인간과 AI가 공존하는 일자리가 늘어나며 여러 분야를 아울러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더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향 평준화는 직업의 형태와 자격증의 가치도 바꿔 놓을 것이다. AI가 업무를 처리해 투입 시간과 노력을 10분의 1로 줄여주면, 한 사람이 10개의 직업을 갖거나 한 회사에서 여러 직무를 수행하는 멀티 잡이 일상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9 to 6 출퇴근 공식도 깨질 수 있다.

이젠 자격증 하나로 평생을 보장받는 시대가 저물 수 있다면서 필수 역량으로 네 가지 근육을 제시할 수 있다.
§ 생각하는 근육: 정해진 지식을 암기해 문제를 빨리 푸는 기계적 능력을 넘어, 현상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고 깊이 고민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 적응의 근육: 빠른 변화 속에서 창업이나 진로 선택이 완벽한 실패로 끝나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긍정적으로 다음을 대비하는 회복 탄력성이다.
§ 공감의 근육: 효율적인 문제 해결은 AI가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지만, 타인과 교감하고 마음을 나누는 능력은 대체 불가능한 무기일 수 있다. 
§ 보디 스킬, 신체 능력: 신체를 직접 움직여 가치를 창출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예술과 체육 영역은 로봇이 흉내 내더라도 인간 고유의 감동을 주기 어려울 수 있다.

4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기술이 부족하다. 잘 모르겠지만, 우선 어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고전에서 배울 수 있다. 공자가 본 어진 사람은 '강직하면서 의지가 굳은 사람이고, 일상에서 질박한 것을 좋아하고 과묵하면서 진중한 사람'이다. 그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왈: 강의목물, 근인(子曰: 剛毅木訥, 近仁(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함이 인에 가깝다. '강의목눌' 자체가 바로 '인(仁)'은 아니지만, '인'에 가깝다.  멋진 해석도 있다.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굳세 지면, 세속적 욕구에 서투르고 어두운지라 인에 가깝다."
 
§ 강(剛): 강직하다는 말로 마음이 꼿꼿하고 올곧다는 뜻으로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신념을 바꾸지 않으며 유리함과 불리함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 의:(毅) 뜻한 바를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는 의지력이 강한 것을 뜻한다. 강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과 관련된다면 의는 결심한 것을 실현 내려는 추진력과 관련된 표현이다. 브런치에서 팽소아라는 분은 "강은 펀치 력이 강하다는 취지라면, 의는 맷집이 강하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것보다 강은 신념이고 의는 그것의 실천력이 강하는 것으로 읽는다.
§ 목(木):  그냥 나무로 읽어 목석처럼 뻣뻣하거나 멍청하다는 뜻보다는 통나무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이 꾸밈과 감춤이 없고 화려와 사치를 싫어하며 겉모습보다 내면의 뜻을 더 중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눌(訥): 말솜씨가 없어서 더듬거리며 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입이 무겁지만 꼭 해야 할 말은 하기에 진중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재잘재잘 떠들어대지 않을 뿐 입을 열면 조리 있게 말을 잘하기에 함부로 얕볼 수 없다는 거다.
 
어진 사람은 그냥 착한 사람이 아니다. 속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 강직함이라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불굴의 추진력이 굳건함, 즉 의이다. 그에 비하면 질박함과 진중함을 갖추는 일은 일상의 생활 태도이다.

5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축일이고, 말씀은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밀알 하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기꺼이 죽는다
제 품에 안길
열매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이가 가질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
땅에 떨어져
기꺼이 죽는다

7
나는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2026/5/29/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요한 복음 12장 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싹이 트려면
딱딱한 씨앗은 생명을 품고 있긴 하지만 땅에 떨어진 후 어둠 속에서 충분히 썩어 껍질이 벗겨지고 부서져야 싹이 틉니다. 품고 있는 생명이 밖으로 나오려면 썩고 부서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싹이 트지는 않겠지요. 그냥 그 밀알 하나로 끝날 뿐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온전함을 버리면, 죽은 것처럼 보였던 씨앗에서 뿌리가 나오고 싹이 돋고 점점 더 자라서 가지 끝에 밀 이삭이 달리고 가을에는 많은 밀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밀은 빵이 되어 우리를 먹이고, 미사 때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될 제병이 되기도 하지요.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우리는 그 열매의 생명을 나누어 얻게 됩니다. 이 밀알처럼, 예수님께서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 고통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밀알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며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자만과 교만, 욕심과 고집과 탐욕, 무질서한 애착과 이기적인 자아에서 죽고 많은 열매를 맺길 바라십니다. 하루아침에 녹음이 우거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살아가야 합니다.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8
2026년 5월 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오늘은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기억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 말씀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통로'임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흔 살의 노인 엘아자르는 우리에게 신앙인의 품격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박해자들은 그의 목숨을 아껴주는 척하며, 금지된 음식인 돼지고기를 먹는 시늉만이라도 해서 처벌을 피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2마카 6,24)라며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는 잠시 더 살기 위해 영혼을 팔기보다, 후손들에게 거룩한 법을 위해 기쁘고 고결하게 죽는 본보기를 남기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조선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양반이라는 기득권과 목숨을 지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천주만이 참된 아버지이시다"라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기꺼이 칼날 아래 섰습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두 분의 용기는 하느님 우선주의라는 하나의 신앙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생명의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밀알의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고 형태가 사라지는 죽음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 복자들은 한국 교회라는 척박한 땅에 뿌려진 거룩한 밀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당시의 가치관과 충돌하며 목숨을 내놓았을 때, 세상은 그것을 실패와 소멸이라 불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자리에서 오늘날 600만 한국 천주교 신자라는 풍성한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처럼 순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 지고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늘 꽃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해받고,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하며, 나의 자존심을 죽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순교자들의 시대가 피의 순교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땀의 순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편법을 거절하는 정직함, 나를 비난하는 이에게 먼저 건네는 따뜻한 인사,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내 시간을 내어주는 희생이 바로 우리가 오늘 뿌려야 할 밀알입니다. 내 안의 고집과 이기심이 꺾일 때, 비로소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나는 엘아자르처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떤 밀알이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까? 순교자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 그 길을 가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 계신 주님의 사랑이 훨씬 더 컸기에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기억하며 깊이 감사합시다. 그분들이 뿌린 밀알이 내 안에서 헛되지 않도록, 오늘 작은 희생 하나를 기쁘게 실천해 봅시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저희가 세상의 유혹 앞에서 비겁해지지 않게 하시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주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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