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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밭을 갈지 않고도 수확하고, 개간하지 않아도 기름진 밭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36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5일)

1
지난 5월 21일에 다 읽지 못한 <천뢰 무망> 괘의 '육이' 효사부터 다시 읽는다.

"六二(육이)는 不耕(불경)하야 穫(확)하며 不菑(불치)하야 畬(여)니 則利有攸往(즉이유유왕)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이는 밭을 갈지 않아서 거두며, 1년 밭을 갈지 않았는데도 3년 밭이 되니, 곧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가 된다. TMI: 耕:밭갈 경, 穫:거둘 확, 菑:1년 묵은 밭 치·일굴 치, 畬:3년 묵은 밭 여·새밭 여. 밭을 갈지 않고도 수확하고 개간하지 않아도 기름진 밭이 되니 나아가면 이로울 것이다. 말 그대로 하면, '육이'는 내괘에서 중정한 자리에 있고, 외괘 <건 ☰>에서 중정한 '구오'와 잘 응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중정한 천성(天性)을 받아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있으니,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늘의 본성에 따라 나아갈 것, 곧 하늘의 뜻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이 괘에서 이 두 효의 관계는 궁극의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내괘 <진괘>는 봄이고, '육이'가 동한 내호괘 <리괘> 농기구이며, 외호괘 <손괘>는 땅을 파는 것이니, "경(耕)"의 상이 나온다. '육이'가 동한 내괘 <태괘>는 가을이고, 내호괘 <간괘>는 과실과 채소를 뜻하니, "확(穫)'의 상이 나온다. "치(菑)"는 1년 묵은 밭을 말하고 "여(畬)"는 3년 된 밭을 말한다. 공들인 것보다 더 기름진 땅이 되는 것이다. <곤괘>는 밭의 상이고, <곤괘>의 음효들은 밭이랑의 상인데, 내괘 <진괘>는 봄이니 '육이'는 봄 밭의 상이 된다. 《이아(爾雅)》에 의하면, 밭이 1년 된 것을 ‘치(菑)’라 하고 2년 된 것을 ‘신전(新田)’이라 하며 3년 된 것을 ‘여(畬)’라 한다(田 一歲曰菑 二歲曰新田 三歲曰畬). 1년 농사를 다 짓지 않았는데도 3년 농사가 이루어지듯,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저절로 잘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의도적으로 부를 축적하려고 하지 않아도 부(富)하게 되는 것이고, 또는 천성(天性)에 따라 살아갈 뿐 욕심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밭을 갈지 않고도 수확하고, 개간하지 않아도 기름진 밭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바로 '무위(無爲)'를 말한다. 농민이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는 일이다. 농사란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철저히 천시(天時)에 맞추어 일해만 함이다. 따라서 '육이' 효사의 의미는 작위적이고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의 자세로 일할 때 일이 저절로 잘 풀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지익(無爲之益, 무위의 유익함)"(제43장)과 일맥상통한다. 노자는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면서 억지로 뭔가 이루어 내겠다고 뻣뻣하게 나가거나, 강제로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고, 물처럼 묵묵히 설치거나 조급함 없이 순리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것, "함이 없는 함', '무위의 위'가 더욱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원래 인간은 설득되지 않는 존재이다. 억지로 강요해서 내 말을 따르게 하는 결과는 잠시 뿐이다.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기에 오래가지 않는다. 자발적 선택과 동의가 지속적인 힘을 갖는다. 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하게 만드는 힘이 무위의 힘이 고 유익함이다. 이것이 도의 속성이고, 이런 도의 속성을 살천하는 사람이 성인이다. 성인은 무위의 실천 자이고, 도의 수행자이다. 

2
<천뢰 무망> 괘의 '초구'와 '육이'를 노자가 잘 말한 '무위'의 관점에서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도덕경>>에서 '무위'가 나오는 부분들을 열거해 본다.
- 제2장: 성인은 '무위로 일을 처리한다(處無爲之事, 처무위지사). "무위지사"란 말은 '함이 없는 함'으로 풀어 볼 수 있다. 그래도 '무위'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도올의 설명이 좋다. "'무위'는 '위(爲, 함)이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최대 특징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 행동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 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妄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자는 우리들에게 "무위지사(함이 없는 함)" 속에서 살라고 권유하는 거다. 무위에 대비되는 유위, 즉 무엇인가 자꾸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간다는 거다.
- 제3장: 무위로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무위(함의 없음을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는 거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라는 거다.
- 제37장: 도는 언제나 무위로 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무위 도식'이 아니다. 의식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고 지나치고 쓸데없고 허세르 부리고 계산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고 속 깊은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위- 함이 없는 함 - 이다. 
- 제38장: 상덕은 무위로 행하여 억지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하덕은 작위로 행하여 억지로 드러내려 한다(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無以爲,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 "무이위(無以爲)와 "유이위(無以爲)"가 대비되고 있다. "무이위"는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로, "유이위"는 '무엇을 가지고서 함이 있다'로 본다. 그러니까 "무이위"는 '무엇을 의도를 가지고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본다. 훌륭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도에 입각하여 살아가므로 자기 행동 마저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행동이 고침이 없고 구태여 억지로 일을 꾸며야 할 이유도 없다. 반면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꾸미고 잔뜩 일을 벌여 놓는다.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고 뭔가 해 놓아야 될 것처럼 조바심이고 늘 초조해 한다. 그러나 멀리 보면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 한 마디로 상덕(上德)의 사람은 무위(無爲)의 사람이고, 하덕(下德)의 사람은 유위(有爲)의 사람이다.
- 제48장: 학문은 닦을수록 나날이 더해지고 도는 닦을수록 나날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덜어내다 보면 무위에 이르게 된다. 무위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덜고 덜어, 무위의 경지에 이른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된다. 비우며 살자는 거다. 욕심내지 말자는 거다. 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무불위(無不爲, 되지 않는 일)라는 효과를 기대하는 거였다(
- 제63장:  무위로 행하고 일하지 않음으로 일하며 맛 없음으로 맛을 느끼고 큰 것을 작게 많은 것을 적게 여기라(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대소다소). '무(無)'는 '~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다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미(無味)" 앞에 '위', '사', '미'라는 동사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무위를 하라!' 무사로 일하라!' '무미로 맛을 보라!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무위(無爲)"나 "무사(無事)"는 '무위도식'한다고 할 때의 '무위'나 '무사태평'하다고 할 때의 '무사'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무위도식'은 '삶의 기본 조건인 노동을 포기한 채 그냥 놀고먹는다'는 의미이고, '무사태평'은 '미래에 닥칠 변화나 위기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안일한 자세'를 뜻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나 "무사"는 '무리수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 순리에 맞춰 자연스럽게 일을 계획하고 추진한다'는 의미다. 유위한 책략이나 유사(有事)한 계획에는 필연적으로 사람의 과도한 욕망이 개입되어 중도에 난관에 봉착하거나 뒤탈을 일으키기 쉽다. 이에 비해 "무위"나 "무사"는 적당한 목표와 방법을 설정하고 시기도 적절하게 조절하므로 순탄하게 일을 끌고 갈 수 있으며 아무 탈 없이 마무리도 깔끔하게 할 수 있다. 
- 제64장: 성인은 무위로 행하기에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에 잃지 않는다(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성인무위고무패 무집고무실).  '무위(無爲)하면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면 실패한다. 집착한다 것은 유위(有爲)함으로 무리수를 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무위'는 억지로 하는 않는 것이다. 전쟁이나 폭력으로 세상을 얻으려는 행위는 실패의 원인이 된다. '무집(無執)'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하고,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며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결국 천하를 잃게 된다. 

다시 '육이" 효사로 돌아 온다. '육이'가 동해 내호괘가 <리괘>가 되니 봄에서 여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고, 순탄하게 발전하는 것이며, 일이 밝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아가면 이로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3
<소상전>은 "象曰(상왈) 不耕穫(불경확)은 未富也(미부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밭을 갈지 않아도 거둠은 (억지로) 안 해도 부(富)하게 되는 것이다'가 된다. 하늘의 중정한 천성을 받아 천리에 맞게 순응하니, 억지로 부유하려고 하지 않아도 부유하게 된다. 또한 중정한 천성으로 욕심이 없이 바르게 사니 혼자 부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無爲)'로 행하면 성취를 이룰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부를 얻지 못했다면 무위로 행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탐하여 작위적으로 일을 추진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정신적 부(富), 안분지족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잇다. 물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 하려는 사람이면 끊임없이 땅을 갈고 또 갈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가 말한 "미부(未富)" 역시 '무위'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무위'로 행하다 보니 마치 밭을 갈지 않았는데도 수확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은 것인데, 거기에는 부자가 되겠다는 의도도 목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천명에 순응하여 무위로 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다. 

여기에서도 노자(老子)의 심법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도덕경》 제51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道生之(도생지) 德畜之(덕축지) 物形之(물형지) 勢成之(세성지)
是以萬物莫不尊道而貴德(시이만물막부존도이귀덕)
道之尊(도지존) 德之貴(덕지귀) 夫莫之命而常自然(부막지명이상자연)
故道生之(고도생지) 德畜之(덕축지)
長之育之(장지육지) 亭之毒之(정지독지) [成之熟之(성지숙지)] 養之覆之(양지복지)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 長而不宰(장이불재)  是謂玄(元)德(시위현-원-덕)

도가 낳고 덕은 기르며, 물건을 형상하고 형세를 이루니,
이로써 만물이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하지 않음이 없다.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무릇 누가 부여함이 없이 항상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낳고 덕이 기르며, 
자라게 하고 이루어 주며, 형통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길러주고 살피니,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하여도 자랑하지 않고, 길러도 주재하지 않음을
이를 일컬어 ‘현묘한(원) 덕’이라 한다.

'육이'가 동하면 지괘는 제10괘인 <천택 리(天擇 履> 괘가 된다.  이 괘의 '구이' 효사는 "九二(구이)는 履道坦坦(이도탄탄)하니 幽人(유인)이라아 貞(정)코 吉(길)하리라" 이다. '구이'는 밟는 도가 탄탄하니, 그윽한 사람(幽人)이라야 바르게 하고 길할 것이다. 밟아 나가는 길이 탄탄하다.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사람처럼 바르게 하면 길할 것이다. 공자가 말한 "미부(未富)"가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4
"六三(육삼)은 无妄之災(무망지재)니 或繫之牛(혹계지우)하나 行人之得(행인지득)이 邑人之災(읍인지재)로다" 이다. 번역하면, '육삼은 무망의 재앙이니, 혹 소를 매어 두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의 얻음이 읍 사람의 재앙이 로다'가 된다.  무망의 재앙으로 예를 들어 소를 매어 두었는데 행인이 가져가 버려 마을 사람들이 재앙을 입는 경우이다. TMI: 或:혹 혹, 繫:맬 계, 得:얻을 득. 예기치 않은 우환을 만날 수 잇다. 그러니까 자중하라는 거다. "혹(或)"은 '혹, 혹은, 혹시' 정도의 의미이지만, 비유를 사용한 내용에 맞추어 '예를 들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육삼'은 양자리에 음으로 있어 부당하고 중도 얻지 못하여, 바른 도를 잃고 천명에 어긋나 지극히 망령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재앙이 있게 되니, 마치 동네 어귀에 소를 매 놓았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소를 가져가서 읍 사람의 재앙이 되는 것과 같다. 무망의 극에 이르러 무망의 태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상구'와 정응하고자 조급히 나아가려 하니 무망의 태도를 지키지 못해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다. 

'육삼'이 동하면 내괘가 <리괘>가 되어 수레의 상이 나온다. 내호괘는 <손괘>로 끈으로 묶는 상이다. 수레에 소를 매어 둔 것이다. 그런데 소가 없다. 내괘 <진괘>로 지나가는 행인이 소를 끌고 간 것이다. 그리고 '육삼'이 변하면 내괘가 <이화(離火) ☲>가 되는데 <이(離) ☲>는 동물로 소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소(牛)’는 인간의 정신(精神)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중도를 잃고 배회하다가 어느 종교나 신념에 정신을 매 놓지만, 정작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자기 정신을 채 가니,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는 재앙이 되는 것이다. 

《맹자(孟子)》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孟子曰(맹자왈) 仁(인)은 人心也(인심야)오 義(의)는 人路也(인로야)니라. 舍其路而弗由(사기로이불유)하며 放其心而不知求(방기심이불지구)하나니 哀哉(애재)라! 人(인)이 有雞犬이 放則知求之호대 有放心而不知求하나니 學問之道(학문지도)는 無他(무야)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 번역하면, '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짊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로움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되, 마음을 잃고 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니,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잃어버린 마음(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가 된다.

그리고 <리괘>는 재앙(災)을 뜻하기도 한다. '재(災)'는 물과 불이 결합된 글자와 같다. 인간에게 수재와 화재만큼 큰 재앙이 없는 법이다. 1~4효의 상을 보면 <리괘>가 된다. <리괘> 속에 음이 두개 있는 모습이다. 음은 백성을 뜻하기에 음인의 의미가 나온다. 행인이 누군가의 소를 끌고 가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 마음 사람들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살다 보면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곤 한다. 

<소상전> "象曰(상왈) 行人得牛(행인득우) 邑人災也(읍인재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소를 얻음이 읍 사람의 재앙이다'가 된다. 중도를 잃고 천성을 상실한 망령된 상태에서 정신(소)을 매 놓지만 지나가던 사람이 채 가니,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재앙인 것이다. 

'육삼'이 도하면, 지괘는 제13괘 <천화 동인(천화 동인)> 괘가 된다. 이 괘의 '구삼' 효사는 "九三(구삼)은 伏戎于莽(복융우망)하고 升其高陵(승기고릉)하야 三歲不興(삼세불흥)이로다" 이다. 번역하면, '구삼은 군사를 숲에 매복 시키고 그 높은 언덕에 올라 3년을 일어나지 못하도다'가 된다. 우거진 풀숲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고 높은 언덕에 오르더라도 삼 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점을 쳐서 <천뢰 무망> 괘 '육삼'을 얻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하여 일 저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불필요한 인간 관계나 일에 연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권모술수를 도원해서라도 상대를 이기려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5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말씀은 <요한 19,25-34>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숨을 거두시다,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다" 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삶의 마지막 선물>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떠남이
남음인
그런
떠남을
언젠가
내가 떠날
벗들에게
삶의
마지막 선물로
드릴 수 있기를

헤어짐이
만남인
그런
헤어짐을
언제가
나와 헤어질
벗들에게
삶의
마지막 선물로
드릴 수 있기를

잃음이
얻음인
그런
잃음을
언젠가
나를 잃을
벗들에게
삶의
마지막 선물로
드릴 수 있기를

6
아들 예수를 사랑하듯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는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까지 나아갑시다.
2026/5/25/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요한 복음 19장 25-34절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십자가 아래에서
오늘 복음의 첫 장면에서 언급된 여인들은 유명하지도 않고 드러나게 업적을 이룬 적도 없지만 제자들마저 두려워 떠나버린 십자가 곁을 마지막까지 묵묵하고 용감하게 지켰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복음은 또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와 함께 계시는 장면도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와 이 제자를 가족으로 이어주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며 당신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시며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의탁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 모든 일이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고, 아들 예수를 사랑하듯 믿는 모든 이를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말로만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어머니의 자리를 내어드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가 십자가 아래까지 충실히 나아간 이들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성모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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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5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거룩한 위탁의 장면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홀로 남겨질 어머니와 제자를 바라보시며, 인류 구원을 위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성모님은 이제 '교회의 어머니'로 새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향해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머니'가 아닌 '여인'이라 부르신 것은 단순히 거리를 두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의 후손을  하셨던 그 예언이, 지금 이 십자가 아래서 완성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예수님 개인의 어머니를 넘어,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꿰찌르는 고통 속에서도, 성모님은 그 아픔을 온 인류를 품는 해산의 고통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성모님을 우리 마음의 집에 기쁘게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고, 성경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라고 기록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처럼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던 신의 있는 제자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우리 마음의 집에 모실 때, 교회는 비로소 차가운 제도를 넘어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갖춘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성모님은 기도로 교회를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강림 직전,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모님은 그들 한가운데 계셨습니다(사도 1,14 참조). 성모님은 흔들리는 제자들의 신앙을 기도로 붙들어 주셨고, 성령의 불길이 그들에게 내려앉을 수 있도록 마중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고 분열될 때, 성모님은 우리 곁을 지키며 우리가 다시 하나의 가족이 되도록 빌어주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로 이끄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는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연중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유언대로 성모님을 내 마음의 집에 기쁘게 모시고 있습니까? 또한 성모님처럼 고통받는 이들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우리 인생의 십자가 아래서 눈물 흘릴 때 성모님이 곁에 계심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서로를 어머니로, 아들과 딸로 받아들일 때, 이 세상은 주님이 꿈꾸셨던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를 당신의 자애로운 품에 안아주소서. 십자가의 고난 중에도 주님을 끝까지 따르셨던 당신의 믿음을 저희에게 나누어 주시고, 저희가 세상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충실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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