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5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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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최근에 불교의 공(空) 사상에 마음이 깊게 가고 있다. 그러다 진우 총무원장의 인터뷰를 읽었다. 내용은 양자역학이 알아낸 이치를 부처님은 2600년 전 깨쳤다는 거다. 진우 스님에 의하면,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진리에 들어선다. 물리학은 물질의 본질을 통해 진리에 다가간다. 종점에서 둘이 만난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이렇게 말한다. 내 앞에 있는 물건을 봤다고 하자, 우리 눈에는 그 물건이 입자로 보인다. 손으로 만져봐도 입자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그 입자가 곧 파동이라고 말한다. 1801년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은 빛이 파동의 성질임을 이중 슬릿 실험으로 입증했다. ‘빛은 알갱이(입자)’라는 뉴턴의 지배적 이론을 뒤집는 현대 물리학의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건 부처가 <<금강경(金剛經)>>에서 했던 말과 통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 꿈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에는 분명히 보이지만, 실체는 비어 있다(空)는 뜻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허무하다”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게 아니다.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자유로워진다. 삶의 슬픔과 삶의 고통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걸 바위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입자'라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그 바위가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걸 온전히 깨치면 어찌 되겠나? 이처럼, 나를 짓누르던 슬픔과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자유로워지겠나? 그래서 불교는 허무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본질적 자유를 말하는 종교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이라는 X축과 ‘공간'이라는 Y축 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 틀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변한다’ ‘사라진다'는 방식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입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도 절대적인 게 아니고, 공간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게 부처가 <<금강경>>에서 한 말과 통한다. "상(相,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겉모습이나 내가 가진 인식의 틀)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如來,'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부처-붓다-를 가리키는 가장 대표적인 명칭)를 보리라". 양자역학은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를 과학으로 말하고, 불교는 ‘그것을 바로 보라'고 수행으로 말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우주의 이치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과 공(空)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여(如如)라는 말을 좋아한다. 여여(如如)는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늘 한결같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같을 여(如)' 자를 겹쳐 쓴 말로, 진리의 본래 모습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여의 핵심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이나 현상을 내 주관이나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상태(여실지견)를 뜻한다.
- 한결같은 마음: 외부의 자극이나 상황 변화에 마음이 휩쓸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늘 여여하게 살고 싶다. 그 길은 한 번에 하루씩 사는 다.
양자역학에도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있다. ‘양자 중첩’과 ‘양자 얽힘’이다. 거친 비유로 말하자면 탁자 위에서 동전이 돌아갈 때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양자 중첩’이다. 또 우주의 양 끝에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있는데, 한쪽 입자의 뺨을 때릴 때 다른 쪽 입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가는 게 ‘양자 얽힘’이다. 물질일 때는 둘로 보이지만, 공(空)일 때는 하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우 스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양자 중첩은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는 인식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깊이 맞닿아 있다”며 “고통의 본질은 색(色)만 보고 공(空)을 못 보는 것이고, 깨달음은 색과 공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깨달으신 이치를 현대 물리학은 이제 조금 알아채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중알일보 백성호 종교전문 기자가 정리한 것을 갈무리했다. 최근에 하고 있는 고민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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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중첩(superposition)이라는 상태가 있다 한다. 관찰자가 측정하기 전까지 입자는 어디에나 있으며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확률적인 파동의 구름으로 존재한다는 원리이다. 양자 역학에서 하나의 입자가 여러 가지 상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현상이다. 관찰자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확정된 실체가 아닌 확률적 파동으로 존재한다. 이 물리 법칙은 우리의 일상 위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또한 그저 무수한 가능성만 흩뿌려진 희끄무레한 안개와 같을 뿐이라는 거다.
관찰자가 대상을 관찰하는 순간, 여러 확률로 중첩되어 있던 파동이 하나의 입자 상태로 결정된 현상을 "파동함수의 붕괴'라 한다. 여기서는 '현존'하는 의식이 모호한 일상을 선명한 실재로 바꾸는 '창조적 순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최근 폐친 민웅기의 글에서 한 가지 통찰을 얻었는데, 오늘 부처님 오신날에 어울리는 거다. 그에 의하면, 깨어 있는 자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는 '비어 있음' 속에서 영롱한 의식, 영적인 상태에서 새로운 유(有)를 창조하며, 그 창조물에 매이지 않고 다시 비움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이라는 거다. "공(空)-허(虛)-무(無)-통(通)-영(靈)-유(有)". 이 다섯 단계의 여정은 선형적인 계단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역동적인 춤이라는 거다. 비우고 소통하고 깨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세상을 빚어낼 수 있다는 거다. 이것을 폐친 민웅기는 "궁극의 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자연의 모습이라고 본다.
자연의 것들처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딛고 선 그 자리에서 비어 있음을 긍정하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다. 민웅기 폐친은 "그것이 바로 지성적 실존이 도달해야 할 최후의 경계가 아닐까"하며, 이건 영(영)이 지금 이 세계를 빚어내게 하라고 했다. 카톨릭에서는 그 영을 '성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사 중에, 우리 성당은 "오서서 성령"이라고 외치고 시작한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유)는 자신의 내면이 투사된 결과이다. 내가 주의(attention), 관심을 보인 거다. 그러니 물리적 현실을 바꾸려 애쓰기 보다, 그 현실을 빚어내는 자신의 의식 상태(영)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수행(praxis)이다.
그 수행의 5단계를 정리해 본다.
(1) 공(空)의 단계
우리는 대부분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분투한다. 지식을 쌓고, 인맥을 넓히고, 소유물을 늘리는 '채움'의 행위만이 사람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고 있다. 나도 깨어 있지 않으면 늘 그 채움에 목 말라 한다. "공즉허(空則虛)의 철학을 잘 모르고, 어렴풋이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공즉허"는 철저한 비움("空")이 선행되어야만("則"), 비로소 무언가 쓰일 수 있는 실질적인 여백("虛")이 확보된다는 우주적 질서라는 거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이란 말은 모든 현상이 상호 의존적이기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통찰이다. 이를 통해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즉(則)"은 '곧 ~이다' 라는 단정적 연결과 달리,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뒤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논리적 인과를 강조한다. 비움이라는 실천적 원인이 있어야만 여백(허)이라는 가치적 결과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장자>>를 읽으면서 사유 했던 적이 있다. 내가 늘 지침으로 가지고 있는 문장이다. "빈방에 빛이 들면(虛室生白, 허실생백), 좋은 징조가 깃든다(吉祥止止, 길상지지), 마음이 그칠 곳에 그치지 못하면(不止, 부지) 앉아서 달리는(坐馳, 좌치) 꼴이 된다."(<<장자>>, <인간세>) 빈 방에 빛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멈춤도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 앉아서 달리는 꼴이 된다. 앉아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만 바쁘지 백 날 가도 제자리이다.
공(空)의 이 단계 은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의 시작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낡은 고집 그리고 '나'라는 견고한 자아의 상(상)이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님을 직시하는 단계이다. 시작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물질과 공(空)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2) 허(虛)의 단계
세상이 공이라는 뼈아픈 자기 부정과 내려놓음의 과정을 통과하면("則"), 우리 의식에는 비로소 신비로운 "허(虛)"의 상태가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허"는 단순히 텅 빈 진공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무한한 수용성"이고, "생명력 있는 공간"이다. "허"는 노자가 강조한 "무용지물(무용지물)"의 핵심이기도 하다. 쓰임새가 있는 빈 공간을 의미하며, 현대 심리학의 '심리적 유연성' 이나, "수용적 자아'와 맥을 같이 한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그릇의 본질이 진흙의 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비어 있음에 있다고 말했다. 제11장을 한 편의 시처럼 번역한 오강남 버전과 원문을 공유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 것도 없음(무)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 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 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三十輻共一轂(삼십폭공일곡) 當其無(당기무) 有車之用(유거지용)
埏埴以爲器(연식이위기) 當其無(당기무) 有器之用(유기지용)
鑿戶牖以爲室(착호유이위실)當其無(당기무) 有室之用(유실지용)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비움의 미학이다. 비움이 도의 속성에서 가장 큰 것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나온다. 앞에서는 계곡, 자궁, 대장간의 풀무 등에 빗대서 도를 설명한 바 있는 데 11장에서는 가운데가 비어 있는 수레 바퀴 통과 빈 그릇, 빈 방의 비유를 들어 도의 형상을 설명하고 있다. 바퀴 통이 꽉 차 있으면 바퀴 살이 한 곳으로 모일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수레를 움직일 수 없다. 수레가 굴러가는 것은 바퀴 통이 무(無)의 상태로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릇과 방도 마찬가지이다. 그릇이 차 있으면 물이나 밥을 담을 수 없고, 방이 차 있으면 사람이나 물건을 들여놓을 수 없다. 사물의 쓰임새는 무에서 출발한다. 이 장에 나오는 모든 "무"는 "허"로 이해하면 된다. '허'의 가능성을 보는 거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꽉 찬 마음에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도, 타인의 진심 어린 고백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스스로를 비워낸("空") 사람만이 그 자리에 "창조적 여백("虛")를 소유하는 법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공즉허"의 논리는 우리에게 '전략적 비움"을 요청한다.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비로소 현대인 겪는 대다수의 심리적 정체와 갈등은 능력의 부족에 있지 않고 마음의 공간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니 꽉 짜인 스케줄과 과잉 된 정보의 홍수 속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정신의 여유(여유)를 가져야 한다. 여유와 여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보 과잉의 시대에 의식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법은 비움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생기는 "허"는 창조적 영감이 태동하는 양자적 가능성의 장(field)이 된다.
스포츠에서는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게임을 하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 있는 집중'이다. 이 말은 너무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냥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말이다. 목표를 보지 말고, 눈 앞에 해야 할 일만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런 거대 담론보다 눈 앞의 일에 우선 집중한다. 팀 페리스는 말한다. "탁월함은 앞으로의 5분이다. 혁신이나 개선도 앞으로의 5분이며, 행복도 앞으로의 5분 안에 존재한다." 이 말은 계획을 싹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빅 픽처의 그림이나 담대한 계획을 세우되, 그 커다란 목표를 가능한 한 작은 조각으로 해체해 한 번에 하나씩 '충격의 순간(point of impact-테니스에서 공이 라켓과 접촉하는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 눈 앞의 일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실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곧장 새로운 인생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용기가 생겨난다. 실수한 날이 지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세상이 끝났다고 해도, 다른 길을 가면 된다. 신은 앞 문이 닫히면, 뒷문을 열어 놓는다. 살아 보니 그렇다.
다시 "공즉허" 이야기로 다시 돌아 온다. 공즉허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비워 여유 있는 마음과 여백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 비어 있는 공간("虛")야말로 우리가 가장 창의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는 영토가 될 것이다. 비움은 상실이나 후퇴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 용량을 우주만큼 확장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준비 동작일 뿐이다.
(3) 무(無)의 단계
"공즉허"에서, 모든 현상의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 본질이 텅 비어 있음("虛")를 보았다. 이제 그 비어 있음이 단순한 빈 상태를 넘어 실존의 역동적인 힘으로 전환되는 단계이다. 이를 폐친 민웅기는 "허즉무(虛則無)"라 했다. 비움은 '없음'이라는 권능으로 이어진다. '나는 없다(I'm nothing)'고 생각할 때 거기서 큰 힘이 나온다.
앞에서 말했지만, "則"은 자연스러운 이행이자 엄정한 법칙이다. 내면이 완전히 비워지면("虛"), 법칙에 따라, 존재는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 도달한다. 여기서 '무'는 허무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진공(vacuum)' 이다. 입자가 존재하지 않지만, 무한한 에너지가 요동치는 장(field)처럼, 비어 있는 마음은 그렇게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무엇으로 든 바뀔 수 있는 순수한 잠재태가 된다. "허즉무"는 비움이 밀어 올린 절대적 잠재성이다.
우리는 '나'라는 경고한 상(상)을 세워 세상을 관찰하고 입자로 고정하려 한다. 하지만 이 때 "허즉무"의 법칙은 '관찰자의 개입을 멈추라'는 거다. 내가 쌓아 올린 지식, 경험, 가치관을 비워낼 때('虛'), 비로소 나를 구속하던 형상들이 소거('무') 된다. 그러니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확장이다. 규정된 '나'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우주의 무한한 정보와 파동이 간섭 없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허즉무"는 고정된 시선을 거두는 존재론적 결단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우리에게 "무(無)"는 공포가 아닌 자유여야 한다. 논리와 인과로 꽉 짜인 일상에 의도적인 빈 틈을 내는 것이 수행이다. "허즉무"는 사유의 수행에서 나온다. 그것은 여백을 환대하는 것이기도 한다. 페친 민웅기는 수행의 방법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멈추고, 그 질문 뒤에 남는 막막한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보라고 한다. 고요함 속에서 있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채우려는 욕망이 멈추고, 비어 있음이 극에 달할 때, 존재는 비로소 법칙에 따라 '무'의 장에 접속 된다. 그러니까 그 곳은 "모든 창조적 영감이 발원하는 태초의 자궁과 같다"(민웅기)는 거다.
(4) 통(通)의 단계
우리는 "허즉무"를 통해 나를 규정하던 모든 상(상)을 비워내고, 아무 것도 고착되지 않은 절대 잠재태인 '무(無)'의 상태에 도달했다. 이제 그 형체 없는 "무'는 세상만사와 막힘 없이 관계 맺고 흐른다. 여기서 세 번째 법칙인 "무즉통(無則通)"이 나온다.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시작되는 일체성, 즉 하나가 되는 일이다.
'무(無)'는 벽이 없는 상태와 같다. '나'라는 경고한 입자적 자아가 사라지면("無"), 법칙에 따라("則")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고 우주적 흐름과 하나로 연결("通") 된다. 양자역학의 "비국소성(non-locality, 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멀리 떨어진 대상이 서로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 성질)이 말하듯, 근원적 차원에서 모든 존재는 분리된 섬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장(field)으로 얽혀 있다. 내가 '나'라는 개별성으로 고집하지 않을 때, 비로소 전체와 소통되는 우주적 신경 망이 회복되는 것이다.
소통은 관찰자가 사라질 때 일어나는 동조(entertainment) 이다. 우리가 타인이나 세계와 불통 하는 이유는 자신의 관념으로 상대를 규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의 상(相)이 소거 된 '무'의 상태에서는 관찰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다. 이것은 고도의 지적 공명이며 실존적 동조이다. 자신이 무(無)가 될 때, 비로소 상대의 본질이 내 안으로 가감 없이 흘러 들어오며 만물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소통’의 뜻 자체가 ‘흐름’이다. '소(疏)'는 疋(짝 필, 발 소)에서 뜻 이자, 음인 소를 빌리고 㐬에서 물이 흐른다는 뜻을 빌렸다. '통(通)'은 나아간다는 뜻의 辶(책받침)과 甬(용 또는 동)의 발음이 합쳐졌다. '소통'의 뜻은 이렇게 ‘막힘 없이 서로 통하고 나아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통'은 '소'를 극복(通)하는 것이다. 소통이란 말은 소외의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다. 소통이나 소외의 소자는 '벌어진 틈'이라는 의미이다. '소'의 뜻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꽉 막힌 것을 벌어지게 하여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견고한 조직이나 문화를 흔들려면, 우선 틈부터 내야 한다. 인문운동가는 그런 틈을 벌리는 사람이다. 소통과 소외는 서로 그 반대이다. 소외는 트임을 막는 것이라면, 소통은 트임이 뚫리는 것을 말한다.
폐친 민웅기의 표현에 따르면, 소통이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자아를 비워냈느냐는 '무'의 깊이에 달려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비우고 틈을 벌려야 흐름이 시작되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건 사유의 수행(praxis, 실천)이다. 여기서 수행이란 어떤 이론이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행하여 세상을 변회시키는 행위로 영어로는 action 또는practice 라고 한다. 관계 속에서 갈등이 생길 때, 상대의 논리를 반박하기 전에 내 안의 '판단하는 나'를 먼저 무(無)로 돌리는 거다. 나는 이를 '판단 중지'라고 하며 일상에서 실천하려고 애쓴다.
그 빈 공간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이해의 통로가 열린다. 막히면 비우고, 비우면 통한다는 거다. 혹시 자신의 삶이 꽉 막힌 벽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니까 '무'는 존재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이다. 나를 지울 때, 법칙('칙')은 나를 만물과 연결하며 비로소 우리는 고립된 존재에서 우주의 일원으로 학장 된다. 우주와 하나가 되어 일치하는 거다. 다른 이와의 소통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소통이 잘 된다면 여러 측면에서 그와 하나가 되어 일치한다는 거다.
이 거침 없은 소통('通')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오가는 차원을 넘어, 생명의 본질적 에너지가 온전하게 발현되는 지점이다. 영적인 교류로 넘어간다. 그래 다음 단계가 "통즉영(通則靈)"이다.
(5) 영(靈)의 단계: 소통에서 신성한 생명력으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나'라는 경계를 허물고 만물과 하나로 흐르는 우주적 연결 망을 회복했다. 이제 그 막힘 없는 흐름('통')이 지속될 때, 존재가 도달하게 되는 경이로운 상태인 네 번째 법칙이 "통즉영(通則靈)" 이다. 흐름이 지극하면 "영(靈)"이 깃든다. 여기서 "영(靈)'은 종교적 신비주의나 초자연적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정수, 즉 가장 영롱하고 신령 하게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氣)가 막힘 없이 흐르면 혈색이 돌듯, 우주의 파동과 의식이 온전히 소통("通")하면 법칙에 따라('則") 존재는 신성한 생명력("靈")을 회복한다. 이는 안테나가 정확한 주파수에 맞춰졌을 때 맑은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영(靈)"은 고도의 정렬 상태(coherence, 잘 배치된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우주의 거대한 리듬과 어긋남 없이 소통할 때, 생명체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자발적 질서를 갖게 된다. 막힘이 사라진 자리에 깃드는 이 신령한 질서를 우리는 "영"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자신이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과 온전히 통하고 있다면 자신의 매 순간은 이미 영적인 고양 상태에 있는 것이다.
"통즉영"의 상태는 흐릿한 혼미함이 아니라, 지극히 명징한 깨어 있음이다. 그리하여 소통이 깊어질 수록 직관은 예리해지고 삶의 선택은 망설임이 없어진다. "영'은 따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통(通)"함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걷어낼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막힘 없이 통하는 자는 매 순간 신비롭고 발걸음마다 생기가 넘친다. 그것은 특별한 능력을 얻어서 가 아니라, 우주의 거대한 생명 에너지와 한 호흡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신령한 생명력("영')은 다시 만물을 살리고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으로 회귀한다. 이렇게 해서, 이 모든 과정의 완결이지 다시 시작점이 되는 "영즉유(靈則有)"의 거대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영즉유(靈則有)"는 깨어난 생명이 빚어내는 새로운 현실이다. 신령한 의식이 새로운 '있음'을 창조한다. "영(靈)"이 지극해지면 법칙에 따라("則") 구체적인 현상과 현실인 '유(有)"가 드러난다. 이는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관찰자의 의식이 확률적 파동을 하나의 입자로 결정 짓는 '붕괴'의 과정과 닮아 있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의식("영")이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특정한 현실을 선택하여 물질화("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의식으로 깨어 있느냐에 따라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의 상(相)이 결정된다.
지금까지 살펴 본 순환 법칙에 따르면, "유(有)"는 다시 "공(空)"으로 이어진다. "영즉유"는 이 여정의 끝이 아니다. 여기서 드러난 '유(有)"는 다시 '공(空)'으로 연결된다. 신령한 의식에 의해 창조된 현실 또한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흩어지는 비어 있는 '공(空)'임을 깨닫는 순간, 거대한 '도'의 수레바퀴는 완벽한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있음이 비어 있음을 알고, 비어 있기에 다시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다는 이 역설적인 순환이야 말로 바로 우주의 근본 원리이다.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실천적 결단을 하여야 한다. 세상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나의 '영(靈)'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有')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거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이 투사된 결과이다. 현실을 바꾸려 애쓰기 보다, 그 현실을 빚어내는 자신의 의식 상태('靈')를 먼저 점검하는 거다. 깨어 있는 자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깨어 있는 자는 비어 있음 속에서 영적 의식으로 새로운 '유(有)'를 창조하며, 그 창조물에 매이지 않고 다시 비움으로 돌아간다.
공(空)-허(虛)-무(無)-통(通)-영(靈)-유(有), 이 여정은 계단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역동적인 춤이어야 한다. 비우고 소통하며 깨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세상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도(우주의 원칙)'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딛고 선 그 자리에서 비어 있음을 긍정하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성적 실존이 도달해야 할 최후의 경계이다.
글을 그냥 읽었을 때는 알듯 모를 듯 했는데, 나름대로 갈무리 하며 글로 써보았더니 잘 이해가 된다. 지성의 사람이란 이 순환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거다.
3
요즈음 나의 화두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충분한 삶'이 아닐까? 충분한 삶은 개인의 물질적 안온함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말하는 소속감, 즉 "지속적이고 긍정적이며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보편적 욕구"의 충족도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과 넉넉히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삶은 충분해진다.
나아가 '충분한 삶'은 좋은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불공정과 부정의로 뒤틀린 사회, 불평등을 양산하는 승자 독식 경제, 환경 파괴로 팬데믹과 기후 재앙이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에선 누구도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이룰 때 삶은 충분할 수 있다. 무한 풍요가 아니라 적절함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이 '충분한 삶'에 대한 아이디어는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의 글에서 얻은 것이다.
충분한 삶에 대한 나의 원칙은 '얻고자 한다면 먼저 버려라'이다. 수많은 결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철수하는 결단이다. 버리면 정말로 필요한 것에만 집중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라고 말하려면, 자신감과 비전 그리고 집념이 필요하다.
4
성령 강림 대축일로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이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양심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는
먼지 같은 삶에 새 생명 불어넣는
거센 바람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사그라지는 검은 재 가득한
어둠 같은 삶을 환히 밝히는
찬란한 불꽃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벗들의 심장을 겨눈 비수 같은
독을 머금은 말들을 흩어버리는
생명의 말씀 품은 혀들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과 갈림 없이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온 누리에 드러내는
슬기(지혜)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발 딛고 선 지금여기 깊이 스며든
시공을 초월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아
‘이미’와 ‘아직’ 사이의 하느님 나라를 사는
깨달음(통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교묘히 본색을 숨긴 악의 민낯을 밝혀내고
악에 짓눌린 가녀린 선을 들어 높이는
일깨움(식견)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불의에 무릎 꿇어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사랑과 정의의 제단에 기꺼이 몸 바치는
굳셈(용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순간의 달콤함으로 유혹하는 헛된 거짓 물리쳐
이제로부터 영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보듬는
앎(지식)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받듦(공경)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의 자녀요 벗으로서
하느님과의 단절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헌신케 하는
두려워함(경외)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이 땅의 모든 이를 당신으로 채우시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열매를
암울한 세상을 이기는 희망 가득한
기쁨의 열매를
하느님과 모든 벗들이 하나 되는
평화의 열매를
자유와 해방의 발걸음 이끄는
인내의 열매를
주님의 가장 작은이들을 품에 안는
호의의 열매를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일구는
선행의 열매를
뭇시선 의식하지 않고 제 소명에 충실한
성실의 열매를
약한 자에 약하고 강한 자에게 강한
온유의 열매를
감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하는
절제의 열매를
지금까지처럼 이제와 영원히
저희 안에서 저희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맺어주소서. 아멘.
5
용서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하지 못할 만큼 상처 입은 저를 모두 아시는 주님, 당신께 더욱 깊이 의탁하게 하소서.
2026/5/24/성령 강림 대축일/부처님 오신 날
요한 복음 20장 19-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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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용서를 맡겨 드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신 후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다’의 반대 의미로 쓰인 ‘그대로 두다’라는 말은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용서하다’의 반대말(용서하지 않다, 되갚아 주다, 복수하다 등)을 굳이 사용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어쩌면 예수님 보시기에, ‘용서하다’의 반대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에 ‘용서하다’는 말은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기를 바라시기에 발음조차 하지 않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로 두다’라는 말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싶을 만큼 아픈 배신도 있고, 되돌려주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처도 있다는 걸 아시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되갚아 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 남기는 상처 역시 크고 깊다는 것도 아시기에 ‘그대로 두다’라고 표현하신 게 아닐까요? 그대로 두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께 미뤄보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마침표를 찍지 말고, 당장은 어려운 용서를 미루라고 하시는 말씀 말이지요. 이렇듯 우리가 용서를 예수님께 맡겨 드리면, 당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람들과 수난의 순간에 돌아서 버렸던 제자들마저도 용서하셨던 예수님께서 그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김희경 성심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생활성서 2026년 5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성령강림대축일은 성령의 은혜로 교회가 새롭게 태어난 날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 이 말은 삶의 무거운 짐과 마음의 상처, 예기치 못한 시련으로 지쳐 있는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주님의 위로이며 생명의 숨결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성령은 그런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때 나타난다.
- 슬플 때는 위로가 된다. 왜? 영원히 슬플 수 없다. 다 지난간다.
- 지쳐 쓰러질 때에는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쓰러져야 일어나는 것은 우주의 원리이다.
- 진리의 길로 이끌어 준다. 성령을 믿어라.
성령을 믿으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성령을 받아들이면, 그 거룩한 불꽃은 차가운 미움과 원망을 녹이고, 그 자리에 기쁨과 평화, 자비와 사랑을 피어나게 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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