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9일)
1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자기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타인에 대한 평가와 험담으로 대화를 채우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자신의 경험과 성취를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수다가 아닐 수 있다. 그 안에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험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를 낮추는 말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탱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보호하려는 방어 방식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관계 자체가 소진의 원천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특히 쉽게 피할 수 없는 가까운 관계라면 부담은 더욱 깊어진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내려놓는 일이다. 대신, 그 '행동의 이면'을 이해하고 나의 반응을 스스로 조율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보길 권한다. 예컨대, 상대가 자기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때, ‘이 사람은 지금 스스로를 확인 받고 싶은 상태구나' 하고 바라볼 수 있다. 험담이 시작될 때는 ‘비교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중이겠지' 라고 한 발짝 물러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감정 소모를 상당 부분 줄여준다.
윤희경 용인정신병원 <스마트낮병원> 센터장의 다음과 같은 조언들이 도움이 될 것 같다.
▪ 모든 말에 반응할 의무도 없다. 오히려 과도한 호응은 그 대화를 더 길어지게 하고 결국 더 깊은 피로로 돌아온다. 반응을 줄이거나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것은 상대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서적 경계를 지키는 건강한 방식이다.
▪ 지나치게 소진되는 모임이라면 때로는 과감히 거리를 두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물음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어야 한다. 이 질문들과 천천히 마주하다 보면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겨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이해가 깊어질수록 타인과의 관계는 한결 가볍고 편안해 진다.
▪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예민하거나 사교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더 진실한 연결을 원하는 마음의 신호일 수 있다.
2
삶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무너진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건 하나가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송두리째 흔들 때, 우리는 거대한 상실의 늪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유한한 인간은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겪을 수 있다. 문제는 희생자 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희생자 의식은 고통을 박제하고 자신과 세계를 단단히 묶어버린다. 그 자폐적 공간에서는 어떤 가능성도 자라지 못한다. 삶은 좁아지고, 결국 자신이 겪은 불행이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감옥이 된다. 그러나 고통이 우리를 완전히 규정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삶의 균열을 통해 우리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서를 엿보게 된다.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라는 선택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전환의 능력이야 말로 무너진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오늘날 전쟁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드론이 하늘을 가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튼 하나로 생사가 결정된다. 하이테크 시대의 전쟁은 비인간적일 만큼 효율적이다. 세계는 점점 더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우리는 그 불안을 일상처럼 견디며 산다.
시인 정현종의 시구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시인은 미사일과 전폭기가 나는 하늘에 두루미와 기러기, 도요새를 날려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폭력적인 현실에 적응한 사람들은 시인의 이런 상상을 어처구니없다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시적 상상력마저 사라진다면, 우리는 폭력의 무게에 짓눌려 더 깊은 우울 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도 전환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발현된다. 나무를 심는 사람, 씨를 뿌리는 사람, 고통 받는 이들 곁에 조용히 머무는 사람, 그리고 타인의 슬픔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들. 이들은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 못할지 언정,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무언가를 바꾸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꾸는 일, 상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존엄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다. 세상 도처에 우리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절망을 딛고 일어나 더 나은 세계를 향해 함께 걷자고 손을 내민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의 글을 갈무리 한 것이다.
요격시/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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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
3
이세돌은 ‘알파고 대국 10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생각’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알파고와의 대결 이전 AI는 기술 발전에 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며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거다. 이제는 바둑도 AI로 공부하는 시대가 됐다. 바둑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이제는 AI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그는 AI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성과 감정, 스토리와 같은 인간적인 측면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12세 때 처음 만난 중국의 구리 9단과 10번기(10번의 대국으로 승부를 겨루는 방법)를 치렀다”며 “구리 9단은 처음으로 호수로 둔 동년배인데 개인적으로 친하다. 이런 서사를 거쳐 대국이 이뤄진 것인데 AI는 이런 스토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AI가 그린 그림이나 만든 음악이 아무리 멋져도 우리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AI에는 개성, 감정, 스토리와 같은 서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바둑 뿐만 아니라 전 산업이 AI를 얼마나 활용하는지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질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그는 “AI 등장 이후 많은 사람이 일의 효율이 30~50% 향상됐다고 느끼지만, AI를 제대로 활용하는 소수는 300~500%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며 “AI 시대의 가장 무서운 점이 격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굉장히 빠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각 분야의 톱클래스가 아닌 일반인에게 미칠 영향이 클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각 분야의 톱클래스는 계속해 대우받을 것”이라면 서도 “문제는 중간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다. AI는 규칙이 명확하고 한정적인 상황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AI를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이세돌은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한다”며 2017년 알파고 마스터의 대국을 언급했다. 그는 “바둑을 배우면 초반에 3선 자리에는 수를 두지 말라고 배운다. 프로가 돼서도 어려서 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 수를 두지 못한다”며 “그러나 알파고 마스터는 거리낌 없이 그 수를 뒀다. AI는 고정관념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런 수를 둘 수 있었다. AI와 협업해야 하는 이유도 고정관념 탈피 때문”이라고 말했다.
"얕고 넓은 지식"을 통해 AI를 활용하는 방법도 익혀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그는 “얕고 넓은 지식의 재평가가 필요하다. 그동안 어설프게 안다는 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한 분야만 파고들면 AI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한정돼 버린다”고 했다. 그는 “전문 지식을 가지지 않더라도 넓게 많이 아는 사람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스스로 사고를 정리하는 복기(復棋)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 교수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정리되지 않은 지식은 오히려 혼란만 키운다”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이 정보를 정리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4
어떤 위로도 닿지 않을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남긴 편지를 나는 읽는다. 세상에는 말로 위로 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설명되지 않고, 누군가의 다정한 말조차 가슴에 닿지 않는 상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떤 고통은 쉽게 달래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무게를 정확히 알아볼 때에 야 비로소 마음 한 켠이 움직인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친구 부부가 어린 아들을 잃었을 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값싼 위로나 꾸며낸 희망이 없다. 대신 상실의 깊이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남겨진 이들을 향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이 편지를 두고 헤밍웨이의 소설 전체보다 더 위대한 문장이라고 말한다. 상실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라와 제럴드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해도 도저히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들도 알 것입니다. 어제 나는 편지를 쓰려 했지만, 쓰지 못했습니다. 바오스에게는 그렇게 나쁜 일 만은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시간을 누렸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단지 지금 먼저 했을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먼저 끝마친 것입니다. 그가 너무 어린 나이에 죽어야 했다는 것에 대하여는, 그가 참으로 좋은 시간을 누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시간을 천 번 더 산다 해도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배우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의 상실이라 기보다 당신들의 상실입니다. 그러니 두 분이 용감해질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용감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두 분을 생각하며 아픕니다. 하지만 냉정하고 또 진실하게 생각해보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젊어서 죽는 사람, 그리고 당신들처럼 자녀들에게 더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만들어 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큰 승리를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패배 속의 죽음을 향해 갑니다. 몸은 쇠하고, 우리가 알던 세상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 우리가 맞아야 할 같은 죽음입니다. 반면 그는 자기 세계가 온전히 남아 있는 채, 우연한 사고로 그 모든 일을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 본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비록 떠나갔다 해도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사랑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함께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만든, 아직은 좋은 배를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배가 결코 항구에 닿지 못하리라 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좋은 날씨도 있을 것이고 나쁜 날씨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끝내 육지에 닿지 못하리라 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배를 잘 돌보아야 하고 서로에게 더욱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이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운입니다.
5
부활 제3주일로, 말씀은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이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0-31)
십자가의 길을
떠나시기 바로 앞선 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처럼 되어 나누어지라고
오늘만이 아니라
당신을 길이 기억하며
늘 그렇게 나누어지라고
십자가의 길을
그분 홀로 걸어가시던 날
그분의 살과 피를
기꺼이 먹고 마셨던
벗들은 그분을 버리고 떠났지
참담한 마음이야
없을 수 있을까마는
그저 제 살 길 찾아서
그분을 집어삼킨
패배와 두려움 가득한
그곳에 그분 홀로 남겨두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를 완성하신 다음 날
그분께서는
제 살 길 찾던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다시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살아난 당신을 알아보라고
그리하여
살기 위해 떠나는
패배의 길에서 발길을 돌리라고
십자가와 그 너머 부활이
아픈 만큼 찬란히 이어지는 나날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고 나누시지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신
그분을 사랑하는 벗들은
그분처럼 기꺼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지지
십자가 너머 부활하는 믿음으로
어둠을 사르는 빛나는 희망으로
벗을 살리려 죽어가는 사랑으로
6
부활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관점을 변화시켜 줍니다.
2026/4/19/부활 제3주일/4·19 혁명 기념일
루카 복음 24장 13-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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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으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에게 예루살렘은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곳, 모든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곳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하지요. 우리는 보통 기대가 무너질 때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성당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고, 하느님을 떠나지요.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없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기다린다면 지금 이 순간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빵을 떼어 주시는 단순한 식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제자들은 다시 마음이 뜨거워져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이제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더 이상 절망의 장소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길은 우리 인생길과 비슷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빵을 통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니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과 성체성사로, 엠마오로 향하는 절망의 길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희망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 나는 남은 내 삶을 유쾌함과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 여정의 끝에서 죽는 거다.
▪ 자유 그리고 도전 속에서 사는 거다. 경험만이 독창적인 감각을 키워낸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자유와 실험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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