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18일)
1
우리는 흔히 '연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초록'이라고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연두'는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연두는 완두 콩의 완두를 생각하고, 그 완두에서 초록을 생각한다. 초록은 풀의 푸른색을 직접적으로 연상하지만, 완두의 초록이 하나의 필터를 더 가진다. 초록이라고 해서 단 하나의 초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초록이 있다. 노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고, 파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초록은 적색이나 주황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연두의 초록은 어떤 색에 가까울까?
연두의 저녁/박완호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요즈음 거리를 나가면, 초록 물, 신록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 더 정확히는 연두와 초록이 햇살과 노닐며, 상큼한 바람이 사이사이 입맞춤을 하고, 바람 길 따라 달콤한 향기를 발산한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거리의 나무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채워지며, 수채화가 유화가 될 것이다. 숲의 아래 쪽은 진녹색, 중간은 초록, 위 쪽은 아직 연두로 짙고 얕은 '녹색의 향연'은 좀 더 계속될 것이다. 봄이 꼭대기를 쫓아가며 농담(濃淡, 진함과 묽음)의 붓질을 해댈 것이다. 드문드문 섞인 솔숲이 암록(暗綠, 어두운 초록색)일만큼 신록이 눈부실 것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색이 변화하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
"군자삼변(君子三變)"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수양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모두가 되고 싶어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엄숙함, 따뜻함 그리고 논리력을 모두 갖춘 사람을 '삼변(三變)'이라고 했다. 그런 세 가지 다른 변화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군자'라 한다 했다.
▪ 일변(一變)은 멀리서 바라보면 의젓하고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망지엄연(望之儼然)’이라 표현한다. ‘멀리서 바라보면(望), 엄숙함(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의젓하기는 하지만 가까이 하기엔 다소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 이변(二變)은 엄숙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 대화해 보면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것을 '즉지야온(卽地也溫)'이라 한다. '멀리서 보면 엄숙한 사람인데 가까이 다가서서(卽) 보면 따뜻함(溫)이 느껴지는 사람의 모습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겉은 엄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 삼변(三變)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정확한 논리가 서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청기언야려(聽其言也厲)'. 그 사람이 하는 말(其言)을 들어 보면(聽) 논리적인 모습(厲)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자는 비록 달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외면의 엄숙함과 내면의 따뜻함에 논리적인 언행까지 더해져, 멀리서 보면 의젓한 모습,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행을 하는 군자, 최상의 사람, 선비, 보살인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품격이다.
3
오늘도 이정민(데비 리)이라는 분의 책, <<인생의 폭풍 속에서 춤을>>을 계속 읽고 공유한다, "인생이란 폭우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비가 와도 그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세네카(Sénéque)의 유명한 이 말처럼, 나 만의 춤을 추려면,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일상의 꾸려가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성찰한다.
지난 4월 15일에 이어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나 답게 살려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다. '위대한 삶'이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려고 남들과 발버둥 치는 삶을 말하고, '충분한 삶'이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적당한 여유와 윤택에 만족하는 삶이 아닐까? 위대함을 바라고 완벽함을 좇기보다 적절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비로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래서 나의 만트라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이게 '충분한 삶'이라 보기 때문이다. '충분한 삶'은 개인의 물질적 안온함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가 말하는 소속감, 즉 "지속적이고 긍정적이며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보편적 욕구"의 충족도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과 넉넉히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삶은 충분해진다. 나아가 '충분한 삶'은 좋은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불공정과 부정의로 뒤틀린 사회, 불평등을 양산하는 승자 독식 경제, 환경 파괴로 팬데믹과 기후 재앙이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에선 누구도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이룰 때 삶은 충분할 수 있다. 무한 풍요가 아니라 적절함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 안에 숨기고 있는 불완전한 모습이 있다. 우리는 걱정이 많고, 모자란 나 자신을 보며 한숨 쉬는 날들이 많다. 그러나 삶을 책임지려는 굳은 의지가 있을 때 주어진 신체 조건과 상관없는 초능력이 생긴다. 인생의 숙제가 커지면서 그걸 어떻게 든 해내려고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용기도, 도전 정신도 생겨난다.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재능이 없는 부분은 잘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고, 실패가 쌓이면 위축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에게 더 알맞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신호이거나 우리를 좀 더 성장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든, 고통과 슬럼프를 통과해 성취를 이루는 그 긴 고행의 시간 동안 지구력을 받쳐줄 무언가 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걸 저자는 "인생의 물살을 버틸 나만의 닻"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에 거센 물살이 들이칠 때,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중심이 필요하다. 순식간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말이다. 삶이 폭풍우 한가운데 있는 것 같고,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는 것만 같을 때도 움직이지 않을 나만의 닻을 미리 만들어 둬야 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건강한 루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에게 매년 규칙적으로 제공해주는 날들, 이를테면 명절, 크리스마스 혹은 정기적인 축제, 박람회 이런 것들도 알고 보면 우리의 생활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되돌아보게 해주는 기회이다. 매년 돌아오는 그날에 쌓는 즐거운 추억은 힘든 일이 닥칠 때도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심리적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만나는 친구들 과의 모임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좋다. 나의 경우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향친구 4명이 매월 만나 당구와 탁구 운동을 함께 한 후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그리고 매일 감사일기를 쓴다. 몸과 마음은 엮여 있으니 마음의 근력 뿐만 아니라 몸의 근력을 키우는 나의 대표적인 두 가지 일이다. 앞으로는 저자로부터 배운 루틴 중 일어나자마자 100부터 1까지 거꾸로 세는 일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러면 아침에 생기는 창의성 뇌파인 알파파가 활성화된다고 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여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파가 베타파에서 바뀌게 되니 최대한 그 전에 알파파를 활성화하는 것이 좋다는 거다.
4
항해에 있어 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목적지이다. 목적지가 없다면 굳이 뭍을 떠날 이유도 없다. 분명한 목적지를 품은 배는 거센 풍랑 속에서도 버틸 힘이 있고, 길을 잃어도 다시 나침반을 들 수 있으며, 항해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과정이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단 목적지는 반드시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저 배들이 모두 가는 곳이라고 해서 따라가다 가는, 어느 순간 그곳이 내가 바라던 항구가 아님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 나를 잘 숨쉬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목적지를 찾는 순간, 진정한 항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생각하며 내일을 맞이하는 것과 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다음 날을 맞이하는 것은 '지금'을 대하는 태도에 큰 차이를 만든다. 선명한 목적지가 있을 때는 오늘 내가 할 일이 좀 더 분명해지고, 그것에 더 큰 의미와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목적에 영감을 주는 장소를 방문하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거다. 그리고 주어진 날들이 아깝지 않게, 힘을 내서 인생을 끝까지 의미 있게 일구어 가시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다. 예를 들면, 타샤 튜터(Tasha Tudor)의 책이나 그녀에 대한 영화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내 목적지의 모습은 계속 새로운 것이 덧대어지고, 진화하지만 방향은 한곳으로 수렴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서 있을 배경보다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은 지, 자신에 대한 존재의 청사진이 매일 조금씩 더 명확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유와 성취에 집중하기 보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향점을 고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려한 성공보다 숨죽인 아픔이 더 많은 삶일지라도, 과정이 느리고 인내를 요구할지라도, 자신이 되고 싶은 '나'가 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다음 말이 인상적이다. "한 사람의 생에 가장 위대한 두 날은 태어난 날과, 왜 태어났는지를 깨닫는 날이다." 자신의 목적지 윤곽을 또렷하게 조각하는 날이 오면, 작더라도 강하고, 조용하더라도 충만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되고 싶은 '나'를 향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들의 삶은 표류가 아닌 진정한 항해가 될 것이다.
5
부활 제2주간 토요일로 말씀은 <요한 6,16-21> "물 위를 걸으시다" 이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당신이기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멈추지 않는
나를 향한
믿음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믿음
바로
당신의
믿음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믿음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바래지 않는
나를 향한
희망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희망
바로
당신의
희망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희망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마르지 않는
나를 향한
사랑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사랑
바로
당신의
사랑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6
삶이라는 배 안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있나요?
2026/4/18/부활 제2주간 토요일⠀
요한 복음 6장 16-21절: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
통제할 수 없는 삶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후 혼자 산으로 물러가시자, 제자들 역시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듯합니다. 피정이나 성사들 안에서 하느님의 깊은 은총을 체험한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이내 어둠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가족 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경제적 부담감, 건강 문제 등 삶의 파도는 우리를 매번 흔들어 놓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풍랑과 파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 채, 삶의 거친 파도를 건너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지요. 복음 속 제자들은 물결이 높게 일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매몰되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역시 힘겹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 속에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예수님께서 다가오실 겁니다. 파도를 잠재우시기보다 당신을 먼저 드러내시면서 말이지요. 제자들은 그 높은 파도 속에서도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뀌어서 그분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먼저 모실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가려던 그 목적지에 이미 도달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김상태 사도 요한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18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어제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풍요로움을 함께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제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기적의 축제 뒤에 찾아온 이 고립된 풍랑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과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부재하시는 듯한 어둠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 6,17)라고 세심하게 기록합니다. 우리 삶에도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관계의 파탄 같은 풍랑이 닥칠 때,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몰랐을지라도 예수님은 산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으며, 이미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공포를 평화로 바꾸는 주님의 현존입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여기서 "나다"는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Ego Emi)인데, 이는 구약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하실 때 쓰신 이름과 같습니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풍랑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풍랑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길이 됩니다.
셋째로, 질서와 봉사로 풍랑을 이겨내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겪은 내부적인 갈등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이 위기를 기도와 말씀이라는 본질을 지키는 한편, '봉사'(디아코니아)를 전담할 일곱 명의 봉사자를 세움으로써 해결합니다. 풍랑을 이기는 법은 개인적으로는 주님을 배에 모셔 들이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며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신비를 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21). 우리는 흔히 내 힘으로 노를 저어 목적지에 가려고 애쓰지만, 주님을 우리 삶의 배에 모시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혼자서 노를 젓느라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 여러분의 풍랑 위를 걸어오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내가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하루, 걱정의 노를 잠시 내려놓고 주님을 마음의 배에 모셔 들입시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거센 바람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발소리를 듣게 하소서. 풍랑 속에서도 당신의 목소리를 신뢰하며, 평화롭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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