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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진정한 능력이란 나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마음이다.

365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7일)

1
화순 불암사 주지이신 법인 스님 의 글을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정말 내 생각과 같다. 지금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유전자 조작이나 높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바로 ‘태양'과 같은 따뜻한 덕목에 있다.
▪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
▪ '각자도생'의 벽을 허무는 연대와 사랑
▪ 정직, 근면, 성실과 같은 삶의 기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몇 년 전에 나도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로봇 클라라가 생각난다. 이 소설은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의 시선을 통해 현대 사회가 맹신하는 ‘능력’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다. 

작품 속 아이들은 상류 계급에 진입하기 위해 지능을 유전적으로 조작하는 ‘향상(Lifted)’ 시술을 받는다. 주인공 조시는 이 위험한 선택의 대가로 언니 샐을 잃고, 자신 또한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린다. 반면 ‘향상’을 선택하지 않은 친구 릭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향상되지 않았다(Unlifted)’는 이유만으로 주류 사회 진입 장벽 앞에서 좌절한다.

심지어  주인공 조시의 어머니는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인공지능 클라라에게 조시를 학습시켜 그녀를 완전히 대체하려는 섬뜩한 계획까지 세운다. 소설이 그려내는 성공 신화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잔혹함이며, 인간을 등급 매기는 능력주의가 초래할 파국을 예고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실의 철학적 논의와 도 맞닿아 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안긴다고 경고한다. 능력주의는 엘리트 정치 집단에 진입할 수 있는 이들을 우대하고 보상한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은 승자의 성공이 자신의 노력 덕분이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을 무시하며 ‘나는 해냈지만 너는 못했으니, 너는 능력이 부족하고 경제에 기여하는 가치도 더 적을 거야’라고 말하도록 부추긴다. 능력주의의 위험성은 승자들에게 일종의 오만함과 교만을 갖도록 하고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데 있다. 또 고학력 엘리트들이 소외된 이들에게 자신들을 얕잡아보거나 자신들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한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가 일종의 폭정으로 변질한다는 의미다.

2
김누리 교수 또한 한국의 경쟁 교육을 “야만”이라 비판하며, 교육이 자아실현이 아닌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생존 기술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우리 교육은 '능력 우선주의'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했다. 이를 '존엄주의(dignocracy)'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월성 교육에서 존엄성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독일처럼 경쟁 교육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한다.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쟁 없는 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사상가의 지적처럼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인간을 끝없는 비교와 소외 속에 가둔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유전자 기술의 발전은 소설 속 ‘향상’을 현실로 끌어오며, 인종적·생물학적 계급화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능력은 무엇인가. 소설 속 클라라는 오직 헌신과 믿음으로 ‘태양’의 자비를 구하며 조시를 살리고자 한다. 인간을 구하는 힘은 유전자 조작이나 높은 시험 점수가 아니라, 바로 ‘태양’과 같은 따뜻한 덕목에 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 각자도생의 벽을 허무는 연대와 사랑, 그리고 정직, 근면, 성실과 같은 삶의 기본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유교의 핵심인 맹자의 사단(四端)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초경쟁 사회가 인간성을 잠식하는 오늘날, 사단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인간성을 지키는 실질적 역량으로 재 해석되어야 한다.
▪ 측은지심(惻隱之心)은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공감 능력이다. 성적과 자산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실패를 ‘노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공감의 결핍, 곧 정서적 무능을 보여준다. 진정한 공감은 타인의 아픔에 주파수를 맞추는 데서 시작된다.
▪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거부하는 마음이다. 이는 내가 누리는 혜택이 타인의 기회를 침해한 결과는 아닌지 성찰 하는 데서 시작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능력은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기준이다.
▪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경쟁의 첨예함을 흡수하는 완충의 덕목이다. 무한 경쟁 속에서 양보는 패배로 간주되지만, 모두가 앞서려 할수록 사회적 갈등의 해결 비용은 커진다. 사양지심은 나만 ‘향상’되어 살아남겠다는 독점적 욕망을 내려놓고,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며 자리를 나누는 ‘사회적 여유’를 뜻한다. 공존의 능력이야말로 극단적 갈등을 치유하는 핵심이다.
▪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윤리적 판단력이다. 효율과 성과가 절대 기준이 된 시대일수록, 기술적 합리성보다 도덕적 정당성을 먼저 묻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인간에게는 지능을 넘어서는 ‘이해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논리적 계산이 아니라 타인의 삶과 고통을 통찰하는 힘이다. 결국 진정한 능력이란 나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마음이다. 태양이 만물을 고르게 비추듯,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회복해 서로의 태양이 되는 연대가 이 어지러운 시대에 가장 절실하다.

3
곡산이라는 분에게서 배웠다. 나에게 페이스북은 학교이다. 거기서 여러 가지 통찰을 얻는 경우가 많다. 거기서 "음수사원(飮水思源) 굴정지인(掘井之人)" 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그 갈증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라 했다. 이는 즉 오늘의 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 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은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을 줄여서 말한 것으로,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온 곳)을 생각하고, 즉 그 우물을 판 사람(그 뜻)을 생각하며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많은 것들에 감사하고 그것들이 있게 한 근본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도 읽는다.

바보라는 뜻의 영어 단어 ‘idiot’은 ‘혼자 사는 사람(idios)’이라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다른 사람은 그 못에 모자를 건다’는 속담이 있다. 몰랐던 거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도움을 받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말이 “Thank you”이고, 그 다음이“I’m sorry”, 그리고“Excuse me”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하면, '음수사원(飮水思源)'은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근본(根本)을 잊지 않는다'는 말인데, 물을 마실 때에는 그 근원을 생각하고,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타 동물과 비교가 되는 것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키워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오늘날 내 위치가 어떻게 확립된 것인 지를 거슬러가다 보면, 나 자신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바람직한 것인 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가정으로 치면 내 부모 내 혈통을 알아야 하고, 조상의 위대함을 스스로 깨달어야 한다.
 
'불망조덕(不忘祖德)'이란 말도 알게 되었다. '조상의 고마운 은덕을 잊지 말고 '숭조상문(崇祖尙門)'의 정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라 했다. 여기서 '숭조상문'이란 조상을 숭배하고 선령을 위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내 나라 내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근현대사를 꿰뚫어 내 나라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지를 알아야 내 나라에 대한 당당한 긍지와 의지가 불타는 것이다. 바로 올바른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심청전>>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행이 무엇인 가를 배웠고, <<춘향전>>에서 권력을 남용하면 반드시 응징이 따른다는 것도 배웠다. 또 <<콩쥐팥쥐전>>에서 어느 한쪽만 비호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무수히 배웠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비례물시(非禮勿視)하며 비례물청(非禮勿聽)하며 비례물언(非禮勿言)하며 비례물동(非禮勿動)이니라 했다. 이는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 것이라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고 그르다 싶으면 피하고 옳다 싶으면 행해야 한다. 옛말에 '정도정행(正道正行)'이란 말이 있다. 바른 길 바른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또 비도불행(非道不行)이라는 말도 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엽락귀근(葉落歸根)'이란 말도 있는데, 낙엽(落葉)은 썩어서 흙이 되면 자신이 태어난 뿌리로 되돌아 감을 뜻하는 말이다. 올바른 역사관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그게 아니면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지금 시대가 바로 '금수지옥(禽獸地獄)'인 것이다. '금수쥐옥'은 '금수(禽獸)'와 '아귀지옥(餓鬼地獄, 굶주림과 탐욕의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로 쓰이는 표현이다. 불교 세계관에서 살생, 탐욕, 어리석음 등 죄를 지은 영혼이 사나운 짐승들에게 쫓기거나 뜯기는 고통을 받는 곳이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덕경>> 구절은 제16장에 나온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라고 한다. 원문은 이렇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치허극 수정독 만물병작, 오이관복)” 이다.

일상이 흔들릴 때마다 이 문장을 소환한다. '비움을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돈독하게 하여 지키는 일상을 꾸리라'는 말로 읽는다.  노자의 허(虛, 비움)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찬 '빔' 이며, 그의 "정(靜)"은 '동(動)'을 함유한 '정' 으로 읽기 때문이다. '정지정(靜祉靜)'이 아니라, '동지정(動之靜)'이라는 말이다. 노자의 정은 동의 가능태로 서의 정일 뿐이다. 정하지 않고 서는 동할 길이 없다는 거다.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처럼, '허(빔)와 만(참)', '동(움직임)과 정(고요)'과 같은 모든 개념이 상호 부정의 대자가 아니라, 서로 기다리고 서로를 긍정하는 대자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본다. 기다림, 느낌, 수용과 배제 속에서 생성은 이루어진다. 생성은 곧 창조이며 창조는 새로움의 요소이다. 그래 나는 이 문장을 '비워야 채워지고, 고요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쁜 날들이 계속되면, 이 문장을 소환하고, 비우고 고요해 지려고 한다. 이젠 문장 구조를 알겠다. '치허'를 지극하게 하고, '수정'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으로 읽는다.

이어지는 구절,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은 '만물이 연이어 생겨나지만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란 뜻이다. '만물이 더불어 함께 자라는데, 나는 돌아 감을 볼 뿐이다' 라고도 읽는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 모양 속에서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소환할 때마다 "되돌아 감"을 늘 주목한다. 도(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 력, 즉 반(反)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노자는 이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 제40장)라 한다.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아 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불안해 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4
이솝 우화에는 개구리에게 장난삼아 돌팔매질하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온다. 날아드는 돌을 피해 이리 저리로 펄쩍 뛰는 개구리들을 보며 아이들은 더없이 즐거워한다. 돌팔매질은 아이들에게는 그저 재미 삼아 하는 놀이였다. 하지만 개구리에게 그것은 절체절명의 사투였다. 누군가에게는 장난거리에 불과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음이다. 중국의 춘추시대에는 이런 군주도 있었다. 진나라의 영공 이야기다. 그는 몹시 형편없는 못난 군주였다. 그의 악행은 다양했는데 그중 압권은 단연 ‘사람 사냥놀이'였다. 그는 종종 궁궐의 높은 누각에서 담장 바깥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활을 쏘고는 화살을 피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사람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 그에게는 단지 놀이였다. 사람의 생명을 군주인 자신의 재미를 위해 기꺼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다.

당연히 아무리 인간이라 해도 개구리의 생명을 가지고 놀 권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군주라 해도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놀 권리도 없다. 자신이 지닌 힘이 상대에 비해 우월하다고 해서 상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의 재미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더는 인간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맹자는 전쟁을 한다면서 시신으로 온 성 안을 꽉 채우고 온 벌판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보고는, 이는 땅의 신에게 인육을 바치는 것으로 이런 자는 사형을 시켜도 부족하다고 절규했다. 인간도 아니라는 얘기다. 사형은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이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내리는 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이란과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이란의 석유 생산 설비가 집중되어 있는 하르그섬의 군사시설을 폭격한 다음에 재미 삼아 몇 차례 더 폭격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번 전쟁으로 이란의 사상자는 벌써 수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미국의 대통령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재미 삼아 폭격을 더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정녕 인간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기야 인두겁을 쓰고 있다고 다 인간이 아님은 인류 역사에서 익히 입증되고도 남았으니 더는 할 말이 없다. 김월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원장의 글을 공유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5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로 말씀은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이다.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게
늘 새롭게 오시는 믿음을
더 이상 붙들지 않으니
내 안에 애써
붙들어 가두는
믿음은 맹종이요
믿음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아낌없이 건네지는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늘 새롭게 오시는 희망을
더 이상 붙들지 않으니
내 안에 애써
붙들어 가두는
희망은 허상이요
희망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아낌없이 건네지는
희망이야말로 참으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뜨겁게
늘 새롭게 오시는 사랑을
더 이상 붙들지 않으니
내 안에 애써
붙들어 가두는
사랑은 탐욕이요
사랑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아낌없이 건네지는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6
나의 삶에서 중요한 이별의 순간이 있었나요? 하느님 안에서 그 이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2026/4/7/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보건의 날
요한 복음 20장 11-18절; “나는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이별의 다른 차원
여름 방학을 마치고 병실에 계신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몹시 아쉬워하셨습니다. 저는 어쩌면 불가능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꼭 건강히 계셔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약 세 달 뒤 눈을 감으셨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보게 해 달라는 저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 것 같아 원망스러웠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아들로서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한참 사로잡혀 있기도 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리 아들이 엄마 사랑하는 거, 나는 알지”라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은 듯했고 어느 순간 어머니와 제가 함께 있다는 것이 느껴지며 큰 위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들과 함께하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받아주신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당신이 아버지께 올라가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떠남은 이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떠나심은 성령 안에서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이별은 슬픔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만남을 여는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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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부활 팔일 축제의 셋째 날입니다. 어제는 ’달려가는 기쁨‘에 대해 묵상했다면, 오늘은 ’머무르는 사랑‘과 ’부르심‘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온통 사라진 시신과 과거의 슬픔에 고정되어 있었죠. 그래서 천사가 말을 걸어도,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등 뒤에 서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을 정원사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고통이 너무 크거나 눈앞의 문제가 너무 무거우면, 바로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게 아니라, 우리의 슬픔이 주님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장황한 설명으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그 순간 마리아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정원사‘가 ’라뿌니‘가 되는 기적은 논리가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군중 속의 하나로 보지 않으십니다. 내 이름, 내 아픔, 내 사정을 정확히 아시고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도 기도 중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계신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더이상 붙들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과거의 예수님께 매달리지 말고, 이제 성령 안에서 모든 이와 함께하실 새로운 현존의 방식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외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이 고백은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불타올라 회개한 삼천 명의 신자들에게로 이어집니다. 부활은 ’아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이며, 그 본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사람들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면, 이제 우리도 그에 걸맞는 응답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과거의 슬픔과 죄의 무덤 속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증언하십시오. 거창한 교리가 아니라, ”내 삶에서 주님을 느꼈다“는 소박한 고백이 세상을 바꿉니다.
오늘 하루, 문득문득 주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소리에 집중해 보십시오. 세상의 소음 때문에 그 음성을 놓치지 않도록 마음의 소음을 조금 낮춰보는 건 어떨까요?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 곁에서 정원사처럼 묵묵히 여러분의 영혼을 가꾸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 제 이름을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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