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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인격에 있다.

365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4월 6일)

1
어제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를 종교적 체험으로 경험했다.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마태 28,8) 제자들에게 달려갔다. 여기서 신비라는 말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 신비 앞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압도된 거룩한 경외심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 첫 마디로 "평안하냐?"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하였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모든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떨게 만드는 현실의 고통이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붙잡았던 여자들처럼, 우리도 기도로 주님의 발치를 붙잡으면 된다. 동아시아의 세계관으로 말하면 '도'를 만나는 거다. 내 개인적인 철학으로 자연을 믿는 거다. 자연은 말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르면 된다. 부활의 체험은 비겁한 사람을 용기 있는 증인으로 변화시킨다. 파스카, 즉 건너가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기쁨을 전하러 달려갔지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에게 달려갔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실을 마주하고도 회개하기는 커녕, 돈으로 군사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하지만 진실은 빛과 같아서 아무리 가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돈과 권력으로 잠시 덮을 수는 있어도, 부활의 생명력은 결국 어둠을 뚫고 솟아오른다. 우리는 오늘 선택해야 한다. 마리아들처럼 진실을 전하는 기쁨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경비병들처럼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어둠의 길을 갈 것인가?

오늘부터, 나는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절망, 미움, 포기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 그 무거운 돌을 치우는 부활 50 일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지친 동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시선을, 가족에게는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세상이 주님이 원하는 평화가 더 가득하길 바란다.

2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인격에 있다. 진정한 인격이란 너와 나 사이에, 또는 개인과 개인 관계에서 상대에 대해 자신을 낮추고, 상대는 높여주며, 상대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줄 수 있는 도량의 깊이와 넓이를 의미한다.

강감찬 장군의 일화를 알게 있다. 곡산이라는 분의 글에서 얻어왔다.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자 현종왕이 친히 마중을 나가 얼싸안고 환영했다. 또한 왕궁으로 초청해 중신들과 더불어 주연상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한참 주흥이 무르익을 무렵, 강감찬 장군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현종의 허락을 얻어 자리를 떴다. 나가면서 장군은 살며시 내시를 보고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시중을 들던 내시가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강 장군은 내시를 자기 곁으로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열었더니 밥은 있지 않고 빈 그릇 뿐이더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짐작하건 대 경황 중에 너희들이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순간 내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만 저만 한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빈이 강감찬 장군이고 보면 그 죄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었다. 내시는 땅바닥에 끓어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때 강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미가 급한 상감께서 이 일을 아시면 모두들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 가? 내가 소변 보는 구실을 붙여 일부러 자리를 뜰 것이니, 내가 자리에 앉거든 곁으로 와서 '진지가 식은 듯하오니 다른 것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갖다 놓는 것이 어떨까?"

내시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강감찬 장군은 이 일에 대해 끝까지 함구 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내시는 그 사실을 동료에게 실토했으며, 이 이야기가 다시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훗날 현종은 강감찬 장군의 인간됨을 크게 치하해 모든 사람의 귀감으로 삼았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능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인격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존경 받지 못한다. 높은 꿈은 지위와 권력이 아니라, 인격과 능력의 향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위와 권력은 언제라도 잃을 수 있지만, 인격은 어디에서나 자신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격과 능력을 기르면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 낼 수 있다. 4월이 막 간다. 그래 오늘 아침에는 박목월 시인의 노래를 공유한다.

4월의 노래/박목월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3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배고픔을 느껴라"는 <<편안함의 습격>> 저자 마이클 이스터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 우리는 배고픔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까지 이야기 했다. 오늘부터는  "배고픔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말을 하려 한다. 인류는 본래 풍요와 기근이 반복되는 환경에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피치 못할 강제적 기근에서 거의 벗어나게 되었다.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과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진짜 배고픔을 느끼는 일이 사라졌다. 이것은 곧 사람들이 "편안함에 대한 잠식"의 악영향을 겪고 있다는 뚜렷한 신호이다.

우리 조상들은 끊임없이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실제로 장기간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일은 드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하루 종일 뭔가를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루에 한 두 끼 정도만 식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틀림없이 식사 사이에 간식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현대인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칼로리를 섭취하기 시작해 잠들기 직전까지 먹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현대인은 평균 하루 15시간 음식을 섭취한다는 거다. 우리가 먹는 간식이 1978년에 비해 70% 증가했다고 한다. 간식의 크기도 60% 더 커졌고, 초가공식품의 비율도 늘었다 한다. 이것이 체중 증가의 원인이다. 또한 배고픔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화된 것도 비만율이 증가한 주요 원인이다.

체중 증가 문제를 넘어서, 실제로 배고픔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인간의 몸이 '궁핍한 시기'를 활용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 허기진 상태는 장기적인 건강을 최적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배고픈 상태가 되면 우리 몸의 세포가 일종의 자연 선택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고 나면 양에 따라 12시간에서 16시간이면 모든 대사작용이 끝난다. 이때가 되면, 우리 몸은 테스토스테론, 아드레날린, 코르티솔 분비가 시작한다. 저장했던 조직을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라고 신호를 보내는 호르몬들이다. 이때 죽었거나 손상된 세포들이 대량으로 제거된다는 거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들은 배고픔을 새로운 차원의 종교적 체험이나 생물학적 재구성, 육체적 변화를 위한 방법으로 활용해왔다는 거다. 많은 의료 전문가들은 음식 없이 지내는 기간이 암 같은 질병들을 예방하고 더 나아가 치유해준다 고까지 생각했다.

4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위에서 말한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있을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1992년 MIT의 데이비드 사바티니(David Sabatini) 박사는 mTOR(mamamalian Target of Rapamycin, 세포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단백질의 하나) 경로를 발견했다. 그는 이것이 우리 몸의 낡은 세포들을 허물고, 새로운 건강한 세포로 교체하도록 신호를 보내는 종합건설업자 같은 존재라고 설명한다. 가장 오래된 세포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베관공을 한 사람 데려온다고 해서, 혹은 전기공이나 지붕 수리하는 사람이나 석고보드 작업자들 한 사람 데려온다고 해서 낡은 집을 완전히 개조할 수는 없어요. 종합건설업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서 필요한 모든 수리를 선행할 수 있습니다."

사바티니 박사는 mTOR 경로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이 결론은 몸의 음식 섭취 여부를 감지해, 우리가 먹지 않고 있으면 종합건설업자가 모든 일꾼을 소환한다. 신체가 기력을 회복하고 노화를 늦추는 일련의 과정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사바티니 박사는 설명했다. 우리 몸은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이어서, 가장 오래되고 약한 세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원을 재활용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우리 몸의 쓰레기 수거 방식'이라 한다.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 '쓰레기 세포'들은 노화와 질병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다. 이런 세포들이 '정상적인 조직' 기능을 방해한다는 거다. 이 세포들은 염증을 일으키고, 건강한 세포를 파괴하고, 섬유화를 촉진하고, 유익한 성장 세포의 기능을 억제한다. 이와 같은 인체의 쓰레기 수거 과정을 공식적으로는 '자가 포식(Autophagy)'이라고 한다. '스스로 먹어 치우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이 말은 불편함을 겪는 모든 존재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은유이다. 이 현상은 마치 고통을 통해 약한 고리를 희생시키고 강해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인간의 몸은 낮과 밤의 주기에 맞춰 자가 포식을 조절하는 생체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몸은 낮 동안 음식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밤에는 자가 포식하며 스스로를 회복하고 재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거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식습관은 이 과정을 방해한다. 몸이 완전히 음식을 대사하고 자가 포식 모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소 12-16시간이 필요한데, 늦은 밤까지 먹는 습관 때문에 이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거다. 시더스-시나이 메디컬 센터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자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자가 포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곧 몸에서 쓰레기를 수거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손상된 세포들은 계속 더 많은 부스러기를 축적한다."

우리 조상들의 경우, 음식이 흔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낮 동안에만 섭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밤새 긴 시간 동안은 자연스럽게 단식 상태가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인공 조명과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은 하루 종일 밝은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 결과 음식을 섭취하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하루 종일  먹는 '음식 마라톤'은 우리의 정신적 능력도 한 계단 떨어지게 한지 모른다, 흥미롭게도 먹을 것의 부족은 오히려 에너지를 급증시킨다. 연구진은 먹지 못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신체적,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가능을 유지하며, 이는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비만코드>>의 저자 제이슨 펑(Jason Fung)박사의 흥미로운 주장을 공유한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몸은 작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서히 출력을 높입니다." "배고픈 늑대하고, 막 식사를 끝낸 사자를 생각해 보세요, 누가 더 집중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배고픈 늑대입니다." 이 이야기는 내일 더 이어간다.

5
오늘은 2026. 04. 06.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28,8-15> "여자들에게 나타나시다, 경비병들이 매수되다" 이다.

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다시 늘 새롭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믿음이
다시 살아나
믿음에게
가시니
믿음은
믿음을
늘 새롭게
믿게 되리라

희망이
다시 살아나
희망에게
가시니
희망은
희망을
늘 새롭게
희망하게 되리라

사랑이
다시 살아나
사랑에게
가시니
사랑은
사랑을
늘 새롭게
사랑하게 되리라

6
마태오 복음 28장 8-15절: 마태오 복음 28장 8-15절: “두려워하지 마라.”

참된 평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6)라고 말씀하시며 나타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상황을 바꾸시기보다 두려움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당신의 평화를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는 평화를 가져올 다른 매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까무러칩니다. 그들은 무덤을 지키지 못한 책임과 처벌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불안을 잠재운 것은 대사제들이 준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만들어내는 것은 잠시 불안을 덮어주는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부유한 사람이 깊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곤 합니다. 이는 돈이나 세상적 지위가 평안의 원천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돈은 결코 평화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그 참된 평화를 찾고 간절히 청하면 좋겠습니다./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어제 우리는 주님 부활의 장엄한 기쁨을 맞이했습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팔일 동안을 부활 대축일로 지냅니다. 부활의 신비가 그토록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의 아침, 서로 상반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마태 28,8)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경이로움에 압도된 거룩한 경외심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 첫마디로 “평안하냐?”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모든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혹시 여러분을 떨게 만드는 현실의 고통이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붙잡았던 여자들처럼, 우리도 기도로 주님의 발치를 굳게 붙듭시다.

오늘 복음에서 여자들은 “서둘러”, “달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나 혼자 간직할 때보다 타인에게 전하기 위해 발을 뗄 때 더욱 뜨거워집니다.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숨어 지냈던 겁쟁이 베드로가, 이제는 유다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느님께서 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라고 외칩니다. 부활의 체험은 비겁한 사람을 용기 있는 증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 역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전하는 ‘살아있는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기쁨을 전하러 달려갔지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실을 마주하고도 회개하기는커녕, 돈으로 군사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립니다. 하지만 진실은 빛과 같아서 아무리 가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잠시 덮을 수는 있어도, 부활의 생명력은 결국 어둠을 뚫고 솟아오릅니다. 우리는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마리아들처럼 진실을 전하는 기쁨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경비병들처럼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어둠의 길을 갈 것인가?
부활은 2천 년 전의 신화가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 2,27)라는 확신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도 절망, 미움, 포기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남아 있나요? 그 무거운 돌을 치우고 나오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도 마리아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전하러 “서둘러 달려가는” 사람이 됩시다. 거창한 선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친 동료에게 건네는 따뜻한 커피 한 잔, 가족에게 전하는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주님께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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