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삶에 '소금'을 치다. (2-1)

- 이해찬 전 총리 장례식에 가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전언을 통해 그려본다.
겨울의 찬 공기는 허한 마음을 더 차갑게 얼어붙게 했다. 영결식은 조객의 비통함 속에서도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화장을 바라보는 순간, 육신이 화염에서 사그라들며 한 줌 뼈 재로 남는 것을 보면,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곁에 머물고, 삶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과 공존한다. 김훈 소설가의 묘사가 소환된다. 이젠 가끔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 일반적인 화장터 풍경.
관이 전기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 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가 켜진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의전을 관리하는 절차도 세련되었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이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옹기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간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인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이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깝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하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인다. 죽으면 말 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 생활하듯이, 세수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다시 이해찬 장례식
영정과 훈장만이 들른 그가 살던 세종시 집은 큰 규모의 별장이 아니라, 자그마한 여염집이었다. 그의 청빈한 삶이 그려진다. 국가 균형 발전의 가치와 미스터 퍼블릭 마인드의 철학이 증명된다. 퍼블릭 마인드, 이를 나는 '공화국 정신'이라고 한다.
유학 시절 프랑스서 만난 공화국 정신은 ‘고르게 가난하게 살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몽테스키외는 "공화주의에서 시민은 소박하게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평등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프랑스는 모두가 평등하니, 모두 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톨레랑스(tolerance-관용보다는 차이 인정) 문화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다양성을 강조한다.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 중의 하나인 박애는 ‘사랑’, ‘친절’의 개념이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으니, 서로 입장을 바꿔 다 잘 살자’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강조했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이다. 나만 잘살자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사는 ‘대동 사회(大同社會)’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프랑스 사회는 연대 정신(solidarite)이 살아 있다. 국가가 아니라, 각 개인을 중시한다. 특히 시민은 각자 위대한 개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위대한 개인'이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위대한 개인'이 다시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고 본다. 마치 웅장한 건물을 지탱하는 한 장의 벽돌처럼. 그 위대한 개인이 되려면, 늘 공부를 하며 배워야 한다. 배움을 통해 매일매일 위대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일상 속에서 탈출해 자신에게 유일하고 진실한 자아와 자신만의 임무를 발견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말한다. 사명을 찾아 선택하고 그것에 몰입하고, 이어서 그 일에 책임을 지는 거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이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그 성찰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하루하루 더 나은 사람을 성숙해 가는 것이다.
자신과 정직한 대면을 통해, 나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남들이 세워 놓은 기준에 따라 살아가기 쉽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그 어떤 허상을 위해 맹목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관조하는 묵상을 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인생의 초보자로 다시 태어나 ‘처음처럼’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 또다시 이해찬 장례식
전분으로 만든 유골함에 담긴 그의 유해는 마침내 자연과 합일되었다. 취토를 끝으로 장례는 끝났다. 취토(취토)는 장례 절차에서 하관(관을 묫자리 구덩이에 내려놓음) 후, 횡대(관을 덮는 나무) 위에 흙을 덮거나 관 위에 흙을 뿌리는 행위를 말한다. 취토가 끝나면, 묘가 완성된다. 그의 묘는 평장으로 조성한 바로 그곳에 평평하게 누우셨다. 그가 남긴 것이 '3실'이라 한다. '성실, 절실, 진실.' 나도 이 '3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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