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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영혼을 앞세워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삶의 방향을 잡고 따라가는 삶이 행복의 원천이라 한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0년의 달리기도 이젠 거의 종착역에 왔다. 오늘과 내일이면, 해가 바뀐다. 오늘은 내 영혼을 점검하는 날이다. 소크라테스의 평생 과제는 아테나인들의 영혼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영혼의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전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지식의 목적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지(實踐知)라는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 참 말을 달리다가 멈추곤 한 단다. 왜냐하면 영혼이 뒤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 란다. 바쁠수록 영혼을 챙겨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우상화 하여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을 최선의 삶이라고 의식화 하였다. 지본주의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게 한다. 루저로 규정되면 달리기 명단에서 빼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에 훈련 받아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리거나 놓고 내달리기만 한다. '초 격차'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말은 따라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못 따라올 정도로 더 빨리 내달려야 산다는 논리이다. 이 초 격차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제대로 따라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절대 멈추어 서지 말고 달리도록 부추긴다.

영혼을 뒤에 남겨 놓고 달리기만 하는 삶은 우리에게 삶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대신 삶의 정신적 행복을 빼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멈춰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 경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잃어 버리고 살며 잃어버린 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가끔은 멈춰 서서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지를 돌아보는 것이 절실하다.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영혼을 앞세워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삶의 방향을 잡고 따라가는 삶이 행복의 원천이라 한다. 가끔 멈춰 서서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주는 삶보다 근원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오히려 영혼을 길잡이로 앞장 세워 따라가는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이게, 길을 잃지 않고 걷는, 더 좋은 삶의 기술일 수 있다. 영혼의 떨림을 따라가는 삶 말이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미션, 소명, 소임을 알아야 한다. 그게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혼의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영혼과 동행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 때 우리는  진정성이 넘치는 삶을 살게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동행을 구하라는 말을 우리는 다 안다. 내년에는 영혼을 동행하는 해가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윤정구라는 분의 담벼락을 보고 한 생각이다. 윤정구님께 감사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명상록』에서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 세계 150개 이상의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기획자 소만 차이나니(Soman Chainani)는 우리들의 "영혼은 생각을 통해 말하지 않는다. 감정, 이미지, 단서, 실마리를 통해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영혼은 파편처럼 우리 삶 곳곳에, 모든 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우리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생각, 규칙, 체계, 신념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저 우리가 손에 넣지 못하고 있는 "과거 경험의 잔재 물"이라고 한다.

소만에 의하면, 늘 영혼은 우리 내면에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영혼과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헸다. 그래 우리는 영혼을 최선의 상태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영혼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떨림이 없이 산다는 말이다. 그냥 기계적으로 산다. 그러나 쇼만은 영혼이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 몰입하여, 자신의 심연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들려주는 목소리, 나의 자아. 두려움, 본능들을 만나는데, 그것들이 나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나만이 혼자 찾아가는 장소를 가지고,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 오늘 아침은 잠시 멈추어서,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본성은? 이런 질문 때마다, 나는 맹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사람의 선한 본성으로 답한다.
-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 잘못을 미워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 예의를 지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맹자는 이 선한 마음으로 부터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의예지(인의여지)가 나온다고 했다. 이 마음을 맹자는 '사단(사단)'이라고 했다.
-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인(仁)-사랑
- 수오지심에서 나오는 의(義)-정의
- 사양지심에서 나오는 예(禮)-예절
- 시비지심에서 나오는 지(智)-지혜

우리가 이미 잘 알다시피, 이 '네가지 단서'가 사람의 본성 속에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사람의 '천성(天性)'이라 한다. 이 '사단'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이다. 그러니까 맹자는 이 네 가지가 사람됨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 사이만큼 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맹자의 '사단'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주례>의 한 문장을 공유한다. "대사도는 각 지역에서 백성들에게 매일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 곳의 현명한 사람을 뽑아 천거하는 일을 맡았다. 매일 하여야 할 세 가지 일은 여섯 가지 덕목을 가지고, 여섯 가지 행실을 하고, 여섯 가지 예술 행위를 하여야 한다. 그 여섯 가지 덕목은 지식, 어진 마음, 성스러움, 의로움, 충실함 그리고 조화이다." 이 여섯 가지를 한문으로 하면,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이다. <주례 집설>는 이 여섯 가지는 마음에서 나오는 덕(德)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지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고, 인은 사욕이 없음이고, 성은 통하지 않음이 없음이고, 의는 결단과 제제함이 없음이고, 충은 자기 마음을 다함이고, 화는 어긋나는 바가 없음"이다. 좀 더 풀어 실천 가능하도록 정리 한 것은 시를 읽은 다음으로 미룬다.

"그날이 쉽게 오지 않음을 알았 어도 또 그날이 꼭 와야 한다는 것도 절실하게 깨달었습니다."(추미애) 지난 크리스마스날 적어 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날>을 소환했다. 오늘 아침 사진도 어제 그 찻집에서 찍은 것이다.

그날/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 단어는 다층적이다. 내가 오늘 말하는 '그날'은 희망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보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는 사람을 화자(話者)라 말한다. 말할 수 있다는 것 만도 참 다행한 일이다. 예전엔 보고 들으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인의 눈에 목격된 어느 하루, 그 하루의 생각을 시로 서술했다. 행과 연의 구별이 일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산문시의 형태를 띰으로써 화자의 어수선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다.

이 시를 읽으며 아픈 것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병들음을 모르는 것이다. 살이 썩고 뼈가 삭는데 아무도 진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이 아니면 짐짓 모른 체 하는 아예 모른 체 해버리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시선을 두지도 않는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인 세상. 이성복 시인의 <그날>은 과거의 그날이 아니라, 현재의 '그날' 즉 오늘의 우리 자화상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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