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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되는 것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2월 26일)

한 사람이 정치 한다고 나와 뱉은 첫 마디이다.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위기는 경험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과도하게 계산하고 몸을 사릴 때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본다.”

이 말 중에서 앞부분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건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가지면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앞의 말과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앞 인물은 인용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걸 '표절'이라 한다. 불법이고 비양심적인 거다. 그런데 거기다 의미를 왜곡까지 했다.  정치 경험 부족이 단점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루쉰의 소설 내용을 무리하게 가져다 인용한 것이다.

그러더니 이런 말도 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의 정치에서는 멀리 있었지만, 공공선 추구라는 큰 의미의 정치는 벌써 20년째 하고 있다. 그런 정치는 기자들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기자들은 왜 갑자기 끼워 넣는 것일까? 이 주장은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 때 내미는 전형적인 방어 논리이자 궤변이다. 성한용 기자는 다른 예를 들어 준다.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정치 경험이 없는데 대통령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 경험 부족은 저의 분명한 약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런 반론을 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요. ‘낡은 체제’와 결별해야 하는 시대에 ‘나쁜 경험’이 적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또 제가 비록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은 없지만 긴 기간 동안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해왔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만일 정치를 한다면 이런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이야기의 논리가 너무나 똑같다.

정치는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일이다. 설득하고 절충하고 양보해가며 현실을 조금씩 개선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경험 없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설득, 양보, 절충, 그리고 타협하는 게 정치이다. 정치를 보고 평가하는 것과 정치를 직접 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가 축구를 보는 안목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수준이지만, 동네 조기축구에서는 헉헉거리며 공만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현대통령이 정치를 못하는 것은 정치 전문성이 없고, 정치 경험도 없고, 거기다가 정치인들의 말까지 잘 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회의원 경험이 없으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은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그리고 윤석열 이렇게 네 사람 뿐이다. 내공과 실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재능’과 ‘훈련’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 만난 또 다른 한 연설은 정치를 잘 모르는 자가 자신의 상징인 '사가지 없음'만 보여주었다.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국민과 싸우자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인 많은 국민들을 대신해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그 뒤에 숨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운동권 특권세력과 싸울 겁니다.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싸울 겁니다. 그리고, 용기와 헌신으로 반드시 이길 겁니다."

출처를 이야기 하지 않고, 또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1940년 6월4일 연설을 소환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다졌던 처칠의 연설을 활용해,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운동권 세력'에 칼을 겨눴다. 자신들보다 지지하는 국민들이 더 많은 야당과 전쟁하자는 거다. 처칠 전 총리의 연설은 프랑스가 패망 위기에 빠지고, 영국 병사들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서 무사히 철수하고나서 영국 하원에서 나온 것이다. 덩케르크에 고립돼 전멸당할 뻔 했던 연합군은 작전이 성공해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이 작전은 이후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자신들의 지지율 하락 위기를 세계대전에서 급박했던 영국의 상황에 빗대, 내년 총선에서 야당을 이기겠단 의지만을 다진 것이다. 국민들은 다 안다. 정치 정상화 보단 지지층 집결을 택한 얕은 수작이다. 그게 그의 한계이다.

또 '철 모르는' 대표라는 자는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다(Fear is a reaction. Courage is a decision)"며 한 차례 더 처칠 전 총리의 말을 출처 밝힘 없이 빌렸다. 그는 "이대로 가면, 지금의 이재명 민주당의 폭주와 전제를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상식적인 사람들이 맞이한 어려운 현실은, 우리 모두 공포를 느낄만 하다"며 "저는 용기내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철학이 없이, 남의 말을 함부로 끌어오면서, 얕은 지식을 드러내는 발언들이다. '사특하다.'

그는 연설 말미에 “여러분, 동료 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 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라고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발표한 <환상 속의 그대>에 나오는 ‘무엇을 망설이나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라는 부분을 참고한 것 같다. 그의 생각이 사특한데, 자신이 X세대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민주당 주축인 86세대와 대비되는 인상을 주고 싶어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웃긴다. 말로 되는 게, 아니다, 평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꼴이 사나워 볼 수가 없었던' 꼴불견이 하나 더 있다.  메고 나온 넥타이는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가 새겨져 있는 제품이었다. 더 구린내가 나는 것은 그 넥타이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이 좋아지고 열매가 많아지나니' 부분이 적혔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권력의 편에 서서 군림하겠다는 무의식적인 태도이다. 내가 알기로는 <<용비어천가>>를 지은 목적이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하여,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이렇게 어렵게 쌓아 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경계하려는 데 있었다고 본다.  AI와 스마트 팩토리가 대두되는 요즘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의 진정성이 정말 없다. "사무사(邪無思)"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것을 "생각에 잘못됨이나 간사함이 없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시 300편을 모은 <<시경>>을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주옥같은 시 모음집"이라 했던 말이다. 퇴계 이황은 "사무사"의 '무'자를 없게 하다'는 사역형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사무사"를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한다'로 읽은 거다. 율곡 이이는 이 "사무사"와 "무불경-마음과 몸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을 벽에 걸어 두었다 한다. 생각이 바르려면 마음이 바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이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작은 거짓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작은 거짓들이 보태 진다. 그 다음에는 그런 거짓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생각의 흐름을 왜곡한다. 그 왜곡된 생각의 결과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이 동원된다. 필요할 때마다 거짓을 행하면서 거짓은 이제 습관이 된다. 거짓이 '무의식적인' 믿음과 행동으로 굳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우리는 이를 '자기 기만'이라 한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자기 기만을 피하는 길이 그저 잠시 앉아 살피는 일인데도, 우리는 떠밀려 살아온 관성을 제어할 용기를 못 내고 있다. 기만이라는 덫에 걸리는 사냥감은 대개 탐욕일 경우가 많다. 나의 탐욕과 집단의 탐욕을 바라보고, 해체하고,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새우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시간처럼 인간도 진정한 어른으로 탈피하는 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 성공을 거두면 그 후에는 교만과 우월 의식이 따라온다. 사실 거짓으로 이룬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모두 속임수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 멍청하다'라는 교만과 우월 의식에 빠지게 된다. '모두 어리석어서 나에게 속아 넘어간다. 따라서 나는 원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나중에 닥친다. 거짓으로 개인과 현실, 혹은 사회와 현실 간의 관계가 무너질 때 지옥이 찾아온다. 그러니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진실은 삶의 깊고 깊은 원천에서 끊임없이 샘 솟는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필연적인 비극에 맞닥뜨리더라도 영혼이 위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자 필론은 여행 중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났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은 신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도 죽음이 두려웠지만, 명색이 철학자인지라 다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어 배 아래 창고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폭풍우와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돼지 한 마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돼지 옆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한참 후 날씨가 좋아졌고 다 무사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제목이기도 한, <<필론의 돼지>>는 이문열이 1980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의 제목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일까? 지난 주 월요일에 노자 <<도덕경>> 81장을 도반들과 함께 다 읽었다. 끝 문장이 이 거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그래 싸우지 않기로 했다. 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하였다.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무위하고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을 이기려고 다투지 않고 겨울도 봄을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을 비우고 겨울에게 때를 넘겨주고 겨울 또한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가을이 있고, 또 다른 겨울이 있게 된다. 각자의 분수와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분쟁(分爭)이 발생하지만 욕심을 비우면 '부쟁(不爭)'하게 되고 세상은 공정해 진다.

<<도덕경>> 제81장에 이런 말도 있다. "信言不美(신언불미) 美言不信(미언불신):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하여 떠 벌이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필론의 돼지/이위발

필론의 돼지처럼
잠자고 있는 것을 흉내 내고 있는데
벌 한 마리 방 안에 들어와
머리 처박다 떨어졌다 다시 처박는데
열려 있는 문 보지 못하고 창호지만 두드리다
어느 사이 빠져나갔는지 모른다
의식이란 스스로 발라 놓은 창호지 같아

진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하늘 높아 보일 때 사람들이 외로워 보여
높은 것을 싫어하듯
내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듯
돼지는 뒷걸음질 치며 악을 쓰고 있다
용서할 거리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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