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27일)
어제는 은퇴 후, 처음으로 경희대학교에 갈 일이 있어 새벽에 나갔다. 그래 어제 <인문 일지>를 오늘 아침에 공유한다. 아직 한낮에는 덥지만, 하늘은 가을이다. 가을이 오면, 산책하며 하늘의 구름을 관찰하는 것이 즐겁다. 점점 크게 부푸는 뭉게구름, 양떼 구름, 새털 구름 등, 매일 매일 하늘은 다른 그림을 그린다. 한 주간 동안 천안으로 대구로 강의 다니며, 하늘 덕택에 즐거웠다. 오늘 아침도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계속 읽는다. 그에 의하면, "디지털로 된 종이의 숲인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 없다"는 거다. 정보 사냥꾼들이 꿈의 새를 사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다.
반면 이야기를 할 때는 이완의 상태가 필요하다. 벤야민은 정신적 이완의 결정을 위해 지루함을 강화한다. 이 지루함이 "경험의 알을 부화시키는 꿈의 새"(벤야민)라는 거다. 인터넷 안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정보 소음은 꿈의 새를 쫓아낸다. 이 숲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의 짜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며, 바로 휘발된다. 즉 남는 게 없다.
과다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초-정보사회는 정신의 고도 긴장의 시대가 되었다. 정보의 쓰나미는 우리의 지각 기관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각 기관은 더 이상 관조(觀照)의 상태로 전환되지 못한다. 정보의 파편화는 우리의 주의집중을 파편화하여 분산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무을 방해한다.
현재 우리들은 핸드폰에서 무슨 정보든지 캐낼 수 있다. 이 편리함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실(失)이 되었다. 핸드폰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문명의 이기(利器)이서 동시에 우리들을 자신의 정보로 시야를 가리는 색안경(色眼鏡)이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 대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관조하여, 그 대상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생각하려는 ‘거울 신경계’를 뇌 속에 장착하였다. 창의성의 작동원리인 거울신경계가 마비되어, 누군가가 편집한 정보만 편식하는 인간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 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정보는 "신 존재형식, 즉 신 지배 형식"(한병철)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정보체제가 스마트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명령이나 금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에게 침묵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마트한 지배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의견, 필요, 선호를 소통하라고, 삶을 서술하라고, 게시하라고, 공유하라고, 링크를 걸라고 요구한다. 이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때 자우는 억압되기는 커녕 철저히 혹사된다. 게다가 스마트한 지배는 그 존재를 특별히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이들은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있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의 흐름에 예속시킨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은 정보와 소통에 도취되어 몽롱하다. 우리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맡겨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되고 있다. 인간 다움이 걱정된다.
독립적인 삶으로 완성하는 인간 다움이 자유이다. 한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도덕적 규범이 통용되고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규범을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 그 규범을 따르는 이유가 전체주의적 통제의 결과이고, 이를 어기면 엄청난 처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제한한 파시스트 사회를 말한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 이념을 통해 인간 개조 작업을 시행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공산주의 사회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그 사회 속에서는 인간 다움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율성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은 주체성, 자기 결정권, 자주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그려 본 뒤, 주어진 상황을 점검하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앞날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적 삶은 본능과 습관에 종속되는 않는 거다.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성찰 없이 기존의 이념에 종속되어 있거나, 그것에 세뇌되어 로봇처럼 따른다면 이 또한 자유롭지도 자율적이지도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한 사람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반대가 외적인 강제와 간섭에 의해 선택의 문이 닫혀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소극적 자유'이다. 결핍된 자유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채 무언 가가 없어야 성립하는 자유이다. 즉 나의 선택을 가로막는 장애 또는 강제가 없어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편 장애물이 없어서 선택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음에도 자유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의 경우를 보면, 그의 행동을 가로막는 간섭과 장애는 없으니 앞서 말한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예를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빠진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자기의 계획에 따라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외부의 간섭과 장애가 없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자유, 이것을 '적극적 자유'라 한다.
인간 다움은 적극적 의미의 자유, 즉 자율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람 답기 위해서는 이웃을 나와 같은 귀한 존재로 여겨야 하는데, 이 마음이 외부의 통제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이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물론 소극적인 자유가 인간 다움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 다움을 이야기할 때 필요한 것은 더 두터운 의미의 적극적 자유(자율)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인생/권대웅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인생 #권대웅 #서사의_위기 #관조 #알고리즘 #인간다움과_자유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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