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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오늘로 마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22일)

제주 바다를  그리워 하며, 다시 일상을 되찾고 있다. 그러나 어제 다 마치지 못한 제주의 슬픈 역사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오늘로 마친다. 아침 시도 이생진 시인의 것을 또 공유한다. 특히 제주에서 기억되어야 할 세 명의 군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3/이생진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어 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 나와
한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 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가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께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도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어제에 이어 제주 4,3 사건 이야기를 이어간다.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제주 좌익진영이 무장투쟁을 결의한다. 남쪽만의 단독 선거로 치러지는 5.10선거를 막아보자는 명분과 함께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이날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고, 경찰과 서청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미군정 경찰은 4.3사건을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라고 선전하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을 설치,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들을 증원했다.

반면 경찰에 비해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는 사태의 본질을 제주도민과 경찰·서청 사이의 충돌이라고 판단해 무장대와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8일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명의 군인이 있다. 무장봉기라고 하지만 무장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식 일제소총 27자루, 권총 3정 과 죽창이 그 ‘무장’의 전부였다.  실제 봉기에 참가한 이들도 수백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이들은 그 중에서도 소수였고 미 군정의 그릇된 행정과 경찰들의 만행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태를 잘 꿰뚫어 본 사람이  제주도 주둔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었다.  

제주에서 기억해야 할 세 명의 군인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세 명의 군인을 통해, 나는 내 삶의 길을 택하였다. 이 이야기는 김형민 PD(SBS CNBC)의 글을 오래 전에 적어 두었던 것을 다시 소환하여 리-라이팅 한 것이다. 김익렬 중령은 제주 4.3  사건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미 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악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폭동이다.” 제주  4.3 사건 이전부터 미 군정은 육지의 경찰대는 물론 좌익이라면 이를 갈아붙이는 북한 출신 월남민으로 구성된 서북 청년단을 제주도에 투입하고 있었고 이들은 가혹한 진압으로 제주도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특히 서북 청년단의 만행은 상상을 넘어섰다. 그들에게 ‘빨갱이’란 곧 악마였고 제주도는 악마의 섬 같은 곳이었다.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서북청년단원들은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사람의 몸에 죽창을 꽂고 산 채로 불태우는 악행을 태연하게 자행했다.  공산주의의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제주도민일지라도 그들의 만행 앞에서는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북청년단을 잘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오버랩이 되는 집단이 있다.

미 군정은 무장 봉기를 즉시 진압하라고 명령하지만 김익렬 중령은 제동을 건다. “극렬 분자는 2-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선무 귀순 공작을 펴 보고 그 뒤에 토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김익렬 대령은 실로 대담한 ‘선무 귀순’ 공작을 펼친다. ‘인민 유격대’ 사령관이라는 김달삼을 직접 만난다. 1948년 4월 28일 오후 1시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최고 지휘관 김익렬은 운전병과 장교 한 사람만 거느리고 인민유격대가 지정한 회담 장소로 향해.  5시간의 밀고 당기는 협의 끝에 그들은 즉각적인 전투 중지, 무장해제 및 투항, 범법자 명단의 자발적 제출(명단 이외의 사람은 수사와 처벌 대상에서 제외) 등 파격적인 합의를 끌어냈다.

이 협상이 순조롭게 이뤄졌다면 제주 4.3 사건은 소수의 희생자를 낳았던 며칠 간의 소요 사태로만 역사에 기록되었을 거다. 공권력에 맞서 일어선 이들일 망정 궁극적으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국군 지휘관과, 무기를 들었을 망정 최악의 사태는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 ‘인민 유격대’ 사령관은 평화를 되찾은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나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평화를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좌익들 과의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을 근절해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믿은 이들이었다.

5월 1일 오라리(里)라는 마을에 방화가 일어나 10여 채의 민가가 불탔다. 경찰은 좌익들의 소행이라고 우겼지만 김익렬 중령 측의 조사 결과 우익 청년단이 경찰의 비호 아래 저지른 짓이었다. 또 봉기에 가담했다가 평화 협상에 따라 마을로 복귀하던 이들이 총격을 받는 일도 벌어졌다. 이것도 경찰과 우익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이를 무시했다. 게다가 미 군정은 김익렬 중령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장에서 해임하고 9연대도 11연대에 편입시켜 버렸다.

이 11연대장으로 새로이 부임한 사람이 박진경 중령이라는 군인이었다. 김익렬과는 달리 박진경 중령은 미 군정과 공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물론 그들에 동조하는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취임 훈시는 다음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군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말은 엄청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행동으로 그의 취임사가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쓸어 담다시피 체포해 버렸다. 부임한지 불과 한 달 열흘(48년 5월 6일~6월 18일)만에 대부분이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천여 명에 달했다.

제주 지구 미군 책임자 브라운에 따르면 "제주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박명림 교수)

하지만 미 군정은 박진경에게 대령 계급장을 달아주며 공로를 치하한다. 박진경 중령 아니 박진경 대령은 제주도 유지들과 거창한 진급 축하연을 가지고 크게 취해서 부대로 돌아와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휘하 3대대장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이 그를 암살해 버린 거다.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이들은 남로당, 즉 남조선 노동당의 조직원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주범이라 할 문상길 중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즉 최소한 유물론을 받아들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제주도민들, 즉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을 적으로 몰고 그 삶의 터전을 초토화해 버린 공로로 승진한 상관을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대한민국 성립 후 사형 1호였다.  

제주 4.3의 폭풍이 몰아치던 제주도에 있었던 세 명의 군인의 행적은 이후 우리나라가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과 얼추 비슷하다. 해방 공간을 장악했던 것은 결국 우리 편 아니면 죽여야 할 적이라는 극단적 논리였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할 수 있고 그에 반하는 이들을 악마로 몰아 전멸시킬 수도 있다고 살기등등했던 세력과, 그 반대편에서 그들을 타도하자고 부르짖던 세력이 자석의 양극처럼 버티고 서 가운데,  엉거주춤 주변에 널려 있던 보통 사람들은 자력에 휩쓸리는 쇳가루처럼 양극 주변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김익렬처럼 양극의 중간에서 조율을 해 보려던 이들은 설 곳을 잃었고 끝내 박진경과 문상길처럼 죽고 죽이는 참극으로 치달었던 바, 제주도에서만 수만 명이 죽어갔고, 한반도는 전면전이라는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게 됐던 거다. 우리가 이 4.3 사건을 제주도에 국한된 사건으로 기억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제주 4.3 사건을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1948년 4.3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이 돌보고 지켜야 할 국민들을 팽개치고 학살했던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결코 그러지 못했던 과거와 마주하고 머리 숙이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슬픈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 미군정의 무력진압 결정과 방해공작으로 평화협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모략으로 점철된 오라리 방화사건은  5월 1일,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 무장대를 가장한 괴청년들이 몰려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일으켰다. 미군정은 이 장면을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선전용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무장대가 방화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결국 이날의 방화는 우익 청년들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배후에는 평화협상을 깨뜨리려는 미군정이 있었다.  현재는 '오라동 4,3길'이 만들어졌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평화협상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미군정은 강경진압으로 선회했다. 무장대도 다시 강공모드로 돌아섰다. 무장대의 4.3사건의 주된 명분이었던 5.10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하는 투쟁이 전개됐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관련 공무원을 납치 또는 살해, 선거인명부를 탈취하는 등 강공을 펼쳤다. 선거 당일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하고, 많은 주민들이 무장대에 동조해 입산, 투표를 거부했다. 결국 3개의 제주도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구가 투표율 저조로 무효처리가 됐다. 이후 6월 23일 재선거를 치르려 했지만 이 마저도 무산됐다. 제주도민의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더 큰 탄압으로 이어졌다.   광기의 시대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통일된 독립국가는 이룰 수 없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후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하나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한 제주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병력을 증파했다.

그해 12월에 유엔으로부터 새 정부 승인을 받으려는 이승만 정부와 1948년 말까지 한반도를 떠나야하는 미군정의 조급함이 ‘제주도 완전 섬멸’을 선택하게 된다. 10월 17일부터 강력한 토벌이 시작됐다. 토벌 사령관인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마을을 불사르고, 그곳 주민들을 사살했다. 일명 ‘초토화 작전’은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행해졌다. 500여명의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 명을 희생시켰다. 이때 자행됐던 갖가지 불법 학살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토벌대 진영’으로 간주되는 세화·성읍·남원 등의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정부에서 이 지역 사람들을 길잡이로 내세워 토벌대 소탕에 나서면 그 당사자와 가족에 대해 잔인한 보복을 행했다. 또한 굶주림에 식량을 약탈하러 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을 살해하기도 했다. 보복의 형태는 4.3이 길어질수록 더 무자비해졌다. 그야말로 토벌대도 무장대도 폭도가 되어 서로 미쳐가고 있었다.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이듬해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작전에 따라 많은 산사람들이 귀순해 왔다. 귀순자들은 남녀노소 모두 제주 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둬졌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사람들을 합쳐 거의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사실상 무장대는 소멸됐다.  

또 하나의 비극이 이어진다. 1950년 6·25전쟁은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을 안겨줬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당했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대부분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됐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천 명의 제주 출신 재소자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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