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21일)
1
어제는 성당 모임에서 <수리치 골 성모 성지> 순례 겸 등산 모임을 했다. 이곳은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의 마을로 1846년 11월 2일,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장 조셉 페레올(Jean-Joseph Ferreol)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o) 신부(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병오박해를 마주하며 성모 마리아께 조선의 보호를 청하고자 수리치 골 교우촌에서 성모성심회(프랑스 파리) 조선 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84년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곳의 교회사적인 가치를 언급하면서 한국교회가 최초로 성모 성심께 봉헌된 성모 성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리치 골이라는 지명은 수리취 나물이 많이 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성당 주임 데쥬네트 신부가 설립한 신심단체로 미리내 성모 성심수녀회 설립자 정행만 신부의 노력으로 현 수리치 골에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원 총원이 되었습니다(<수리치 골 성모 성지> 안내문에서 발췌).
'미리내'라는 말은 용을 뜻하는 미르와 하천을 뜻하는 내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미리내'는 은하수의 제주 방언으로 명기되어 있다. 주로 남해 쪽 섬이나 제주도 지역에서 사용한다. 원래 은하수라는 이름도 다양하다. 하늘로 튀어 오른 헤라의 젖이 만든 길이라고 그리스인들은 갈락시스(galaxias)라 불렀고, 로마인들은 ‘젖의 길'라는 뜻의 '비아 락테아(Via Lactea)'라 불렀다. 영어로는 '우유의 길(milky way) 또는 갤럭시(galaxy)이다. 중국에선, 은한(銀漢), 은하(銀河), 은하수(銀河水), <장자>에서는 하한(河漢)이라 말한다. 모두 '은빛으로 빛나는 강'이란 뜻이다. 우리 고유어로 '미리내'라는 말도 있다. 미르가 용(龍)이다. 미리내란 '미르가 사는 냇물'이라는 뜻이다. 서양은 젖으로 보고, 동양은 물로 본다.
그곳에 도착하자, 우리는 14처 '십자기의 길' 기도를 마치고 11시 수녀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전대사'를 받았다. 이 말을 이해 하려면, '희년'이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
2
유대인들에게는 희년(禧年) 제도(Jubilée)가 있었다. 희년은 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 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말한다.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이 때가 되면 노예를 석방하고 매매했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는,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 현재의 가난과 고통이 대를 이어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없으니 차라리 세대를 잊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0%대의 출생률로 떨어졌다. 수치이다. 그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빨간 불이다.
희년(禧年)은 ‘복된 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사야 61장 1-2절을 인용하며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7년마다 가진 안식년을 일곱 번 맞은 뒤 50년째 되는 해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을 선포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50년마다 희년을 기념한 것은 1300년부터다. 1475년부터는 누구나 한번은 그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주기를 25년으로 줄였다. 2000년 대희년 후, 정기 희년이 올해 2025년이다.
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12월 24일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성문을 여는 걸로 희년의 시작을 알렸다. 그 때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희년은 이 해가 진정으로 복된 해가 되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재생, 세계의 전환을 요구한다.” “산발적인 인류애 행위로는 충분치 않다. 지속되는 문화적· 그리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말은 자본주의와 현실 국제정치 속에서 별로 힘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양심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구라는 ‘공동의 집'을 이 만큼이라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25년 만에 다시 맞는 희년의 길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25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다. 이젠 '잘살아 보세'식 성장론은 멈추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안식제도를 이용해 약자들이 다시 기회를 갖는 제도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일곱 째 날, 안식일(sabbath)을 갖는다. 그것은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한다. 이것이 영어로 '사바스(sabbath)'라고 한다. 안식일은 '편히 쉬다'가 아니라, '강제로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강제로 멈추다'란 의미이다. '처음'으로 '리셋(reset)'하는 것이 방법이다. 개인 PC를 초기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대 지식인들은 양적인 시간이 아닌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그 일상을 새롭게 관조하는 습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조(觀照) 행위가 '안식일'이다.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어제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저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과감히 잘라내는 것이다. 그 것만이 우리를 다시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사바쓰’의 의미는 ‘강제로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라'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날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자신과 친밀해 진다. 우리는 이 친밀함을 집중 혹은 몰입이라고 말한다. 창의성이나 천재성은 이 친밀함의 표현일 뿐이다. 안식일은 고독을 실천하는 날이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사람들과 만나, 우리의 배역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절제를 수련한다.
3
로마 교황청의 2025년 희년 선포 칙서가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이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한 확신과 용기를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희년의 핵심 메시지를 '희망'으로 삼아 신자들이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나는 삶을 '시간 여행하는 순례(巡禮)'로 생각한다. 순례의 원래 의미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하는 일'이다. 내 삶을 그런 '순례'로 생각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일에는 엄정하지만, 현실에 투항한 채 되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나의 <인문 일지>로 후덥지근한 일상 속에 영원을 새기는 일이 순례이다.
지도조차 없이 걸어가야 하는 인생 길에서, 가야 할 길을 알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방향을 잃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예수를 길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눈이 열린 이들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다. 예수를 길로 삼은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해 벗삼아 살아간다. 얼 바람 맞은 사람처럼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예수가 보여준 길은
▪ 가슴 시린 이를 덮어주려는 마음을 가진다.
▪ 허방 다리를 짚은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준다.
▪ 메마른 세상을 걷는 이들에게 시원한 샘물 한 잔 대접한다.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만 있다면 모든 걸 만들 수 있다. 행복도, 진정한 평화도, 꼭 필요한 돈까지도" (피에르 신부)
'일상의 순례'라고 말할 때, '순례(巡禮)'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상의 여러 성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참배 함"이다. 왜 그런 거룩한 장소를 찾아다닐까? 그 이유는 다양하다. 초자연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감사를 표시하거나, 고행을 하기 위해서, 헌신을 위해서 등의 여러 가지 동기를 가지고 순례한다.
순례자는 순례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구도자(求道者, 길을 구하는 자)로 본다.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던져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앎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求道者)가 되는 거다.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어떤 점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이끌어가는 건 질문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좀비가 된다. 노인은 '꼰대'가 된다. 꼰대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단순한 반복은 반 생명, 즉 생명과 완전히 반대이다. 반복되는 똑같은 답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한 가지 더 잘 구분하고 분류하며, 알아간다.
순례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함순례 시인이 소환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시 한 편 을 공유한다.
다행이다/함순례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 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 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가운데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였다
4
'전대사' 이야기를 하려 다가, 너무 멀리 돌았다. 전대사(全大赦)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더라도 남아있는 죄에 대한 벌인 '잠벌(暫罰)'을 전부 면제해 주는 은총을 말한다. 고해성사로 죄는 사해지지만 '시간적 벌'로 남는 잠벌을 완전히 없애 주는 것이다. 전대사를 받으려면, 교회가 지정한 성지나 순례지만 방문하면 저절로 전대사가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전대사의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우선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로서 교회에서 파문처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 또 대사를 얻겠다는 의사가 있어야 하고 교회가 수여하는 대사의 취지에 따라 정해진 선행을 정해진 시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사를 얻기 위한 일반 규정을 지켜야 한다(교회법전 996조). 그 일반 규정이라는 것은 이렇다. 우선 죄에 대한 모든 애착을 배제하고 교회가 지정한 선행을 해야 한다. 또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지향을 위한 기도 등 조건을 채워야 한다.
5
미사 후 우리는 이 공주 수리치 골 성지 뒷산을 올랐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 신자(교우)들이 숨어 살던 곳으로 성모성심회가 조직된 뜻깊은 장소이다. 중국에서 사제로 서품 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1845년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페레 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수리치골로 피신했으며 성모성심회를 조직해 신앙활동을 이어갔다.
수리치라는 취나물이 많이 나는 골짜기라서 수리치 골이라 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기,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곳에 교우촌이 있었는데 그중 수리치 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흥미로운 곳은 공주, 청양, 홍성이라는 세 지역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박해 시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면 관아들을 피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경기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있던 미리내 성모 성심수녀회가 2012년 수리치 골 성지로 옮겨와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또, 신앙인들을 위해 피정의 집을 운영한다. 아름답고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신앙인들의 피정에 좋은 환경으로 개인 피정과 단체위탁 피정 모두 가능하며 연중 신청을 받고 있다.
초가을의 나무들이 잔뜩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임 총무는 '데꼴 로 레스(De colores)'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스페인어로 '색깔들' 또는 '다채로운 색'을 뜻하는 단어로, 특히 가톨릭 운동인 꾸르실료에서 사용되는 노래의 제목이다. 이 노래를 통해 봄에 들판에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을 표현하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신을 찬미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https://youtu.be/48vNfKUHWRw
한글판 노래
데 꼴로레스(빛과 함께)
봄이라 울긋 불긋 삼라만상 영롱하고 뜰 앞에 지저귀는 새들 또한 다채롭다. 저 너머 무지개도 눈 부시듯 찬란하다.
후렴: 이렇듯 다채롭기 그지 없는 만상과 주님의 큰 사랑이 내 맘에 들어요.
장닭이 소리높여 끼리 끼리 끼리 끼리 끼리 암닭이 받아 울며 까라 까라 까라 까라 까라. 병아리 뿅뿅 뛰며 삐오 삐오 삐오 삐오 삐오
6
오늘의 말씀은 <루카 복음>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이다. 원래는 어제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인데, 오늘 주일로 이동해 미사를 드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길을 걷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ㄴ)
길이 있으니
길을 걷습니다
길이 부르니
길을 따라 걷습니다
길이 걸으니
길과 함께 걷습니다
길이 앞서니
길 뒤를 걷습니다
길이 받치니
길 위를 걷습니다
길이 품으니
길이 되어 걷습니다
길이 있으니
길을 걷습니다
나는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따라 가는 길과 새로 만들며 나아가는 길.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고, 편하다. 그러나 없는 길을 내가 만들어가면서, 나아가는 길은 불안하고, 불편하고, 무섭고, 힘들다. 그러나 그런 길은 희망이다. 새로운 길을 나아갈 때, 희망이 없다면 나아갈 동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장자 식으로 하면, '도(道)는 행함으로써 완성된다'로 해석할 수 있다. 도라는 게 어차피 '말로는 못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려면 행동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이다. '다닌다'는 행위는 곧 실천이다. 고민만 해서는 , 말만 해서는, 길이든 도이든 이룰 수 없다. 도전해야 한다.
7
우리가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데,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헬라어 '바스타제인'의 번역어이다. 이 단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 이다. 구체적으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갈 때 이 동사를 쓴다. <<삶이 고통으로 휘청거릴 때>>에서 송봉모 신부님은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가는 것이다. 안고 가는 것은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물론 지고 가든, 안고 가든 짐은 짐이다. 그런 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바스타제인'의 느낌으로 어깨나 등으로 짊어졌던 짐들을 풀어 그것들을 품 안에 안는 자세로 바꾸어 보는 거다. 짐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자꾸만 점점 더 굽어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늙어가기보다는, 그 짐- 화나게 하는 것, 지치게 하는 것 -들을 눈 맞추고 자장가를 부르며 마음으로 아기를 안 듯 살포시 안아 보는 거다. 어쩌면 그 길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십자가>를 보면, 그에게 십자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십자가는 희생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십자가가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우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십자가는 영광이다. 그 사실을 알면, 십자가가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감사할 줄 안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쳐 소중하게 그 십자가를 품에 안고 살아가는 거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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