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19일)
1
"감각자본"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수집한다. 쓸모보다는 의미를 추구한다. 우리는 쓸모와 효율이라는 것에 우리들 자신이 지나치게 소비되고 있다. 오늘 날 소비는 필요가 아닌 의미를 사는 행위이다. 디자인, 스토릴 텔링, 브랜드의 정체성은 감성적 만족과 사회적 의미를 강화한다.
"감각자본"은 본질을 찾는 미학이다. 본질은 통한다. 화려한 트랜드도 결국 본질을 담아낼 때 오래간다. 브랜드이든 인간 관계이든, 본질을 아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시대와 취향을 넘어 통용되는 진짜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유행은 소비되지만, 본질은 축적된다. 여기서 본질을 꿰뚫는 눈은 시대를 예견하고, 문화를 선도한다.
축적된 경험이 곧 "감각자본"이다. 지금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소비하는 거다. 이를 존재 소비라 한다. 소유 소비는 지났다. 우리가 경제적 성장을 통해 물건의 결핍은 극복했다. 그래 소유 소비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버리는 일이 더 급하다.
일상은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가장 비범한 풍경이 된다. 똑같은 출근 길도, 커피 한잔도 관찰하고 질문하는 순간, 평범한 순간이 특별해 진다. 여기서 찾은 감각적 경험이 곧 자본이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자신을 찾는 거다. 그게 나만의 자본이다. '단독자 자본'은 대체 불가능하다. 좋아하는 영화, 술자리 대화,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 등 이 모든 것이 쌓여 나를 증명하는 일이다. 이게 인문적 삶이다.
대체 불가능한 것은 바로 개인의 고유한 감각 세계이다. 우리는 이제 이 감각이 자본임을 배워야 한다. 술과 음식, 영화와 책, 거리와 도시를 관찰하며 쌓아 놓아야 노년에 행복하다. 애정을 쏟는 모든 순간이 모여 나만의 독보적인 브랜드가 된다. 나이가 들면, 개인의 진정한 가치는 스펙이나 학벌처럼 눈에 바로 보이지 않는다. 남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서사와 시선, 자신만의 감각이 바로 이 시대의 경쟁력이다. 나만의 서사, 높은 시선, 나만의 감각, 즉 봉구가 내 정체성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소비가 내 존재를 증명한다.
▪ 어떤 브랜드를 선택하는지?
▪ 어떤 공간을 선호하는지?
▪ 어떤 경험에 돈을 쓰는지?
이것들을 보여주며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 내면, 그게 '나'이다. 개인의 모든 경험은 한 사람을 정의하고, 개인의 브랜드(PI)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나만의 안목이 나온다. 안목은 삶 속에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길러진다. 나의 취향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만의 가장 강력한 무기 감각 자본이 된다. 이 '감각 자본'을 프랑스에서는 '봉구(bon gout)'라고 한다.
2
프랑스 문화는 봉구(bon goût- 좋은 취향)이다. 프랑스어로 ‘구(goût)’라는 말은 ‘맛’과 ‘취미 또는 취향’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한국의 페스트 후드점 중에 ‘구 드 프랑스(goût de France)’라는 상점이 있어 ‘구’라는 말을 이미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구’라는 말은 ‘좋은 맛’ 그리고 ‘좋은 취향 또는 취미’라는 의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프랑스를 가장 특징짓는 말이 ‘봉구’의 다양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학 경험을 통해 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봉구(좋은 취향)이 없다'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봉구가 없다'는 말은 '천박하다'는 말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취향은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갖는 인간 다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좀 더 이론적으로 말하면, 취향은 인간 의지를 반영하는 자유로운 선택이고, 그 선택을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반영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잣대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유의 개념이 나온다. 봉구를 갖지 않고, 남의 것을 따라 하면, 하늘이 주신 나의 자유를 헌납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들은 남들이 한다고 자신도 따라 하는 것을 창피해 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유별난 것이 규범처럼 적용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인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획일성을 매우 싫어한다.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메뉴 주문을 획일 화 하는 것과 달리 프랑스 인들은 대부분 각각 다른 음식을 주문한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백 종에 달하는 치즈와 와인도 획일성을 싫어하는 프랑스 인들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프랑스 수도 빠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이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유행을 잘 따르지 않는다. 남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을 수치로 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하얀 드레스 셔츠에 짙은 색의 정장을 입고 근무하는 모습과는 달리 프랑스의 직장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뽐내는 옷차림을 하고 직장에 나간다. 프랑스의 회사원들은 ‘튀는 색깔’의 넥타이와 색깔의 조화를 이룬 콤비 차림이 대부분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는 직업도 유니폼이나 제복을 입어야 하는 거다. 예들 들면, 경찰, 군인, 신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인적 자유를 포기하며 늘 제복을 입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 종에 이르는 향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서양인들이 향수를 사용하는 이유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프랑스 인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한 장신구로 간주한다. 식탁에서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선택하듯이 그날의 기분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향수를 선택한다. 감각은 언제나 기억을 깨우는 열쇠이다.
게다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취향의 다양성이 잘 공존한다는 것이다. 서로 갈등 하기보다는 관용 정신으로 서로의 취향이 인정되고 있다. 프랑스 영화 중 <타인의 취향>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다른 취향이 부딪치지 않고 공존하는 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양성은 하나의 틀 속에서 적절한 에너지로 전환되어 프랑스의 힘을 이룬다. 예를 들면, <예술 축구>로 유명한 프랑스의 축구 팀이 내 품는 저력이 이러한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프랑스 팀에 흑인 선수들이 많은 걸 가지고 오해들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프랑스 축구팀의 특징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사회의 정체성이다.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다. 프랑스 축구팀 선수들은 다양한 출신의 부모들을 가졌지만, 그들 모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고, 프랑스에서 축구를 배운 선수들이다.
3
좋은 취향(bon goût, 프랑스어 봉구)과 교양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다. 관심과 경험으로 사는 거다. 돈보다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우리는 '문화 자본'이라고 한다. 예컨대, 돈 있다고 갑자기 옷을 잘 입는 게 아니다.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비싼 걸 입는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과 의복에 대한 교양을 아는 거다. 멋진 차림새는 TPO, 즉 시간(Time), 장소(Place 그리고 상황(Occasion)에 맞게 옷을 입는 거다. 그리고 색의 조화를 잘 맞추어 입는다. 젊을 때 문화 자본을 쌓지 못하면, 부자가 돼도 촌스러움을 버리지 못한다.
과거 귀족들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을 무시한 건 그들 특유의 계급 의식 때문 만은 아니다. 졸부 들에겐 문화 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많으면 여행을 쉽게 다닐 것 같지만, 여행은 늘 용기와 실행의 문제이다. 부자가 되었다고 원래 그런 게 없던 사람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채울 수 없는 문화 자본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쌓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많으면, 돈이 주는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가진 자'가 되기 위한 책은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약자를 배려하고 많은 사람이 사람 답게 사는 사회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주는 교양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교양과 좋은 취향(bon goût, 프랑스어 봉구)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다. 관심과 경험으로 사는 거다. 돈보다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우리는 '문화 자본'이라고 한다.
천박한 사람은 가격에만 관심이 있고, 가치라는 말을 모르는 자이다. 전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윤영관의 말을 공유하고 싶다. “한 번 밖에 없는 아까운 인생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지 꼭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 명예 권력 쾌락 승진 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의 노예로 살다 보면 몹쓸 짓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들의 삶이 풍요롭게 되도록 하는 게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이렇게 모인 감각은 단순히 취향을 넘어 나만의 안목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논리가 된다.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處事)를 우리는 '무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한다. 그 공부를 통해, 우리는 나 자신과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에 서의 공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경험적 혜안을 포함한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말은 무엇을 버린다는 말이다. 선택은, 깊은 생각을 통해, 그 과정과 결과를 상상하고 예측하여, 지금을 대하는 정교하고 엄격한 삶의 태도이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굳이 알지 않아도 되고,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정보들이 핸드폰을 통해 나의 사생활이 쉴 새 없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하루를 경계(警戒)하지 않으면, 그런 뉴스들로 나의 생각이 오염되고, 나의 갈 길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여기에서 나에게 최선인 것을 알아내는 능력이 안목(眼目)이라면, 그 혜안을 감히 실행하려는 행위가 용기(勇氣)이다. 우리는, 이 안목과 용기를 가지고, 선택을 하여야 한다.
<<감각 자본>> 저자인 김지수의 말을 좀 들어 본다. "선택은 반복되고, 반복은 흔적이 되며, 흔적은 곧 정체성이 됩니다. 그래서 즐겨 찾는 카페의 분위기, 자주 걷는 골목길의 질감, 반복해서 듣는 음악의 장르, 서재에 꽂힌 책들의 성격, 이 모든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을 구정합니다."
'안목(眼目)'은 사물의 좋고 나쁨, 진위, 또는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사물을 보는 지식과 식견을 바탕으로 한, 다시 말하면 견문과 학식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 분별력이며, 흔히 '안목이 있다', '안목이 높다'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다. 언젠가 써 두었던 글이다. 오늘 사진은 부추 꽃이다. 이걸 예쁘게 만드시는 분의 사무실에서 만난 거다. 이게 안목이다.
안목은/박수소리
안목은
사물을 보는 시선일 텐데
그것은 무엇엔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경험 과정을 통해 갖추게 된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어떤 이는 가격이 얼마인지
가늠하고, 어떤 이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찾는다.
똑같은 눈을 가졌어도 안목에 차이가
있기 때문같다.
이건 법정스님이 한 말이다.
안목의 차이는 삶의 경험과 직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법정 스님은 집중과 몰입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순수한' 이라는 기본 전제를 덧붙이셨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순수한 집중과 몰입,
순수한 것에 대한 집중과 몰입,
그것이 직관을 높이고
안목을 키운다고 본다.
4
복잡한 이 시대에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나 자신을 잘 유지하는 길은 모든 다양한 상황에 잘 적응하면서도, 나쁜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가치가 저마다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주변에서 만나는 파렴치한, 즉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른다. '돈 돈' 하며, 자신의 가치를 판다. 모든 가치를 인정하고 끌어 안아야 한다. 이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없다.
지난 달에 이야기 했지만, 가치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손을 트지 않게 하는 약은 쓰는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불균수지약 소용지이야(不龜手之藥 所用之異也)"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에 손 안 트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솜이불을 빠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약을 손에 바르면 겨울철에도 손이 트지 않아 솜 빠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한 나그네가 이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을 찾아와 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금 백 냥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가족과 친척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솜 빠는 일을 조상 대대로 해 오고 있지만 수입은 몇 푼 안 된다. 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단박에 금 백 냥을 받는다. 그러니 약 만드는 법을 팔도록 하자.” 이렇게 하여 금 백 냥에 약 만드는 법을 알게 된 나그네는 그 길로 오나라 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겨울철에 월나라와 싸우는 데에 이 약을 쓰도록 설득했다. 이 약을 바른 오나라 군사들은 손이 트지 않고 동상에 걸리지 않아 싸움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오나라는 크게 승리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오나라 왕은 기뻐서 그 사람에게 높은 벼슬에다 많은 땅까지 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다양한 방법으로 폭넓은 경험을 쌓고 지식을 탐구하며 사물의 본질을 사색하여 세상 원리를 이해하는 안목을 기르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존재적 경험과 배움의 기회를 갖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삶의 구조를 만들려면, 돈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돈을 버는 데 집중되었던 자원을 적절히 재배치 하여야 한다.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일들은 금전적 가치 외에 비금전적 가치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동과 관계를 의도적으로 늘려야 한다. 재화의 소비측면에서, '소유적 소비'보다 '존재적 소비'에 치중해야 한다. '존재적 소비'란 훌륭한 인물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다. 가까이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와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5
노자 <<도덕경>> 제52장에 나오는 "견소왈명(見小曰明)"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은 '조그만(小) 것에서 위대함을 볼(見) 수 있는 능력이 '현명(明)함'이라는 거' 뜻이다. "명(明)", 이건 밝을 ‘명’자라고 한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明)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명'자는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시비를 따지는 병폐를 고치려면 밝은 "명(明)"이 있어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일방적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거도 저것도' 본다는 말이다. 나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이 것만이라며 고집하고 그것을 절대 화하지 않는다. 안목은 여기서 나온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 말은 이것이라는 말은 저것이라는 말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이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저것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저것을 낳고, 저것은 이것을 낳는 셈이다. 아버지만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있을 수 없으므로 아들도 아버지를 낳는 셈이다. 아버지도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고, 아들도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다. 이렇게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방생(放生)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mutual production, Interdependence이다. 그러니 언뜻 보기에 대립하고 모순 하는 것 같은 개념들, 죽음과 삶, 됨과 안 됨, 옳음과 그름, <<도덕경>> 제2장에 열거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 우려면, 사물의 한 단면만을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옹고집과 다툼을 버려야 한다. 사물을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 즉 '조지어천(照之於天)'이고, '도의 지도리(도추道樞, pivot, still point)'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인시,因是)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마음(명,明)이다. 중세의 한철학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n)이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실재 그대로 그렇다 함이란 영어로 reality, 산스크리트어의 taahta(정말 그러함, 진여), 영어의 let it be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모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기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통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6
오늘의 말씀은 <루카 복음> 8,1-3"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 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함께 걷습니다/상지종 신부님
“그분과 함께”(루카 8,1)
“그들과 함께”(루카 8,2)
믿음으로
서로 스미어
당신과 나
우리가 되어
함께 걷습니다
희망으로
서로 돋우어
당신과 나
우리가 되어
함께 걷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보듬어
당신과 나
우리가 되어
함께 걷습니다
기쁨으로
서로 부둥켜
당신과 나
우리가 되어
함께 걷습니다
살림으로
서로 일으켜
당신과 나
우리가 되어
함께 걷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을 한문으로 말하면, '동행(同行)'이다. '동원'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번 민주당 대표 선거 결과를 보니 그렇다. 이젠 '동행(同行)'의 문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 '동원'의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동행'이라는 말을 하다 보니, 장자의 양행(兩行) 철학이 소환된다. 이 철학의 핵심은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 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나 '조사모삼(朝四暮三)'이나 결국 그 합은 7개로 같다. 장자는 이것을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너무 많이 소유하여 삶이 편안하면 방심(放心)하게 된다. (2) | 2025.09.20 |
|---|---|
|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프란체스코 교황)이다. (2) | 2025.09.20 |
|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한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친다. (0) | 2025.09.19 |
| 지부지상(知不知上):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0) | 2025.09.19 |
| 우리는 놀 줄은 알면서 쉴 줄은 모른다. (0) | 2025.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