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9일)
<<주역>> 독법에 중요한 개념이 '중(中)'과 '정(正)' 이다. 대성괘(大成卦)를 구성하고 있는 6효는 하괘와 상괘로 나뉜다. 하괘는 내괘(內卦)라고도 하고, 상괘는 외괘(外卦)라고도 한다. 하괘(내괘)의 정중앙은 二고, 상괘(외괘)의 정 중앙은 五다. 그래 제2효와 제5효를 ‘중(中)’이라 한다. <<주역>>에서는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三과 上은 二와 五보다 높은 자리이지만, 二와 五의 '중(中)'에 미치지 못한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처럼, 우리는 중간을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뒤로 돌아 갓”을 할 경우에도 별로 지장이 없다. 내내 똑 같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파를 많이 겪은 노인들은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신영복 교수가 중(中)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이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스타의 자리이고, 최고의 자리이다.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이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의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孤單)한 처지(處地)이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른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한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친다.
유가(儒家) 사상을 꿰뚫는 "중용(中庸)"의 사상이 이 <<주역>>의 중(中) 사상과 궤를 같이 한다. 매을 읽는 시대신, <<중용> 제1장을 공유한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 성에 따름을 <도>라 하고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
道也者(도야자)는 : <도>라고 하는 것은
不可須臾離也(불가수유이야)니 :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可離(가리)면 : 떠날 수 있으면
非道也(비도야)라 : <도>가 아닌 것이다.
是故(시고)로 : 이러하므로
君子(군자)는 : 군자는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하며 : 그가 보여지지 않는 곳을 조심하며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 그가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莫見乎隱(막견호은)이며 : 숨기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莫顯乎微(막현호미)니 :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故(고)로 : 그러므로
君子(군자)는 : 군자는
愼其獨也(신기독야)니라 : 그가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희노애락지미발)을 :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것
謂之中(위지중)이요 : 이것을 <중>이라 하고
發而皆中節(발이개중절)을 :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은 것을
謂之和(위지화)니 : 이것을 <화>라고 한다.
中也者(중야자)는 : <중>이라는 것은
天下之大本也(천하지대본야)요 : 천하의 큰 근본이고
和也者(화야자)는 : <화>라고 하는 것은
天下之達道也(천하지달도야)니라 : 천하가 도에 달한 것이다.
致中和(치중화)면 : <중>과 <화>에 이르면
天地位焉(천지위언)하며 : 천지가 여기에 자리잡고
萬物育焉(만물육언)이니라 : 만물이 여기서 자라나는 것이다.
맨 마지막 문장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육언이니라"가 <<주역>>의 정신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감정이 일어나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이에 '중'은 천하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이 되고, '화'는 천하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공통된 '도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제대로 육성된다고 하였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여기에 자리 잡고(位), 만물이 여기서(位) 자라나는 것이다. 내가 있는 자리(位)가 중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아침 눈길을 다시 준 것이, <중지곤> 괘 '육사"의 효사이다. "六四(육사)는 括囊(괄낭)이면 无咎(무구)며 无譽(무예)리라." 번역하면, '육사는 주머니를 매면 허물이 없으며 명예로움도 없을 것이다'이다. TMI: 括:묶을 괄, 囊:주머니 낭, 譽:기릴 예, 명예 예.
음이 네 번 째인 '육사'는 <중지곤>의 외괘 음자리에 위치하여 내괘의 세 음효를 잘 이끌어야 하는 자리이다. 나라로 친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대신이라고 볼 수 있다. '육사' 효가 변하면 음이 양으로 바뀌니 내괘는 곤(☷)이요, 내호괘(2, 3,4 효)는 간(☶)이요, 외호괘(3, 4, 5효)는 감☵이고, 외괘는 진(☳)의 상이 된다. <진괘>는 움직이는 것(震動也, 진동야)이다. 내호괘의 <간괘>는 그치는(艮止也, 간지야) 것이다. '움직이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다. '육사'가 동하여 양효가 되면 복주머니의 목을 조여 묶은 형상이 된다. 그래서 그 형상그대로 "괄낭(括囊)"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효가 동하여 변하는 것까지 살펴 볼 줄 알아야 <<주역>>을 잘 읽을 수 있다. 아니면, 내괘 곤(☷)의 백성을 간(☶, 산)의 두터운 덕으로 잘 감싸 안아야 하니 ‘괄낭(括囊)’이라 한 것이고도 한다. 두터운 덕으로 백성을 포용하니 허물은 없으며, 그 일이 '육사' 대신(大臣)이 해야 할 소명이기에 명예가 될 것은 아니다. "무예(无譽)"라고 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특별히 명예를 얻을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육사' 효가 변하면 지괘(之卦)가 <뇌지예(雷地豫)> 괘가 되는데, ‘예(豫)’는 즐거운 것이고 미리 예측하는 것이기도 하다. '육사' 효가 변하면 외괘가 진(☳, 뇌우)으로 발동하게 되어 즐거움이 지나치거나 혹은 예측한 바를 함부로 발설하여 흉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외호괘의 감(☵, 물)으로 ‘입 주머니를 매라(括囊)’고 하는 것이다. <<서괘전>>에서 "有大而能謙 必豫 故受之而豫(유대이능겸 필예 고수지이예, 크게 이루었도(<화천대유>), 겸손(<지산겸>)하면 반드시 즐거운 것이기에 <뇌지예> 괘로 받았다)"라고 했다. 제14괘 <화천대유> 괘, 제15괘 <지산겸> 괘, 제16괘 <뇌지예> 괘의 순서로 <지산 겸> 괘 다음에 <뇌지예> 괘를 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뇌지예> 괘에는 미리 예방하고 계획한다는 의미가 있다. 겸손함을 유지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주머니의 주둥이를 끈으로 졸라메듯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늘 삼가면 즐거움이 있으리라는 뜻이다. 흥미롭다.
<<주역>>의 음효와 양효가 어우러져 수성된 대성괘(6효의 모습)의 모양에서 효들의 조합, 아니 관계를 통해 이렇게 다양한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는 거다. <<주역>>은 개체의 능력보다. 개체 간의 관계를 읽어야 한다. <<주역>>의 독법에 관하여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위(位)인 것이다. 즉 ‘자리’이다. 어떤 효(爻)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양효라 하여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陽)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는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점은 없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 처지(處地)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그 운명도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고 하는 표현을 했다. '눈이 이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立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立場)'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處地)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의 이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곧 서구의 존재론(存在論)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關係論)이다. 이 문제는 여기서 멈춘다.
'육사' 효는 중지곤의 내괘에서 외괘로 넘어간 첫 자리이다. 내괘와 외괘, 하늘과 땅, 인군과 백성이 교류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다. 이에 대해 효상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象曰(상왈) 括囊无咎(갈낭무구)는 愼不害也(신불해야)라"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주머니를 매서 허물이 없는 것은 삼가면 해롭지 않은 것이다'이다. ' 육사'가 나라와 백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대신으로서 처신을 삼가 잘하면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니라 나라도 백성도 해롭지 않게 된다는 거다.
현대적으로 읽으면, 그러니 대신(중간자)은 '말을 조심하라, 적어도 해로움을 불러들이지는 않을 것'라는 말 같다. '주머니를 동여 맨다'는 것은 입 조심, 말조심을 뜻한다. <중지곤> 괘의 '육삼'에 나오는 "함장(含章)"도 '글을 머금고 있는 것이니 함부로 아는 체 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삼'이 동할 때, 지괘가 제15괘인 <지산 겸> 괘가 된다. "괄낭"은 "합장"의 강도를 더욱 세게 유지하는 것이다. 머금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끈으로 묶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 주목하는 단어가 "괄낭무구무예(括囊无咎无譽)"이다. 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이다. 아무리 태도가 겨손해도 말이 어긋나면 그 겸손함마저 무너지는 법이다. 또한 열린 주머니의 상에서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는 뜻도 있다. "괄(括)"은 '혀(舌)'를 손(手)'으로 막는 모습이다. 그래 오늘 아침 다시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소환했던 것이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서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감정이 일어나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이에 '중'은 천하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이 되고, '화'는 천하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공통된 '도리'가 된다고 했다. 단순히 '양 극단의 중간 개념'이 아니라, 사람에게 감정을 지나치게 이입하지 않을 때 고요한 중용의 마음 살아가는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괄낭"이다. 주머니를 동여매면, 즉 말조심하면, 허물이 없다.
그리고 "무예(无譽)"라 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특별히 명예를 얻을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유명세가 돈이 되니 너도나도 자신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된 세상에서 비켜나 있으면 평판을 얻기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나처럼, 글을 쓰고 강의하면서 꼭 해야 할 말을 열정적으로 쏟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다면, 둗이 자신을 특별히 드러내려고 애 쓸 필요 없다. 나머지 시간은 조용히 일하고 공부하며 사색하는 삶으로 충분하다. 거기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필요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타인은 내게 주었던 기쁨을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존재이다. "괄낭무구무예"의 지혜를 기억함으로써 인간 관계에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거리 조절을 잘 할 필요가 잇다. 그렇게 삼가면 해롭지 않고(愼不害也, 신불해야)고 공자도 말했다.
그래 나는 한자 성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공자가 한 말이다. '소인배를 대할 때 너무 가까이하면 다치기 쉽고, 너무 멀리하면 해코지하므로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어쨌든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이 거리 두기를 강조했다. 그는 "용기란 무모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은 상태라 했고, 절제란 방종도 아니고, 무감각하지도 않은 상태 그리고 관대 함이란 낭비도 인색도 아닌 상태이고 긍지란 오만하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것"이라 했다. 이 거리 두기가 인간들끼리 의 관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의 ‘사이’와 ‘사이’의 틈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단어도 한자로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을 쓴다. 좋은 관계를 ‘사이 좋다’고 우리는 표현한다. 좋은 사이란 뜨겁게 가까운 거리도, 차갑게 먼 거리도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36.5도의 따뜻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무수한 사이에 겨우 존재하는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 밤과 아침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 이해와 오해 사이 그리고 당신과 나 사이, 그 무수한 사이 속에서.
여기서 사이는 '거리 두기'이고 '틈' 아니 '간격'을 벌리는 데서 나온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공간과 시간, 내가 장악해야 할 순간에도 모두 간격이 있다. 인간, 시간, 공간, 순간, 모두 다 간(間)자가 들어간다.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이 절제된 간격이야말로 내가 너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표현이다. 그래 '간격', '틈'은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은 상대방과의 '틈', 아니 '간격'을 존중하는 연습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틈', 아니 '간격'은 상대를 온전한 인간으로, 대상을 온전한 세계를 가진 가치로 인정하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사랑하여 그 뜨거운 불꽃에 데이고, 그것이 두려워 너무 멀리 떨어져 얼음처럼 차갑고 외롭게 지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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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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