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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감동하고 칭찬하는 것보단 지적하는 게 멋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345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17일)

1
인간 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을 세 가지 관계 속에서 봤다. '나와 너', '나와 그것', 그리고 '그것과 그것' 이다. ‘너'는 서로를 인격으로 존중하며 깊이 만나는 2인칭 관계이고,  ‘그것'은 의미 있는 소통 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정작 그들을 ‘당신'으로 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수는 말씀을 전하시며 병든 이를 고치셨지만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제거하려 했고 군중은 무심히 지나쳤다. 예수는 그들에게 단지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를 너희의 ‘당신'으로 영접하라"고 외쳤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도 3인칭 ‘그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이 담긴 의미 있는 2인칭 ‘당신'이어야 한다. 우리가 인간 답게 사는 길은 하느님을 ‘그것'이 아닌 ‘당신'으로, 이웃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귀한 사람으로 대할 때 열린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앞만 보지 말고 내 곁과 위를 바라보는 눈을 지닐 때 비로소 참된 인간 다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광현교회 서호석 목사의 글을 갈무리한 것이다. 내 생각도 같다.

2
감동하고 칭찬하는 것보단 지적하는 게 멋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무언가를 날카롭게 평가하는 일은 ‘능력'이라 부르고, 평론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무언 가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좋은 점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능력으로 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가 그 일을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을 비난하는 ‘누칼협’이나 바닥에 떨어진 사람을 조롱하는 ‘나락밈’처럼 서로를 깎아내리고 타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고 혈안이 된 요즘은 오히려 좋은 점을 발견하고 경탄 하는 것도 능력이지 않을까? 그걸 우리는 ‘감탄 력(感歎 力)'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길 거리의 꽃들은 자기의 꽃 시절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자기 연민이나 비애 따위는 없다. 뿌리 내릴 약간의 흙과 물기를 만나 생명의 진수를 드러내는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바쇼의 하이쿠 하나가 소한된다. “자세히 보니/ 냉이꽃 피어 있는 담이었구나”. ‘- 구나’라는 감탄형 종결어미가 이 시에 정취를 더해준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일체의 마음을 버렸기에 터져 나오는 감탄이다. 냉이꽃 한 포기가 무정물(無情物)인 담까지도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이런 감탄을 촉발한 것은 ‘자세히 봄'이다. 할 일에 몰두하느라 빠르게 걷는 이들은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이들에게 그런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라고 했다. '세상의 모순에 눈을 감고 정신 승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더 높은 시선을 얻으라는 초대이다. 장대한 것, 무한한 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기에 우리 영혼은 가난하다. 시간의 폭력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의지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눈에 그냥 보이는 현상이 있는가 하면, 보려는 의지가 개입된 지각 활동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과거의 경험과 기억과 관련시켜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널리 알려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안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시각 정보에 갇히지 않고 그 정보 너머의 세계를 보는 것을 일러 통찰이라 한다. 매일 산책 길에 만나는 야생의 꽃들에 나는 감탄한다.


야생의 꽃/허만하

의미에서 풀려난 소리는 비로소 아름답다.
숲 속에서 새의 지저귐 소리 들어보라.
물에 비친 가지 끝 섬세한 떨림을 보라.
의미는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는다.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꽃나무.
지는 꽃잎은 소리를 가지지 않는다.
침묵의 배후에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들녘을 보라.
사람의 시선이 머문 적 없는 야생의 꽃들이 있다.
흰 색 가운데서 흰 꽃잎은 희지 않은 것 가운데서
흰 것보다 본질적으로 희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흰 꽃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이름 없는 들꽃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의 꽃가루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을 보라.
목숨은 역사 이후의 다른 별까지 날아간다.
지구가 사라진 뒤의 낯선 천체 위에서
꽃들은 바람도 없이 온몸을 흔들 것이다.
불멸의 언어처럼 인류를 추억할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날것의 아름다움


3
인문적 사유가 필요하다, 지금 납작한 정보를 수집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정보를 두툼하게 해석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걸 문해력이라 한다. '납작'의 반대가 '두툼'이다. 두툼은 입체적 생각을 하는 거다.

내 지론이다.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인간 모습을 했다고 모두 다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분류할까? 그 기준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 1 차원적인 분류: 점과 선으로 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세상과 인간을 보는데, 어느 지점에 있느냐의 문제로 위치하는 점을 찍는다. 예를 들면, 좌파냐 우파냐? 사실 이건 정도의 문제이지 어느 한 곳에 점을 찍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나 극우나 극좌는 자신은 물론 한 사회를 망가뜨릴 수 있다. 역사가 말해준다. 극우나 극좌가 다음의 인품이 저열하고, 인격의 수준이 천박하면 매우 위험하다. 최근 우리 사회가 그런 사람들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사실 좌파 또는 좌익(左翼, left spectrum)이니 우파 또는 우익(右翼 right spectrum)이니 하는 말은 정치 성향을 좌우로 분류한 체계이다. 대체로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을 좌익,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을 우익이라 한다. 이 말들은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 의회에서 혁명파는 좌측, 왕당파는 우측에 나뉘어 앉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념이 다양한 사회에서는 좌파, 우파의 구분이 대개 추구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좌익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평등을 위한 정부의 개입과 사회의 진보를 주장하고, 우익은 경제적 자유와 사회질서의 유지를 옹호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과두 지배하는 사회이다. 유럽의 다양한 정치 지형에 비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 해오고 있는 구도라는 말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것을 '수구(守舊)-보수(保守) 과두지배(oligarchy)라 불렀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 대 진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한다. 반대로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이 자유주의이다. 보수가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바로 가장 근원적인 공동체로서 민족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래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보수라는 자들은 민족을 경시하고 외세에 붙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일 뿐이다. 

▪ 2 차원적인 분류: 인간성의 문제로,  인품 또는 성품의 고(결)/저(열)로 나뉜다. 인간의 넓이로 면적인 2차원의 문제이다. 고매한 인품 아니면, 저열한 인품으로 나 뉜다. 그 기준은 타인과의 나눔, 베품 그리고 보살핌의 정도이다. 단순한 '고/하'로는 안 나눈다. 그건 지위나 신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결함이란 보자기에 싼 자선이다'는 말이 있다. 고결한 사람이란 남들이 보기에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결한 사람은 절제 되지 않는 이기적이며 동물적인 자신을 제어하는 자이다. 자신을 정복하는 자가 세상을 정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다.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울하지 않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고결(高潔, 성품이 고상하고 순결함)하다'고 한다.  

사람의 인성, 인간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나날이 노력하고 자신과 싸워서 얻어야 하는 덕목이다. 동물적, 이기적 인간(己)이 뜻을 정성스럽게 자신을 다듬는 과정(修己)을 통해 저열한 욕망을 이기고(克己), 함께 사는 법(禮)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인간 답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품성은 늘 신의 뜻을 물어 자신을 바로잡고, 그 뜻에 거스르는 바를 무찌르는 사람한테 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궁극의 인간 형이자 이상적 인격이다. '성(聖)은 축문을 읊으면서[口] 발꿈치를 높이 들고[壬] 신의 목소리를 듣는[耳] 일'이다. 성인은 사람 다움(仁, 사랑)을 완전히 체득해서 무엇을 하든지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루려 할 때 남을 이루게 한다. 자신이 서려고 남을 주저앉히는 일에는 인간이 없다." (장은수)

<미가서>가 도움이 된다. 여기서 선행이 무엇인 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내가 만난 신이 요구한대로 생활하는 것이다."(<미가서> 6:8) 이를 요약하면,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선행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tob)'인데, 이 말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라는 선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인향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매너,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 3 차원적인 분류: 인간의 깊이로, 그 사람의 교양의 수준이다. 심(오)/천(박)으로 나뉜다. 교양이 높고, 넓고, 깊은 사람을 우리는 심오하다고 한다. 그 반대가 천박한 교양 수준이다. 여기서 인격(품격)이 나온다.

멋있는 사람, 신사(紳士 단순히 말쑥한 차림새에 교양미,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춘 사람)의 조건은 자기 통제력, 정직성, 공정성, 원칙 준수, 유연성, 균형성 등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다.  넬슨 만델라, 호찌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남에게 모멸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응우엔 탓 단이 호찌민의 본명이다. 이는 성공한 사람이란 뜻이다. 호찌민은 깨우친 자란 이름이다.

한국 사회는 '가진 자'가 되기 위한 책은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약자를 배려하고 많은 사람이 사람 답게 사는 사회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주는 교양 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담론이 별로 없다. 나의 고민은 사람들이 인문 서나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다는 거다. 나에게 즐거움이나 돈을 벌고 출세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5
오찬호의 <<납작한 말들>>들을 그런 차원에서 만났다. 베스트셀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이후, 우리 사회의 민 낯을 용감하게 응시해왔던 사회학자 오찬호가 ‘모욕’과 ‘사이다’로 가득한 대한민국의 망가진 소통을 파헤친, 신작 <<납작한 말들>>에서 그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납작하고 게으른 언어에 의해 망가지는지, 능력주의와 생존주의가 어떻게 일상의 언어를 타고 흐르며 차별과 폭력을 공고히 하는지 이야기한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공주에 오찬호 사회학자 온 단다. 나도 거기에 참여할 생각이다. 지명훈 기자의 <오래된 질문>에서 저자의 대화가 있다. (9월 27일 토요일 오후 7시). 

'우리는 이미 세상을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 없다'는 단호함에 익숙해졌다. 빈부격차에 대해 지적하면 “북한에 가라”라는 빈정거림이 돌아오고, 비정규직의 고충을 이야기하면 “그런 일 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라는 조롱이 돌아온다. 생각과 언어의 간편함이 타인의 삶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는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사이다, 참교육, 긁혔냐?’ 같은 게으른 언어에 지친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 논쟁을 상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오늘 마씀을 대면할 시간이다. 오늘 말씀은 <루카 복음 7,31-3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내님처럼/상지종 신부님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4)

굶주린 벗들과
함께 배부른
먹보이고 싶다
먹보이신 내님처럼

움츠린 벗들과
함께 흥겨운
술꾼이고 싶다
술꾼이신 내님처럼

내쳐진 벗들과
함께 어울리는
벗이고 싶다
벗이신 내님처럼

맛있는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와인은 마음을 채운다. 그러면 지식을 깊이를, 인연에는 넓이를, 인생에는 향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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