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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8일)

<<주역>> 이야기를 하다가, 어제 다 하지 못한 '안분지족' 에 대한 사유를 좀 더 이어간다. ‘안분지족’은 노자 <<도덕경>> 제44장의 다음 문장을 소환한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만족을 모르고, 행복을 쫓는 사냥을 끝없이 펼치다 보면 결국 얻게 되는 건 불행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는 거다. '안분지족'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란 뜻이다. '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거다. 윤리적으로 인격이 높은 덕망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잣대로 오만(傲慢)에 빠지거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멋진' 삶이 아닐까?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분지족'의 소박함은 칭찬과 인정의 문제 와도 관련이 있다. 자신에게 귀속되는 양보다 더 많이 요구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화자찬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만족은 겸손을 갖추었을 때라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법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대개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행동, 어떤 계획, 어떤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한 처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취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비범함이다. 타인의 평가에 얽매인 채 끝없이 괴로워하는 것이야 말로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불행이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대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극단을 멀리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지 말고, 중용을 추구하는 거다. 소박하게 지낸다. 드높은 소나무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장 높은 탑은 더욱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며, 산꼭대기는 번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순풍이 불어 돛이 부풀어 오를 때 돛을 다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평안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니다. 본능적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안분지족’과 비슷한 성어로, 가난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있다. '안빈낙도'는 산 속으로 들어가서, 비록 가난하더라도 걱정 하나 없이 맘 편히 지내는 일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낙도(樂道)'이다. '안빈(安貧)'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볍게 사용하면, 삶 속에서 안빈낙도의 정신을 생산하지 못한다. '안빈낙도'라는 말은 <<논어>>의<옹야> 편에서 제자 안회를 평하는 다음 문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안회야, 너 참 대단하구나! 한 바구니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끼니를 때우고, 누추한 거리에서 구차하게 지내는 것을 딴 사람 같으면 우울해하고 아주 힘들어 할 터인데, 너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즐거워하는 바를 달리하지 않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가난함을 즐기는 태도보다, 가난함 속에서도 마음이 변하여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그 가난함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삶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에 탓을 하거나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굳건하게 잡은 후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고,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안빈'이다. 거기서 행복이 나온다.

다시 <건괘>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건'을 노자가 말하는 "도'의 개념으로 보면, <<도덕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도덕경>> 제5장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만물에 개입하거나 편애하지 않는다. 언뜻이 와 닿지 않는다. "천지불인"은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를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마치 자연의 작용은 때에 따라 특정 지역에 홍수나 지진 등 자연재해를 주는 것 같이 여겨지지만, 결국은 인간 삶의 전체적인 환경을 더욱 생기 있게 변화시켜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면서 자연, 천지는 질서를 만들고, 균형과 조화를 꾀핳 뿐이다.

그리고 제37장의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 도는 언제나 무위로 행함에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에서 말하는 '무위'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의도하지 않고, 그저 그러한 대로 모든 존재를 낳고 기르며 이루고 거두는 것이 하늘의 뜻이고, 하늘의 뜻을 박아 실행하는 땅의 자세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의 품에서 태어나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만물과 조화하고 균형을 이루며 다음 세대로 생명의 순환이라는 가치를 넘겨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오직 이(利)만을 좇아 불균형과 부조화의 세상, 파괴와 착취의 세상을 만들어 왔기에 끝(貞)의 도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를 이해하여야 '무위'가 이해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런 생각으로 제40장을 다시 읽어 본다.

反者 道之動(반자도지동) :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弱者 道之用(약자도지용) : 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有生於無(유생어무) :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어디로 되돌아가는가? '도'는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찾아 감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고, 나아가 그 존재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하게 해준다. '도'가 이렇게 만물에 찾아가 만물 속에서 작용할 때, 그리고 다시 만물과 더불어 그 원초의 자리로 돌아갈 때 그것은 부드럽고 은근한 모습으로 움직인다. 벼 이삭이 자라는 것을 보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이삭이 패고 열매가 영글어 가고 다시 누렇게 시드는 식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청천벽력처럼 갑작스럽고 요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쉼없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도'의 작용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보이지 않고 뒤에서 은은하게 일하는 '약함'을 그 특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약한 듯한 움직임의 작용에서 벗어날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어느 누구도 벼 이삭을 빨리 자라게 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이와 같이 약한 듯 은근하게 돌아가는 '도'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돌며 의연하고 늠름하게 살아 가는 거다.

이와 다르게 읽는 사람도 있다. 어떤 상황이 극에 이르면 반전(反轉)하여 거꾸로 전개 된다는 이런 우주의 존재 방식이 노자가 말하는 "반(反)"이라는 거다. 달이 가득 차면 어느 순간 '거꾸로' 기울어지고, 작아진 달은 다시 '거꾸로' 차오른다. 나를 낮추면 '거꾸로' 올라가고, 뒤로 물러서면 '거꾸로' 앞에 서게 된다. '거꾸로(反)'가 도의 운동 방식이라는 거다. 우주의 운행 원리는 '거꾸로'라는 거다. 인간도 이런 반전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거다. 같은 이야기지만, 약간의 뉘앙스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약(弱)한 것이 '도'의 운영 방식(用)"이라고 노자가 말하는 것은 강하고 센 것보다는 약한 것이 반전을 격발 시킨다는 것으로 본다. 강한 것은 결국 부러지고 고꾸라지니,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약"은 부드러움(柔), 비움(虛), 낮춤(下)을 총칭하는 말이라는 거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불교 용어를 소환한다. 이 말은 '내려놓아라, 내버려라'라는 말로 마음 속의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어이다. 마음속에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유지하라는 뜻이다. "착(着)"은 동사 뒤에 붙어서 명령이나 부탁을 강조하는 어조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방하착, 다시 내려놓고, 내버리리라. 나의 집착을. 오늘도 오차 없이 내 일상을 지배하고, 지금-여기서 나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9월이 후반부로 가는데, 아직도 여름 날씨이다. 빨리 9월다운 9월이 회복되길 바라며, 이해인 수녀님의 <9월의 기도>를 공유한다. 긹의 채송화도 힘들어 한다.

9월의 기도/이해인

저 찬란한 태양
마음의 문을 열어
온 몸으로 빛을 느끼게 하소서

우울한 마음
어두운 마음
모두 지워버리고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9월의 길을 나서게 하소서

꽃 길을 거닐고
높고 푸르른 하늘을 바라다보며
자유롭게 비상하는
꿈이 있게 하소서

꿈을 말하고
꿈을 쓰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춤추게 하소서

이 가을에
떠나지 말게 하시고
이 가을에
사랑이 더 깊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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