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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깨를 펴고 똑바로 앉고, 서거나 걷는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17일)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의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 이제 다시 그 책으로 돌아간다. 혼돈과 질서의 경계 위에서, 진정한 '존재'로서 영웅적 행위를 갈망하고 삶이 부과하는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나는 이번 연휴 기간동안 "삶을 위한 12 가지 규칙"들을 세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그 12가지 규칙들을 다시 한번 더 나열한다.

(1) 어깨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똑바로 앉고, 서거나 걷는다.
(2) 상대를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
(3) 나 자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난다.
(4)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자신하고 만 비교한다.
(5)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파하지 않는다.
(6)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한다.
(7)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택한다.
(8)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9)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자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0) 의견 개진을 할 때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11) 아이들이 스케이트보트를 탈 때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둔다.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준다.

오늘은 제1규칙 "어깨를 펴고 똑바로 앉고, 서거나 걷는다"가 왜 규칙이 되는가를 살펴본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다툰다. 예를 들어 새들의 노랫소리는 아름답고 평화롭게 들리지만, 사실은 '이 영역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사방에 알리는 위협의 함성이다. 다른 동물들도 지위와 영역에 집착한다. 흔한 닭들의 세계에도 '모이를 쪼아 먹는 순서'가 있다.

이러한 영역 싸움에서, 자신만만한 모습인가 아니면 위축된 모습인가는 신경 세포의 교감을 조절하는 두 화학 물질인 세로토닌과 옥토파민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바닷가재의 경우, 승리를 하면 세로토닌 비율이 높아지고, 패배하면 옥토파민 비율이 높아진다. 그럼 이들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세로토닌 수치가 높아지고 옥토파민 수치가 낮은 바닥가재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으스대며 걷고, 도전을 받아도 움츠리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반면 세로토닌 수치가 낮고 옥토파민 수치가 높은 바닷가재는 후줄근하고 무기력하고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긴 서열구조에 대해서 사회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성으로 보기 쉽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이 서열 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 낸 영속적인 특성이다. 승리한 바닷가재의 경우는 더듬이를 위협적으로 치켜세우고, 패배한 바닷가재는 모래를 뻐끔뻐끔 내뿜으며 사라진다. 그리고 이 승리자들은 틈만 나면 영역에서 지배권을 과시한다. 이러한 바닷가재의 모습은 매개체만 다르지 흡사 우리 인간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은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숙인 채 걷는 것, 자신감을 잃고 의기소침해지며 마음이 약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경우도 세로토닌의 수치가 낮으면 행복감이 떨어지고, 고통과 불만이 증가하며, 질병에 걸릴 위험도 커지고 오래 살 확률도 낮아진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 영역 다툼에서 패한 바닷가재가 용기를 되찾고 다시 싸움에 나설 때 승률은 또다시 패할 가능성이 일반적인 예상보다 더 크다. 인간 사회가 그렇듯이 바닷가재 세계에서도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마태(Matthew) 효과'라는 말이 있다. 로버트 머튼이 주장한 것으로, 처음에는 동일한 연구 성과를 놓고도 저명한 과학자들이 무명의 과학자들에 비해 많이 보상받는 현실로 명성과 보상의 불균형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이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25장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주장이라고 한다. 전체 인구나 기업 중에 상위 20%의 사람과 기업이 시장 전체의 80%를 장악한다는 '파레토 법칙'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점차 이런 법칙이 깨져 10대 90, 5대 95 법칙으로 변모하여 승자독식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우리 말로는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란 말과 같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도 물리적인 힘만으로 차지한 권력은 불안정하다. 동물학자 프란스 더 발에 의하면, 침팬지 세계에서 장기 집권에 성공한 수컷들은 육체적인 역량 못지않게 세련되고 지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다. 진화 이야기를 좀 한다. 생물학계에서 진리로 통하는 말이 '진화는 보수적이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자연이 이미 만들어 낸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새로운 특성이 더해지고 과거의 특성이 조금 변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진화는 대체로 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변이는 유전자 조합과 무작위적 돌연변이 등 여러 원인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같은 종이라도 개체가 각기 다르다. 그리고 자연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개체 중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개체를 선택한다. 그런데 이 자연은 정적인 동시에 역동적이다. 동아시아 철학에서도 존재 또는 실재 혹은 현실은 음과 양이라는, 대립하는 두 원리로 이루어진다. 이 음과 양을 서양에서는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혹은 암컷과 수컷으로 번역한다. 이를 혼돈과 질서로 볼 수도 있다. 다음은 동아시아 태극 음양도의 상징이다.

머리와 꼬리가 맞물린 두 마리 뱀을 감싸고 있는 원이다. 혼돈을 뜻하는 검은 뱀의 머리에는 흰 점이 있고, 질서를 뜻하는 흰 뱀의 머리에는 검은 점이 있다. 이렇게 표현된 이유는 혼돈과 질서가 언제나 나란히 존재하고, 서로 교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실제로 혁명적 변화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모든 죽음은 곧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자연 선택설에서 선택이라는 말에는 적응성(fitness)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적응성은 어떤 유기체가 자손을 남길 확률을 뜻한다. 적응성에서 적응은 환경의 요구에 유기체의 자질을 맞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환경의 요구를 정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면 자연이 변하지 않고 늘 같은 모습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화는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발전이 되고, 적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더 완벽해지는 현상이 된다. 이 주장은 자연 선택의 종착점이 고정되어 있으며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조금씩 개선되면 결국 자연 선택의 종착점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되는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정적인 행위자가 아니고, 매번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에 유리한 환경이 바뀌면, 원래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던 특성도 달라진다. 따라서 자연 선택설은 생명체들이 자연이 설정한 특정한 목표에 자신을 정밀하게 맞추어 간다는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체들이 자연과 함께 춤을 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나는 여기서 '춤을 춘다'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언젠가 나는 <인문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두었다. '대2병'이란 말이 있다. 이 병이 생긴 건 일정 정도 명문대 진학이라는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구로 착각한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 방황이다. 삶의 경험이 적은 10대의 아이들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고 그 안에서만 꿈꾸라고 하는 건 폭력일 수도 있다. '알고리즘'조차 통찰을 얻으려면 대량의 빅데이터(경험)가 필요하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사람들이 뇌과학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행복해지고, 머리가 좋아지는 질문이라 했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이 "춤 추자"라 했다. 뇌과학자들은 너무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다 작은 목표들을 여러 차례 달성하는 것이 더 큰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작은 구간 목표들을 설정해서 계속 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도파민 효과를 얻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춤을 배우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무엇보다 춤은 유연성을 가르친다.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은 1958년도 홍콩 차차차 댄스 선수권대회 우승자였다. 뛰어난 격투기 선수들의 몸은 단단하지만 유연하다. 실패와 무기력은 성공보다 더 쉽게 학습된다. 좋은 예가 있다. 조선업 불황으로 부모의 해고(解雇)를 지켜보고, 성적까지 바닥이던 아이들이 춤을 통해 작은 성공을 체계적으로 경험하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그래서 더 '과학적'이다. 아이들은 '전국상업경진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땐뽀걸즈'는 거제여상(女商) 아이들의 실제 얘기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은 좋은 선생님 옆에서 난 춤바람이 이 아이들을 살린 것이다. 오늘은 박형준 시인의 <춤>이라는 시를 공유한다.

춤/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 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 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 길 절벽 아래
꽃 파도가 인다

춤이란 원래 신나거나 흥겨울 때 추기 마련인데, 이 시는 첫 비행에서 죽음과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송골매의 날개 짓을 춤이라고 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파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속에는 해방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 가가 시작되는 느낌의 해방을 엿볼 수 있다. 억압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지나치게 믿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 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주인공 조르바에게 인생은 한바탕 추는 춤이다. 그에게 춤이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일단 술 한잔 마시라고 권한다. 그리고 함께 들이킨 다음, 자신이 나가서 춤을 출 테니 보라고 한다. 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춤을 추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관념 속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있는 자기 인생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는 인문 정신이다. 인문 정신 살아 있는 삶에 대한 찬미로부터 시작한다.

조르바에게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몸뚱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그 일에만 집중한다.  조르바처럼 생각하고 싶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존재는 마주하는 이 시간 속에 있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싶다. 무엇을 하던지 간에. 밥 먹을 땐 밥만 생각하고, 걸을 때는 걷는 것만 생각하고 싶다.

자연의 역동성 이야기를 하려다가, 춤 이야기로 샜다. 자연의 역동성은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다 해도 가만히 서 있는 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루이스 캐럴이 쓴 <<겨울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이 엘리스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네 왕국에서는 같은 자리에 있으려면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한단다."

자연의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뭇잎은 나무보다 빨라 변하고, 나무는 숲보다 빨리 변한다. 날씨는 기후보다 훨씬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변화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진화는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기초로 이루어진화의 보수성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 속에도 혼돈이 있고, 혼돈 속에도 혼돈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질서는 가장 변하지 않는 질서일 것이다. 그것 중의 하나가 옛날부터 생명체를 지배해 온 서열 관계이다.

이 서열구조를 사회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성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서열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영속적인 특성에 가깝다. 생명의 탄생 이후 우리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서열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서열 구조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뇌의 영역은 아주 오래전에 생성된, 뇌에서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다. 뇌는 인간의 지각과 가치, 정서와 생각, 행동을 조절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면을 지배한다. 그래서 패배나 실패를 경험한 인간은 서열 싸움에서 진 바닷가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자신감을 잃고 의기소침해지며 마음이 약해지고 불안함을 느낀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활기 없고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강자들의 먹이감으로 전락하기 쉽다.

인간과 바닷가재는 행동과 경험에서만 유사한 게 아니다. 기본적인 신경 화학도 여러 부분에서 똑같다. 이 문제는 일요일 <인문 일기>에서 공유한다. 우리의 주제인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존재의 부담을 자진해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삶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면 신경계가 완전히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예컨대 재앙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자연과 환경, 아니 상황이 끊임없이 바뀌듯, 우리도 변할 수 있다.

지난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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