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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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얀 이슬이 맺히는 백로(白露)였다. 백로는 24절기의 열 다섯째 절기로 처서와 추분 사이의 절기이다.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니, 이때 쯤이면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시기이다. '백로에 내린 콩잎의 이슬을 새벽에 손으로 훑어 먹으면 속병이 낫는다는 말도 있다.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은 때이다. 그러나 간혹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이 곡식을 넘어뜨리고 해일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할 때도 있다. 여름내 헉헉대 온 사람에겐 선선한 날씨가 자애롭게 느껴 지기도 할 것이다. 나무들도 단풍 준비에 부산할 것 같다. 어느새 벌겋게 불타는 가을 산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게 하기도 한다. 간혹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도 있지만 산 능선을 바라보면 언뜻언뜻 가을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2
제비는 남쪽으로 떠나가고 북쪽에 사는 기러기가 찾아오는 계절이 백로이다. 철새들이 먼바다를 건너 자리를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계절의 변화가 크다는 말이다. 백로부터 추석까지 열흘 남짓한 시간을 옛사람들은 가을볕에 포도가 익어가는 시기란 뜻의 '포도순절(葡萄殉節)'이라 불렸다. 투명한 이슬처럼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하니 들판에선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어갈 때이다. 가을 취(秋)자는 벼(禾)가 불(火)에 그을리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백로 무렵 들녘에 서면 뜨거운 가을볕에 무언가 익어가는 소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백로의 날씨는 산책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더위에 지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때를 지나 선선한 바람이 등을 밀어주면 조금 더 걷는다. 그러다 보면 높이 나는 잠자리를 보면 머리 위의 하늘이 어느새 높아진 가을 하늘로 바뀌었음을 느낀다. 여름내 세상을 꽉 채운 초록에 둔감했던 마음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달라진 것은 무엇이고, 여전한 것은 무엇인지 관찰하며 걷기 좋은 계절이다. 여름의 색이 빠져나간 자리에 어떤 색들이 내려 앉기 시작했는지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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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에 산에 오르면 다람쥐나 청설모들이 꼼꼼히 발라 먹고 버린 잣송이가 눈에 뛴다. 비늘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씨를 빼 먹고 남긴 앙상한 모양새가 사람 눈에는 '새우 없는' 새우튀김으로 보인다. 다음은 구글에서 가져온 <새우튀김 자랑대회>에 게시된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면, 진짜 새우튀김 같다.

그리고 아직 덜 여문 도토리들이 가지 채 떨어져 있다. 쭈그려 앉아 모자(깍정이)가 붙어 있고 모양이 비교적 성한 것들을 골라본다. 모양이 마음에 들지만 모자가 떨어져 나간 도토리가 있으면 근처를 살펴, 바닥에 흩어진 빈 모자들을 하나하나 쓰워보고 맞는 모자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김신지 작가는 이것을 "가을 모자 쇼핑"이라 불렀다.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는 땅속에 어느 정도 묻혀야 혹한을 견뎌내고 이듬해 싹을 틔울 수 있는데 이때 도움을 주는 건 숲의 동물들이다.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다람쥐나 청설모, 어치 등이 도토리를 땅속 여기저기에 숨겨두지만 곧잘 숨긴 곳을 잊어버리기도 해서, 그렇게 '잊힌 도토리'가 다음 해 싹을 틔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 참, 도토리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의 열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한 종류의 '도토리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열매를 모두 도토리라 부른다. <나무>라는 시를 한 편 읽고, 참나무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무/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 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 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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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중 참나무야 말로 '아낌없이 주는 너무' 이다. 재질이 다른 나무보다 종아 옛날부터 곡괭이, 쟁기 같은 농기구나 수레바퀴, 배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 태워서는 '참숯'이 되어 끝까지 쓰였다. 이처럼 유독 쓰임이 좋아 '진짜' 나무라는 의미에서 '참'이 붙었으니 다른 모든 나무를 가짜 나무로 만들어버리는 그 패기 넘치는 이름에서부터 조상들의 편애가 느껴진다.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 역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양식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을에 사또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도토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전국 곳곳에서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된 것은 그런 연유라고 한다.
초여름에는 '입 하얀 꽃'의 이름을 알아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면, 가을엔 도토리 구별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다음 사진을 공유한다.

김신지 작가의 구별 방식이 쉽다. '털모자 3형제 대 베레모 3형제 구별법'이다. 삐쭉삐쭉 풍성한 털모자를 쓴 건 상수리, 굴참, 떡갈 나무 열이고, 야무지게 멋 부린 베레모를 쓴 건 신갈, 길참, 졸참 나무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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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숲길을 걸으며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젠 참나무 이야기를 해 본다.
- 상수리나무: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떠나 도토리묵을 먹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수라상 맨 위에 오른 도토리'라는 뜻의 '상수리'라는 이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피난 길에 먹을 것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이 먹던 음식을 임금께 올린 것인데 선조가 이를 아주 맛나게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 신갈나무: '새로 난 잎의 색'이 갈색을 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신발 밑창설'도 있다. 옛날 나무꾼들이 숲 속에서 나무를 하다 짚신 바닥이 해지고 닳으면 '신' 안에 이 잎을 '깔;아서 신었다는 것이다. 다른 잎들에 비해 맨발에 닿아도 부드럽고 잘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이라 애용되었다고 한다.
- 떡갈나무는 '신'이 아니라, '떡'에 깐 것이다. 시루떡을 찔 때 시루 밑에 떡갈나무 잎을 깔고 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떡갈나무 잎으로 떡을 감싸서 찌기도 했는데, 뒷면의 털이 방부 작용을 해서 이렇게 찐 떡은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고 한다.
- 굴참나무: 나무껍질의 골이 유난히 깊다 해서 '골참'이라 불리다 '굴참나무'가 되었다. 산간 지방에서는 두꺼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굴피집)을 지을 때 사용했는데, 굴참나무 껍질은 유난히 보온성이 좋고 비가 좀처럼 새지 않아 유용했다고 한다.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도 이 굴참나무 껍질이다.
- 갈참나무: 가을이 끝날 때까지 제일 오래 단풍 든 잎을 달고 있어서 '가을 참나무'라는 말을 줄여 갈참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 졸참나무: 참나무 종류 중 잎과 열매가 가장 작아 '졸(졸)'을 붙여 졸참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원래 작은 것이 진국인 법이다. 졸참나무 도토리는 다른 도토리에 비해 떫은 맛이 덜해서 묵을 만들면 맛이 제일 좋기로 알려져 있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다면 계절마다 '아는 행복'을 다시 느끼는 거다. 봄에는 봄에 해야 좋은 일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이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다. 제철을 즐기는 거다. 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좋은 일들이 많다. 제철은 '알맞은 시''이란 말이다. 장마가 지나면 수박은 싱거워진다. 때를 지나 너무 익은 과일은 무르기 시작한다. 다 제철이 있다.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이다. 비 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거다. 김신지 작가의 <<제철 행복>>을 읽고 한 생각이다.

김 작가가 제안하는 백로 무렵의 제절 행복을 공유한다.
- 가을 숲에 찾아가 도토리 6형제를 구별해 보기
- 도토리 묵 즐기기
- 주변에서 다람쥐나 청설모가 만든 새우 튀김 모양의 솔방울 찾아보기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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