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4일)
연휴 기간동안 우리는 많은 가족들을 만난다.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통 명 강사’ 김창옥은 가족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방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디스’하지 말라고 권한다. ‘자세와 태도’가 좋은 관계의 90%를 차지한다. 우선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가르치려 하지 말고, ‘디스’하지 말라. 좋은 자세와 태도를 갖추려면 ‘예의와 존중’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거다. 오늘과 내일에 걸쳐 이 문제를 집중 사유해 본다. 이 번 추석 연휴에 적용해 볼 생각이다.
그 전에 사랑에 대한 정의를 잘 익혀야 한다. 예절은 사랑에서부터 온다. 예절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목생화(목생화)라는 '음양오행 리론'에 따른 것이다. 사랑이 예절을 낳는 거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 결핍이나 얼크러진 욕망을 사랑이라고 잘못 말하는 거다. 진짜 사랑은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거다. 이걸 '황금률'이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골든 룰'이다. 인간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관계에서 지켜야 할 최고의 중요한 규칙이란 뜻이다. 예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더 나아가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했다. 불교에서 자비라고 하고, 흔히 인문학에서 연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어로 말하면, compassion이다.
자비, 아니 연민은 예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walk to Emmaus)>(누가복음 제24장 13-35절)에 나온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 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긍휼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그러면 '낯선 자'가 예수이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그 때 예수가 사라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 예수라 부르라는 것이 아닐까?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걱정과 유혹이 너무 강해서 눈이 멀고 뜨거움이 식고 말았다. 예수에 대한 뜨거운 체험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고 본다.
연민(compassion)을 말하다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소환된다. 붓다는 인간 마음의 가장 숭고한 상태를 산스크리트어로 "브라흐마비하라"라 했다. 숭고함이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의 선과 악을 넘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한없는 경외심이 넘치는 단계다. 숭고함의 의미는 '셀 수 없는/경계가 없는'이다.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셀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4단계 태도: 자비희사'라고 한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어렵다.
(1) 자(慈)=마이트리(maitri, 산스크리트어)=헤세드(hesed, 히브리어)=아가페(agape)=참된 사랑.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을 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랑의 초점은 상대방에게 있다. 만일 그 초점이 자신에게 있고 상대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다.
▪ '자'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려는 마음이다. 한자 '자(慈)'를 해석하면,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가물가물(玄)해져,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이트리, ‘자’는 소극적으로 내가 타인을 내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조성하는 작업까지 포함하는 큰마음이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숨은 노력이자 배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향한 마음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한없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 인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어머니로부터 부여 받아 각자의 심연에 간직하고 있다. 교육이란 이 심성을 체계적으로 일깨우는 자극이다.
(2) 비(悲)=카루나(karuna)=compassion(연민).
▪ ‘비’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태도이다.
▪ 더 나아가 상대방이 당한 상처나 고통을 함께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거나 제거하려는 마음과 행동이다.
▪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비'는 그런 감정 이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동일하게 느껴, 그 상대방을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 시키고 싶은 마음과 행동이다. 영어로 ‘컴페션(compassion)'이다. 이 말은 상대방의 고통(passion)을 기꺼이 함께(com) 나누려는 마음이다.
▪ ‘카루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걱정, 근심, 슬픔, 불행을 자신의 일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상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은 대자심이 아니라, 대비심이다.
▪ 상대방의 슬픔에 동참한다.
▪ 상대방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조치를 취한다.
▪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 옆에 앉아 말없이 그의 슬픈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희(喜)=무디타(mudita)
▪ '희'는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행복처럼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 그리고 상대방이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노력이다. 실제는 카루나보다 더 힘들 수 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겠는가? 상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다.
▪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아상(我相, 나가 있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친구, 동료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사람의 성공을 시기나 질투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면, 무디타란 숭고한 감정을 소유한 자이다.
(4) 사(捨)=우펙샤(upeksha)
▪ ‘사’는 버린다는 것으로, 마음에 집착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련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주위에 일어난 유혹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정진하는 의연함과 자신감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갈 뿐이다. 고생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볼 때 느끼는 그 감정이다.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정상에 올라온 사람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마음의 태도이다.
▪ 그리고 사람의 배경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 특권 의식이나 선민 의식을 없애는 것이다. 그냥 무덤덤하게 대하는 마음은 아니다. '자비희(慈悲喜)'를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내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사무량심'으로 무장한 사람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속에 쾌적을 유지하는 자이다. "요가 수련자의 마음은 자, 비, 희, 사의 실천을 통해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하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사실 어떤 사건이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없다. 이런 감정들은 그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일 뿐이다.
사랑하려 거든/류인순
고슴도치같이 사랑하라
서로 소유하려 들지 말고
너무 가까이 가려 하지 말고
욕심에 가시 털 세우지 말고
서로 찔려 상처 생기지 않게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며
가슴으로 사랑하라
영원한 평행선으로
쉬어 가는 간이역에 앉아
함께 숨 고르며
손잡으면 닿을 수 있는
그만큼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주고받는 속삭임만으로
서로의 온기를 잃지 않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사랑하려_거든 #류인순 #관계의_자세와_태도 #사무량심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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