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6일)
1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의 말을 나는 늘 기억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읽는다. 나는 '구부릴지 언정 쓰러지지 않는다'고 늘 다짐하며 일상을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삼 시인의 ‘어부’라는 시를 먼저 공유한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어부(漁夫)/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시인은 바닷가에 매어둔 고깃배를 보고 마치 그 배의 이력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고깃배가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 고깃배에 타고 고기를 잡았을 ‘어부'가 하는 말이다. 바닷가에 매어두었지만 지금도 고깃배는 바닷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흔들린다. 바닷물은 이렇게 고깃배를 잠시도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치 세파에 흔들리는 우리네 삶과 같다. 그러니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 바닷가에 매어 있는 것이다. 바로 "화사한 날을 기다리"면서.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모두는 "화사한 날을 기다리"는 " 고깃배"라고도 생각했다. 지금 어려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는 힘을 가른다. 그 "화사한 날"이 오면 어부는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 중얼거리고 싶어한다.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이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이다. 오랜 만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시 속에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어부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바다 그리고 노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상어와 싸워 비록 청새치의 살점은 빼앗겼을 망정 이기고 돌아온 노인, 온갖 역경을 헤치고 돌아온 사람이 되고 픈 것이다. 그렇게 바다의 ‘노인’이 되면 중얼거리고 싶은 말이 있다. 중얼거림 – 크게 소리쳐 외치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 그럼에도 꿈이 있다. 그 꿈이 중얼거림으로 나타난다. 바로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 중얼거리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인간이 태어나는 것부터 기적이다. 몇 억 분의 1이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껏 살아온 것 또한 기적이다.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많은 출렁거림 속에 부대 끼며 지내왔는가? 그럼에도 지금 살아 있다. 그것은 기적이다.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면 살아갈 날도 기적이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기적을 이루며 살다 보면 기쁨이 있지 않겠는가?
2
삶의 본질적 조건, 곧 시련과 맞서는 현실이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큰 파도에 흔들리고 있다.
▪ 복잡한 외부 환경과 경제적 불확실성,
▪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
▪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문제가 쉼 없이 몰아치고 있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희망과 의지이다. 시련은 거센 물결이 돼 예고 없이 몰려오기도 하고, 어렵게 잡은 청새치를 빼앗으려는 상어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다 잡은 성취가 물거품이 되고 결과가 기대와 달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패배하지 않는다. 그 믿음이야 말로 불확실한 시대를 건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버팀목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되새김 한다.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하루하루 조금씩 이어가는 노력, 오늘 다시 한번 일어서려는 결심, 내일을 향한 작은 도전 속에 깃들어 있다. 마침 가을을 맞아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글 판이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최승자 시인의 <20년 후에, 지(芝)에게> 속 구절이 걸렸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 란다.” 고단하고 지치는 삶일지라도 하루하루 힘내서 이어가다 보면 아름다운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서로 응원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자는 가을의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더욱 깊숙이 다가온다. 조금만 더 힘내자.

3
그리고 언젠가 적어 두었던, 한 스님의 다음 글을 읽고, 아침에 희망과 평온을 되찾았다. "부정적인 쪽으로 눈을 돌리다 보면 모든 생각이 불행한 삶으로 이끌려가며, 불안감이 더해져 결국 우울증에 이른다." 실제로 "긍정과 부정은 한 단어만 다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그 차이는 크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삶을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도록 하고, 불행과 좌절을 낳게 한다. 긍정적인 생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취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아닌 인내와 용기를 가진 자세다. 불교의 인연법으로 본다면 부정 속에 긍정이 있고, 긍정 속에 부정이 내재해 있다. 그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과 연이 모여 현상을 이루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칠곡 동명 정암사 주지이신 대현 스님)
내가 최근에 터득한 깨달음은 '모든 대상이 무상(變化), 무아(非實體), 즉 공(空性)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통찰 하는 상태가 되는 거다. 그리고 이어 그렇지만 '모든 대상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아차린 상태'이다.
인연 이야기를 좀 소환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이 헤어지면 모든 것은 소멸한다.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보는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인'보다 '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발생하면, 간접적인 조건인 '연'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 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대현 스님의 새에 관한 이야기도 힘을 주었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만들어진 대로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유달리 새들 만이 입이 쀼루퉁하게 튀어나와 있다. 새들은 어느 날 스스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다른 동물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주면서 우리에게는 왜 나무젓가락처럼 가늘고 못생긴 다리를 주며, 왜 다른 동물은 튼튼한 팔을 주면서 우리에겐 왜 양 어깨에 날개라는 무거운 짐을 주는 건지.' 그러던 어느 날 누군 가가 새들에게, 무거운 짐이라 생각하는 날개를 쫙 펴보라고 했다. 새들이 거추장스럽던 날개를 펴고 힘을 주자 몸이 가벼워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원망했던 마음은 어디론 가 사라졌다. 새들은 그제서야 자신이 남보다 어려운 것만 가진 것이 아니라, 남이 없는 특별한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에 젖었다는 얘기다."
스님은 "새들 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도 끝없이 어리석다"고 했다. "인생의 날개를 달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도, 내 안에서 진짜 나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에서 힘겨움은 시작된다"는 거다. 그 힘겨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인생과 교감을 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고 했다. 내 스스로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돼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족과 친구들, 나에게 부여된 책임과 일들, 이겨내야 할 고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인생의 날개를 찾고 날 수 있을 것이다.
4
나는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매일 <인문 일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 발산(發散)이 되고, 그 양만큼 수렴(收斂)하는 시간이 요구되었고, 그만큼 독서와 관찰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또 그 만큼 안목과 시선이 높아지고, 세상에 대한 문해력이 늘어났다. 이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통해, 나는 또 그만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마음도 평화롭다. 더 나아가,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 만의 임무를 깨닫게 되고,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이게 삶의 성숙이 아닐까?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뀐다.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뀐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바꾸지 않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목표를 잃는 것보다 기준을 잃는 것이 더 큰 위기이다. 인생의 방황은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成熟)이다.
지금은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로부터 '생각이 힘'인 시대가 되었다.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가치들은 생각하는 힘으로부터 나오고, 일상에서의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지금까지의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상상력, 창의력, 혹은 기획력, 문제해결력 등 생각하는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래 아침마다, '사명'처럼 쓰는 <인문 일지>를 통해 이 시대에 중요한 자산인 ‘생각의 힘’을 북돋우고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정보의 시대에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짐'이 되지 않을까 해서, 공유하는 사람들의 수와 글의 양을 줄이기로 했다. 대신 원하는 사람들은 내 블로그로 방문하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의 생각이 또 하나의 생각과 만나 깊고 다양한 생각의 숲을 이루는 ‘생각의 숲'을 키우고 싶은 것이 내가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다.
5
원하는 것을 이룬 밤, 문득 이 기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불길함이 그림자처럼 스칠 때가 있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 가면>>에서 우리가 가장 취약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벅찬 기쁨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이 가득 찬다면, 그 기쁨이 온전한 나의 것일 수 있을까? 행복은 은행 통장처럼 저축해 두었다 언제든 인출해 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행복은 늘 ‘순간'이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금세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
침습적인 슬픔과 달리 기쁨은 왜 지속되지 않을까? 질문해본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위험을 감지하고 불안을 느끼는 능력을 진화 시켰다 한다. 불행에 대비하는 게 종족 보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은 서서히 퇴화했다는 거다. 더 기이한 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는 기괴한 밸런스 게임이다. 기쁨을 감추면 고통도 적게 느낄 것이라는 인생 총량의 법칙 같은 것으로 “기쁨을 적게 누리는 대신 고통도 덜 느끼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쾌락으로 기쁨을 대체한다.
소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에게 기쁨은 “진주 알들이 하나 씩 한 줄로 꿰어지듯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파민 같은 자극에 익숙해져 소소한 기쁨을 자주 놓친다. 브르네 브라운은 위의 책에서 감사가 ‘기쁨 차단하기’의 해독제라고 말하였다. 맞다. 기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감사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진 것에 감사하자. 나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내가 이룬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고 거기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면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살거나,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거나.” 우리에게는 후자가 필요하다. 유지되기 힘든 기쁨을 고집스레 키우는 능력 말이다. ‘나는 늘 부족하다’는 마음속 불안을 내려놓고, 기쁨을 차단하는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무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기쁨과 행복도 용기가 필요하다. "마음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내게 온 기쁨과 행복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 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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