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8월 8일)
인간은 '사이'의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사건들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앞발이 손으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땅에서 벗어난 손은 뭔가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손은 뇌로 연결된다. 손이 하는 모든 행동과 창조는 뇌신경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얼굴이 탄생한다. 동물은 얼굴이 없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다. 미안하지만, 그냥 우리는 '대가리'라고 한다. 머리와 얼굴이 구분되는 건 인간 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후두부의 발달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 얼굴은 곧 말이다. 인간은 직립하고, 관찰하고, 말을 구사한다. 이게 호모 사피엔스이다. 그코로나-19 팬데믹 기간동안, 그 호모 사피엔스가 마스크로 얼굴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마기꾼’이라는 말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기꾼'이란 말이다. '마스크를 쓴 얼굴만 보다가 벗으니 기대만큼 매력적이지 않아 실망스럽다'는 뜻이었다.
오늘 아침 얼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 주에 받은 방통위원회 위원장 임명 청문회에서 본 이진숙의 얼굴 때문이다. 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것은 청문회에서 보여준 그의 특이한 인격적 면모와 그의 얼굴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주식, 금융 거래 내역 등 기본적인 자료 제출의 거부도 전례 없는 일이지만, sork 살고 있는 대전MBC 사장 시절의 상식을 넘는 법인카드 사적 유용 사례와 그에 대한 부인 일변도의 황당한 답변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타락이 얼굴로 나타났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 이르면 설사 대통령의 임명 강행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당한 변명과 마지못한 사과로 시간을 끌며 유야무야 청문회 일정을 소비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한마디 변명도 사과도 없이 마치 핍박 받는 비극적 영웅이나 투사의 얼굴을 하고 버텨 나갔다. 그것도 법인카드 사적 유용이라는 매우 파렴치한 행태를 묻는 장면인 데도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인격이 가능할까? 아마도 좌파에 장악된 공영방송을 다시 뺏아오겠다는 극우적인 공적 사명감과 어떻게든 더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사적인 욕망이 상승적으로 뒤엉킨 결과 이런 괴물에 가까운 엽기적인 인격이 주조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그런 인격의 실재를 직접 목도하는 것은 자못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런 인격이 비단 이진숙이라는 공직후보자 한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칼럼("이진숙의 얼굴")을 읽고 그 충격을 이해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라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는 어떤 다른 준거가 없는 유아론적 이상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인지 못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정신분석학 입문>>에서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일차적 나르시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나르시시즘을 이해하려면, 리비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자아, 에고(ego)는 수퍼에고(super ego)와 리비도(libido) 혹은 이드(Id)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을 의미하는 슈퍼 에고와 본능과 충동의 세계인 리비도 혹은 이드 사이에서 흔들리고 동요하는 불안한 존재가 바로 에고, 자아이다.
나와 남을 구별 못하는 유아기의 어린 아이는 자기와 세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아를 향한 ‘자아 리비도’를 대상을 향한 ‘대상 리비도’로 전환하는 활동 능력 이전에 머물러 있어서 자신이 세상과 ‘하나’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차 자아 리비도를 대상 리비도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더불어 세상과 적절한 교감을 이루며 자기와 세상 간의 긴장 관계를 형성해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떤 심리적 요인이나 환경에 의해 리비도가 대상에서 자아로 전면 철수하면서 나타나는 퇴행 현상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됨으로써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프로이트는 편집증이나 정신 분열증 혹은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심기증(心氣症, 건강 염려증) 등의 환자들이 상실감에 젖게 되면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다시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병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과도하지 않은, 절제된 자기 사랑이다. 이것은 자신감, 자존심, 명예 의식, 희망, 이상을 낳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지나치면 병적인 나르시시즘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대상 앞에서 자기를 지나치게 들어내는 ‘파괴형 나르시시즘’과 대상 앞에서 지나치게 움츠려 드는 ‘리비도 나르시시즘’으로 각각 분류된다.
(1) '파괴형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능력과 특수성을 과대평가하는 한편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또한 자신의 장점에는 거만함을, 타인의 장점에는 강한 질투심을 드러내며 항상 과장되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2) '리비도 나르시시즘'은 타인의 거절이나 비판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또한 감정이 지나치게 연약하여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세상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자아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후퇴하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밑바닥에는 심리적 공허와 절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 간의 공존이 선사하는 참된 자기 사랑과 자기 확신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병적인 나르시시즘은 닫힌 마음에서 온다. 세상과 타인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는 사람은 병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사람들은 타인을 타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 이입 능력이 모자란다. 감정이입이란 바로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나르시시즘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부모가 어느 정도는 아이들이 '타인'이며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독립체임을 적절히 인정하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대신 자신의 일부로 여긴다. 이는 마치 좋은 옷과 예쁘게 깎인 잔디와 멋진 자동차를, 세상에서의 지위를 나타내 주는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분리된 개체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각각 실현시켜야 할 개별 운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분리 문제는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된다. 개인의 목적과 역할이란 관계, 집단, 다수,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단지 국가의 운영만이 고려되고, 개인의 운명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믿는 것과 관계, 집단, 다수, 사회를 희생하더라도 개인의 운명을 지지하며, 고아들이 굶주릴지 모르지만 사업가는 자기가 주도한 일의 모든 열매를 즐기는 것을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분리에 관한 주장은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다. 개인의 건강은 사회적 건강에 의존하듯이 사회의 건강도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건강에 의존한다.
나르시시즘 이야기가 길었다. 다시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 이야기로 돌아온다. 근대세계 자체가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신화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가 개인을 거대 이념이나 윤리적 공준, 공동체적 가치 등에서 분리된 고독한 자기경영주체 혹은 소비주체로 환원시켜 자기를 구원할 존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신종 유아론을 확산시켰다고 할 때 그것을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객관적 권위를 가지는 진리도 없고,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윤리도 없는 조건에서 내가 믿는 것이 진리이고 내가 행하는 것이 윤리가 된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전도된 '탈진실', '탈윤리'의 세계에서 이런 나르시시즘은 인간 실존의 보편적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진숙이라는 인물의 완악(頑惡, 사나움)한 얼굴이나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고독한 나르시시스트의 적개심과 투쟁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어쩌면 그 얼굴은 망가진 얼굴이 아니라 이 막장 같은 시대를 살아남기에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완성된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악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환자의 얼굴'이며 나는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중증이든 경증이든 저마다 이렇게 병든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명인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아직 모든 사람이 이진숙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질병의 치유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이 병든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인문 운동의 질문이고, 이에 대한 대답도 인문 운동의 역할이다. 그것은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처한 위치가 어디이며 자기는 지금 그 위치에 걸맞은 일을 하고 있는가 무든 거다. 그 일은 타자들 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나는 그 의미에 긍정적으로 부합하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부단히 묻고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 객관화'라고 말한다. '자기성찰'이라고 해도 좋다. 부끄러움이나 염치, 겸손, 배려, 희생 같은 덕목들은 이런 자기 객관화와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한 덕목들이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진숙 같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 '자기 객관화'라는 정신적 단련을 나날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자존감은 자존심이나 자신감과는 다르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티타임이 있었다고 한다. 몇 번 우려낸 형편없는 차였지만 하루에 한 번씩 차가 배급됐다. 티타임에 수용소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를 절반 남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했고, 후자는 ‘최소한의 인간적 체모'를 지키려 애쓴 것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까. 놀랍게도 후자 쪽의 생존율이 더 높았다. 브라이언 보이드가 쓴 <<이야기의 기원>>(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의 옮긴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남겨 자기 얼굴을 씻는 행위가 자기성찰, 즉 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아껴 자기 몸을 청결히 한 사람,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렇다. 문제는 자존감이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진 근본 이유 중 하나가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껍데기만 사람이다. 동물에 가깝다. 대체 무엇이 자존감을 앗아갔는가? ‘돈이 최고’라는 시장전체주의가 주범일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나쁜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다. 자기성찰 능력이 없는 팽창적 자본주의가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 링컨대통령의 일화 속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세수를 하고, 오늘 사진의 꽃처럼, 내 얼굴을 다시 보고, 얼굴에 책임지는 하루를 살고 싶다.
세수/이선영
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
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것인 물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울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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