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5일)
1
나에게 주어진 일상에 호기심을 더한다. 그러면 매일 새로운 풍경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예컨대, 점심을 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나무의 푸르름에서 계절의 무르익음을 느끼고, 건물에 드리운 하아얀 빛의 질감을 쫓는 일, 아름다운 꽃에 취해 몇 번이고 셔터를 누르거나, 매일 마시는 차나 커피의 맛과 향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묘사해 보는 일처럼 말이다.
언젠가 내가 길게 적어 둔 생각이다. 길기 때문에 시 대신 공유한다.
자연은 언제나 조용하고 친절하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나를 거절한 적이 없는 내 삶 터전의 원래 주인이다.
자연은 자신의 비밀이 밝혀 지길 기다리는 호기심이다.
자연은 변한다. 시간의 지배를 받은 만물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지구는 하루 평균 시속 1667Km로 스스로 한 바퀴 돌고, 10만 7160km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력의 신비한 마술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우리 자신도 그 못지않게 변한다.
우리 몸속에 서식하는 마이크로바이옴은 세포수의 두 배 이상이며, 그 안에 숨겨진 유전자 정보는 100배 이상이다.
이들의 생멸과정은 우주의 탄생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봄바람 신(神)인 제피로스가 어디에 선가 입김을 불어내고 있다.
이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은 실제이다.
바람보다 센 폭풍은 신이 현현하는 도구이다.
신은 욥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신의 질문은 언제나 그것 자체가 답이다. 질문이 답이다.
인생을 깊이 보고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그것 자체가 답이다.
해답을 찾으려는 진실 수고가 답이다.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우주는 46억년 전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태양과 같은 새로운 별들이 생겼다.
그 후 커다란 유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과 부딪쳤다.
이때 만들어진 두 개의 행성이 달과 지구이다.
지구는 그 후 거의 5천만년 동안 서서히 식어 내부는 뜨거운 용암으로 되어 있지만 표면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육지를 만들었다.
생명은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가?
일반적인 설명은 이렇다.
번개가 바다를 쳐서 생물이 등장할 수 있는 원시적인 화학성분들의 결합물이 되었다는 '원시프트' 이론이 있다.
특히 미국 엘로우스톤과 같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열 웅덩이이의 뜨거운 물방울에서 원형세포가 등장했다는 것이 최근 가설이다.
이 방울은 탄소, 수소, 산소, 인, 유황 그리고 질소로 이루어졌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동일한 유전 정보, 즉 똑같은 생화학 원소를 공유하기 때문에 하나의 공동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후 단백질, 핵산 그리고 유전암호를 통해 한 개의 막 안에 5천 개의 단백질 그리고 DNA와 RNA를 지닌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자기보존체제가 되었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물이 이같이 등장했다고 한다. 어렵다.
이렇게 등장한 세포는 그 후 동물과 식물로 진화하여 6500만년 전에는 공룡에 이르렀다.
우리는 '살아 있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왜 지구를 제외한 다른 행성에서 아직 생물을 찾을 수 없는가?
그 이유는 물질과 에너지가 중용(中庸)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너무 고체화 되어 차갑게 되거나, 기체 화되어 뜨거워 생물이 존재할 수 없다. 흥미롭다.
생명은 그러니까 중용이고, 이때 중요한 것이 에너지라니.
지구는 태양과의 절묘한 거리와 달과의 신비한 공생관계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제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신비스럽다. 태양도 중요하고, 태양과 달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럼 살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살아 있음'이란 자라고 늙고 죽어가는, 생명의 자연스런 과정을 포괄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생명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활동, 즉 변화를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활력의 부재, 즉 무생물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못쓰게 될 뿐이다.
자발적으로 싹을 내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형할 수 없다. 그러니 사람도 변하지 못하면 무생물이다.
과학자들은 살아있음의 원칙을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즉 '자기보존체제'라고 부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호기심 천국'이다.
2
서울대 도서관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8가지 문장을 명언이라 한다. 이건 낡은 학교 문법이다. 시대가 바뀌면 의식을 바꿔야 한다. 우연히 카톡에서 만난 거다.
▪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 내가 포기한 그 순간, 누군가는 간절히 버티고 있다
▪ 남들이 나를 믿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나를 먼저 믿어야 한다
▪ 게으름은 잠깐의 달콤함 이고, 후회는 평생 간다
▪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나의 10년 후를 만든다
▪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 공부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투자다
▪ 네가 흘린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이 8개의 문장을 소개한 필자는 "그냥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이네. 이 정도의 의식 수준이니 문제가 많구나"라며 다음과 같이 되씹어보있다. 거기에 인문 운동가의 시선을 보태 본다.
3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 뭘 그리 걷고 뛰냐? 자기를 너무 득달하지 마라. 인생 살고 나면 거기가 기기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누구나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날이 충만하고 순간순간 충실한 삶, 하루하루 들어가는 나이가 몰락의 과정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인 삶이야 말로 우리가 이룩하고 싶은 위대한 성취일 테다. 로마노 과르디니의 <<삶과 나이>>에 따르면, 모든 하루하루는 단 한 번 밖에 오지 않기에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얻는다. 존중 받지 못할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없다. 순간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강렬한 긴장을 느낀다. 이런 긴장 없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다가온다. 때론 상실감과 후회 속에서 공허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고”라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 속 붉은 여왕의 말이 소환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는 기계 위 말과 같다. 그곳에서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법이 쉼 없이 달리는 것뿐일까? 머신에서 내려온다면, 전원을 끈다면 어떨까? 전원을 끄고 내려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이미 걸어온 길을 후회하거나 정상을 보며 불안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걷는 한 걸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저 한 순간, 한 정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순간이 살면서 우리가 가장 현명해지는 때다. 그 때는 걷기를 잠시 몀추고 명을 하는 거다. 명상을 하면 오히려 잡념이 더 밀려온다고 생각하는 건 햇살이 비칠 때 먼지가 훨씬 더 잘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보다 못 가질까, 못 먹을까 두려워하는 잡념이 진짜 나를 가리는 먼지다. 그 먼지를 지워야 비로소 타인과 비교하는 데 젖은 내가 아닌, 진짜 나,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보인다.
나는 뛰어야 한다고 하면, 나의 만트라 "습정양졸(習靜養拙)"을 여러 번 되 뇌인다. '습정양졸'은 "고요함을 익히고 고졸함을 기른다"는 말이다. 여기서 '정(靜)'과 '졸(拙)'은 한 통속이다. 졸은 '고졸하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는 말이다. 도자기 가게에 가면, 기계에서 찍어 나온 듯 흠잡을 데가 없이 반듯반듯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가진 도자기는 상식적이라 눈길이 안 간다. 뭔가 균형도 잡히지 않은 것 같고, 어딘가 거칠고 투박한 것 같으면서도 구수하고 은근하고 정답고 살아 숨쉬는 듯한 것이 마음에 끌리고 편하게 느껴진다. 그게 내가 '키우고 싶은 '양졸(養拙)' 이다.
그리고 정(靜)을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은 '빈곤의 심리'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이 세상 좋은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가져가면 그만큼 내 몫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심리'이다. 그 반대가 '풍요의 심리'이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고, 풍요로워서 남이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내 몫은 남아 있다'고 보는 심리이다. 이런 빈곤의 심리는 배타주의를 낳고, 풍요의 심리는 포용을 할 줄 알게 된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라 했다. 출세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치환됨을 알기에 사람들은 출세에 집착한다. 출세를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고요함을 잃게 된다. 고요함을 습관들이고, 고졸함을 기른다는 '습정양졸'의 정신이 필요하다. <<장자>>에 "감어지수(鑑於止水)"라는 말이 있다. '흐르지 않고 고요한 물에 사람들은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본다'는 말이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는 것처럼 고요함이 없는 마음에 우리의 모습은 비쳐지지 않는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장자>>를 함께 읽는 이유는 저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를 뿐, 틀린 인생은 없다는 생각에서, 조금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서이다. "물 한 바가지 붓는다고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든다고 바뀌지 않는다. 본성이 그렇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다."(강상구, <<그때 장자를 만났다>>)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4
"내가 포기한 그 순간, 누군가는 간절히 버티고 있다." → 누군가 있는 게 뭐가 니 손실이고 손해인가? 그냥 인생 순간순간을 즐겨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앞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소중한 순간이 오면 놓치지 말고 즐기는 거다.
여기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을 소환한다. 이 라틴 말을 직역하면 "현재를 잡아라, 현재에 충실하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재를 즐겨라"로 오해하고 있다. 그 오해는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털어서 현재를 쾌락하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삶의 방식은 중독자를 만든다.
카르페 디엠은 로마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 나온다.
Dum loquimur
Fugerit invida aetas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남 눈치를 보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다 보면 세월이 저 만큼 도망갑니다.
가르페 디엠!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신경을 덜 쓰십시오!
나는 이렇게 번역한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남들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이 저만큼 흘러가네, 이 순간을 낚아 채십시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거나 믿지 마십시오."
세월이 아까운 이유는 자신을 응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타인을 응시하고 타인의 인정을 목말라 하며, 타인이 원하는 것이 어느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스스로 최면(催眠)을 걸었기 때문이다. 최면이란 암시(暗示)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수면(睡眠)에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그 몽롱한 상태를 라틴어로 'invidia', 즉 '부러움', '선망'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하루는 네가 아닌 다른 것이 되라고 유혹하는 선망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런 삶을 학교에서 배우고, 미디어를 통해 매순간 접한다.
우리 현대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문법이 부러움이다. 부러움이 지나치면 시기와 질투가 되어, 자신이 아닌 남을 헐뜯는다. 호라티우스는 그런 세월을 보내는 야속한 세월을 '아에타스(aestas)'라고 명명한다. 아에타스는 자신을 위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해, 그냥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카르페 디엠'에서 '다엠'은 하루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루는 하늘이 주신 기회이다. 그 기회를 낚아 채야 한다. '카르페'는 카르페레(carpere)라는 동사의 단수명령형이다. '카르페레'는 '과실을 따다', '곡식을 추수하다'라는 말이다. 농부들이 사용하던 말이라고 했다. 농부에게 가을은 자신이 봄에 심은 씨앗이 만들어 낸 기적을 거두는 때이다. 농부가 잘 익은 과일을 나뭇가지에서 떼어 내기 위해서는 과일의 당분과 싱싱함이 최고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즉 수확의 시점을 정확하게 잡아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과일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잘 익은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봄에 씨앗을 심고, 여름에 거름을 주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잘 취해야 한다. 봄에 씨앗을 심고, 오랜 기간, 그 과일이나 곡식을 돌본 사람만이 '카르페레'할 수 있다. '카르페레'를 고대 그리스어의 어원을 적용하면, 과일과 곡식은 봄부터 쓸데 없는 것들을 걸러내는 오랜 작업을 통해 얻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정리하면, '카르페 디엠'을 번역하면, '오늘이라는 과일을 따먹어라', 혹은 '오늘이라는 곡식을 추수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쓸데 없는 가지를 쳐왔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가지치기는 빼기이다.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문법이 여기에 적용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이라는 과실을 따려고 몰입할 때, 나를 혼미하게 만드는 방해꾼이 있는데, 그것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호라티우스는 이 방해꾼을 미래에 일어날 일들, postero라고 말한다. 미래는 오직 않은 것이다. 미래는 오늘의 연장이다. 미래에 마음을 두는 일은 어리석다. 미래는 오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5
"가슴 뛰는 일을 하지 말고, 잘 하는 일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가슴 뛰는 일을 쫓다가 가슴이 안 뛰기 시작할 수 있거든요." (김영하 작가) 그러면서 지금-이 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부초와 같이 된다.
모든 것의 처음은 사소하고 미약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쌓이고 쌓인다. 쌓여서 육중한 무게와 너른 넓이를 만든다. 쌓이면 누구도 꺾을 수 없다. 다발과 묶음과 무더기는 어떤 힘도 견뎌낸다. 마치 서로 의지한 갈대 묶음을 힘센 사람도 쉽게 부러뜨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여기가 맨 끝이라고 여기는 때가 맨 처음이다. 끝은 맨 앞이다. 끝에서 생겨난다. 실뿌리에서 생겨나 잔가지와 우듬지가 된다. 새순에서 생겨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아, 이제 이곳이 끝이구나 라고 자신을 아주 허물어버리지 않는다면 거기 그때가 맨 앞이 된다. 그리고 매 순간 놀랍고, 기적과도 같은 진전이 이뤄진다.
지금-여기서 모든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갑자기 일이 많아져, 일상이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카르페 디엠"을 소환해야 한다. 카르페 디엠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일이다.
언젠가 적어 둔 글을 시 대신 공유한다. 그리고 나머지 문장을 내일로 넘긴다.
포기와 내려놓음은 다르다/박수소리
포기는 할 수 없다고 멈추는 것이고,
내려놓음은 할 수 있지만 비우는 마음으로
'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멈추는 것이다.
결단이 중요하다.
그건 마음 먹기에서 나온다.
포기는 아쉬운 결정이고,
내려놓음은 깊은 성찰인 것이다.
기쁨 평안 그리고 행복이 삶의 보람이고 보상이다.
그건 옳은 일을 할 때 느끼는 기쁨과
바른 길을 갈 때 느끼는 평안,
바로 그 기쁨과 평안이 행복,
그 세 개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보상이고 보람이다.
그 기쁨과 평안 속으로 걸어가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영원한 시간이다.
마지막은 마지막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하는 것이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을 마지막처럼 사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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