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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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건강한 사회는 창피함, 아니 부끄러움(恥)을 아는 사회이다. 보통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는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교통 법규 위반에 적발된 자신만 재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처럼,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 중의 하나이다. 모두 다 법을 지키지 않는데, 적발된 자신만 재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 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느낀다면, 자신의 인간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관계가 일회성인가?
2
‘마아트(maat)'는 고대 이집트어로 ‘자신의 고유 임무’ 혹은 ‘일생 동안 마쳐야 할 의무’라는 의미다. 우리는 개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법'을 '도리'라고 헌다. 그리고 이 '도리(道理)'의 일부를 문자로 기록하여 한데 묶어 '법(法)'이라고 부른다. 수메르 문명은 그 법을 '메(ME)', 이집트 문명은 '마아트(MAAT)', 인도 문명은 '르타(Rta)', 히브리 문명은 '토라(Torah)', 중국 문명은 '도(道, Dao)'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다. 국가가 제정한 법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의 지극히 일부이다. 그래 후진 사회는 법률 조항들의 정신인 '도리'를 무시한다. 선진 사회는 이 법률조항들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의 표현, 즉 '도리'의 일부라고 여긴다. 게다가 선진 공동체는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고양시키는 교육에 힘쓴다. 인생을 놀이로 가정한다면, 그 놀이에는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제1조항은 무고죄(誣告罪)이다. 무고죄는 인류가 우려한 가장 중한 범죄이다. 제1조항을 요즈음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만일 한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을 고소하여 살인죄로 고소하였으나, 그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를 고소한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무고죄를 가장 악의적인 범죄로 여긴 이유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자유를 절제하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타인을 해할 목적으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자신을 깨끗이 닦고, 주변을 청소하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경외심을 표현하였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덕을 쌓는 것이며 부덕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기를 썼다. 그게 그의 <명상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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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c/d'라는 공식을 좋아한다. 여기서 H는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이에요. c는 캐피탈(capital), 돈이다. d는 디자이어(desire),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행복이 커지려면 돈이 많아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돈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경쟁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경쟁이라는 것은 배타적이지요. 타자가 나에게 지옥을 안겨 줘요. 이 도식 안에서 살아가면 언제나 불안이 내면화됩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가 만든 이 도식 안에 삶을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옛날에 비해 돈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그만큼 행복하질 않아요. 욕망이 커져서 그래요. 거꾸로 욕망이 줄어들면 행복이 커지지요.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해요.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겨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하죠?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예요.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죠. 그럴 때 무언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죠. 그때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거나 불안하게 만들지 못해요.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죠. '이 정도는 누려야지'라며 욕망을 슬글슬금 키우죠. 거기에 사로잡히면 늘 결핍되어 있고 행복은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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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2세기 벤 조마는 <<탈무드>>를 해석한 <선조들의 어록> 4.1에서 우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칙 때문에 유지된다고 했다.
▪ 토라(torah): '율법 경전'이면서 '길'이란 의미이다. '경전'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경전'을 읽어야 한다. 여기서 '길'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도(道)'와 같은 것 같다. 배철현 교수는 '길'에 대해 두가지를 덧붙인다. (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기에게 유일하고, 자신만의, 즉 자기 삶을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매 순간 발걸음이 닿는 길이 바로 자신의 '목적지'라고 인식하며,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2) 종교적인 '죄'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안다 할지라도 그 길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라고 한다.
▪ 아보다(avodah): '노동'이면서 '예배'란 의미이다. 이 단어도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노동', 아니 자신이 하는 일이 신에 대한 경배로써 '예배'란 의미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아보다'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서비스(service)라 한다. '아보다'는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이웃이나 낯선 자를 위해 하는 일이나 노동(서비스)은 바로 신에게 하는 것과 같다. (2) 자신이 하는 일을 신을 위해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삶의 원칙이 되기도 한다. (3) 서비스라는 말은 낯선 자를 신처럼 섬기라는 윤리적 명령이기도 하다. 일이 신에게 드리는 예배일 수 있으며, 이웃에게 봉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 헤세드(chesed): '변하지 않는 어머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의미이다. 어머니처럼,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의 둘레를 확장하여 타인을 자신처럼 아끼는 마음을 지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비슷한 말 같다.
위 세 가지 원칙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깨달음, 경전을 읽고 자신의 길을 깨닫는 원칙 토라)와 자비(헤세드)에다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아보다가 덧붙여진 원칙 같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말은 '아보다'이다. 이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제사'가 아닐까? 도올 김용옥 교수는 <<주역>> 유튜브 강의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해석에서 "亨"을 "그대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지내 만인, 만물과 형통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려라"는 말로 풀이를 했다. 그래서 "亨'은 '나눔'이라는 거다. 그런 나눔으로 우리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것이 아닐까? <문언>에서는 "형"을 "사물을 생성하는 과정의 형통함"으로 풀이했다. "사물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절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예(禮)가 되니,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會通)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에서는 일하고, 안식일에 '예배'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매주 가는 '미사'가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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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삶은, 일상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이 구현되는 삶이다. <<주역>> 제1장 <중천 건> 괘의 <문언전>에 나오는 "원형이정"이 군자(君子)의 네 가지 덕(四德)이라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혼란스러울 때는, 이 표를 보고, 일상의 삶을 점검해볼 수 있다. 때에 따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원(元) 체인(體仁) 선지장(善之長) 장인(長人)
형(亨) 가회(嘉會) 가지회(嘉之會) 합례(合禮)
이(利) 리물(利物) 의지화(義之和) 화의(和義)
정(貞) 정고(貞固) 사지간(事之幹) 간사(幹事)
▪ 일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사랑을 장착("체인, 體仁")하여, 만나는 사람을 대접하는 거다. 그 사랑을 우리는 '황금률'이라 한다. 엄청난 rule(규율)인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다른 이를 대접하라.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다른 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환대하라. 그 대접은 상대를 성장하게 하는 거다. 그래 "장인(長人, 사람을 성장하게 해준다)"이라 한 게 아닐까?
▪ 그 다음, 사람들을 만나면 예의를 지키고, 즐겁게 만나라는 거다. 그걸 "가회(嘉會)"라 했다. 에티켓과 매너를 갖추는 거다. 매너는 에티켓과,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에티켓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사회적인 불문율로써 하나의 규범'이라면, 매너는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그 '에티켓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를 보면, 우리는 금방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규범으로서 에티켓이고, ‘노크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하는 방법은 매너에 속한다. 따라서 에티켓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라 해도 매너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예의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로 서의 매너의 기본원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진정한 매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배려심이다. 그 배려심은 자신이 불편을 자초(自招)해야 한다. 난 '자초'란 말을 좋아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기 때문이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로 나눈다. '권도'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때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권도'의 '권(權)'은 마치 저울이 어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측정하여 평형을 유지하듯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고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 그 다음은 사물을 이롭게 함("리물, 利物")으로써, 더 나아가 만나는 모두가 이익이 되게 하지만, 그 때 발생하는 갈등은 정의로움으로 해결한다. 그 정의로움의 충돌을 잘 조화시키라는 거다. 그 길은 공정한 분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 혼자 그 이익을 독차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그걸 "화의(和義)"로 표현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잘못한 것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권력을 잡는데 성공하면, 정치 지도자에서 국가 경영자 혹은 통치자로 변신하여야 한다. 순수한 명분을 버리고 잡스러운 이익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명분은 구분의 정치력이고, 이익은 통합의 토대이다. 명분은 순수하고, 이익은 잡스럽다. 당연히 통치자는 스스로를 더럽히고 욕보이더라도, 국민들은 깨끗하고 명예롭게 살도록 해주는 존재이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도 마찬가지이다. 명분에 죽는다. 잡스럽게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 끝으로 지조 있고 단단한 일상의 자세를 취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완결 짓는 일이다. 이를 "정고(貞固)"라 했다. 내 방식대로 하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 꾸준함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되어감의 존재(하이데거)’이다. 이 세상에 던져질 때는 아무도 삶을 선택할 수 없으나, 태어난 자신을 어떤 존재로 가꿀 것이냐는 자기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의지와 열정을 품고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 가는 실천 속에서 우리 삶은 비로소 충만해진다. 인생의 본질은 "자기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달려 있다." 삶의 밀도란 시간 가성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바란다고 누구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의 나를 되짚으면서 나의 모자람을 돌아볼 마음이 있고, 되고 싶은 존재를 향한 의지가 있고,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되기 위해 해야 할 당위를 지킬 때, 비로소 우리 존재는 완성된다. 따라서 꾸준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성찰의 시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차분히 돌아볼 여유, 삶의 방향과 목적에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집중하는 실천 없이 삶의 밀도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貞)은 질문 하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원형이정"이 구현된,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류시화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는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이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을 찾아서
지상의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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