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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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난 문장이다.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겪어봐야 할 신비이다.' '신비(神秘)'하면, 나의 대학 시절 동아리 이름이었던 '누멘'이 소환된다. '누멘'이란 '신성' 또는 '신의 존재', '신의 뜻'에 대한 라틴어이다. 신화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말한 신의 정의가 떠오른다. 오토는 신을 인간이 초월하는 신적인 속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신적인 아우라'를 ‘누멘(numen)’이라고 불렀다. 노자가 말하는 '상도(常道)'와 같다. 누멘은 '신적인 아우라'를 지닌 생명력을 의미한다. 이 '신적인 아우라'는 '신비', '전율', '매력'으로 자신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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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초월적인 힘은 신비(神祕)하다. 신비는 무한한 우주의 정체성이자,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식이다. 인간은 이성 안에서 세상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성 안에서 수학적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을 참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 정리 밖을 거짓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무한한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숫자안에 갇힐 수 없다. 인간의 숫자를 초월하는 무한한 우주 안에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 데이비드 리코의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다.
"한 사람의 경험 속에는 이해할 수 없고, 가 닿을 수 없는, 익명인 채로 남아 있는 감정이 때로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그 순간에 어떤 느낌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는 단순히 그 내면의 신비를 존중해주는 것이 지원일 수 도 있습니다. 달리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햄릿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 영혼아, 조용히 앉아 있자.'"
신비(神祕)의 사전적 정의는 일이나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을 뜻한다. 또는 그런 일이나 비밀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비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나 사물을 가리키는데, 주로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신비한 경험은 경외심, 두려움, 호기심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노자식으로 말하면, "현묘(玄妙)"이다.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제1장)" "가물코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이 문에서 나오는 도다!" 이 "현묘"를 신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세계'라 본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순간 '도'가 아니지만, 어렴풋이 '도'를 말해 보면, 우주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도록 하는 기본 원리,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움직일 수 없는 기본 원칙 같은 게 아닐까? '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물론 그 두 측면이 각각 실체나 본질이 있는 게 아니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있을 뿐이다.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드러나지 보이지도 않는 신비의 측면과 다른 하나는 이름 붙일 수도 있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현상의 측면이라는 거다. 노자는 전자를 "무명(無名)", '무(無)의 세계'라 하고, 후자는 "유명(有名)" 혹은 '유(有)의 세계'라 한다. 여기서 '무의 세계'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무'라고 해서 물론 전혀 없는 헛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통으로 존재하는 '유'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보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의 '무'이다. 영어로는 보통의 being이 아니라는 뜻에서 non-being이다.
만일 우리가 그 '신비', 아니 '도의 세계;를 망각하고, 자신이 우연히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진리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는 과학 근본주의자로 타락한다. 아인슈타인은 신비에 대헤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입니다. 신비는 모든 예술과 과학의 원천입니다. 이 감정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을 보고, 하던 일을 멈추지도 경외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눈은 닫혀 있는 장님입니다. 인생이란 신비를 헤아리는 통찰은 공포와 더불어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지성은 아주 원초적인 형태만 이해할 뿐입니다. 이 신비한 감정이 모든 종교성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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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초월적인 힘은 '전율(戰慄)'이다. '전율'은 몹시 무섭거나 두려워 몸이 벌벌 떨림을 뜻한다. 최근에는 '전율'이라는 말에 '몸이 떨릴 정도로 감격스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풀이가 추가된다.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시킨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가만히 보면, 그 가지가 스쳐가는 바람에도 조금씩 떤다는 것을 본다. 그 떨림이 나무를 유연하게 만들어 수 십 년, 아니 수 백 년 동안 가지를 흔들며 버텨왔다. 그렇게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전율한 경험'은 우리들에게 전율이란 카리스마를 선물한다. 우리가 이 소나무 앞에서 '전율'하는 이유는, 나무가 지내온 수많은 '전율'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신비 앞에 인간이 느끼는 공포스러운 떨림이 '전율'이라 본다는 거다.
창조는 카오스에서 생긴다. 질서에서는 안 생긴다. 질서는 이미 죽은 거다. 카오스의 대립이 코스모스이다.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로,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질적인 변화는 '처음'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처음'이란 이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경계의 찰나'이다. 습관처럼 흘러가던 이전의 양적인 시간과 달리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이어서 전율하게 하는 질적인 시간이고, 동시에 문지방, 현관이다. 현관의 '현(玄)'자가 가물가물하다는 말이다. 그래 아직은 손에 뭔가 잡히지 않지만, 가물가물하게 뭔가 보인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번역하는 '창조하다'의 히브리어가 '바라(bara)'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이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 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창조 하다'의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재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 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
카오스가 질서보다 우선한다. 카오스가 정리정돈보다 더 우위에 있다. 코스모스가 되면 죽은 거다. 고 이어령 교수에게 혼돈은 호기심 덩어리라 했다. 혼돈은 목마름 그 자체였다고 했다. 카오스에서 이것 저것을 해야 계속할 수 있다. 정상에 오를 만하면 갈증을 남겨두고 길을 떠나는 거다. 왜냐하면 올라가면 끝나는 거니까. 이 교수님은 카오스를 불안의 흑점이 아니라, 창조의 밝은 점으로 바라본보았다. 혼돈 앞에서 오히려 생명력이 용솟음 친다. 그는 자신에게 물았다.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돌멩이인가?" 흥미로운 질문이다.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한다.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독은 차면 그만이다. 채우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든다. 물질의 속성이다. 두레박의 속성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나 자신도 질문을 해 본다. 물독은 제 인생을 남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산다.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 하다.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는다.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다.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린다. 지적 보헤미안이다. 그는 그런 사람을 "늘 우물 파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레박 인생은 노마드(nomard)이다.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직업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이다. 인생이 변화무쌍해서 '나는 왜 이럴까' 곧잘 후회는 해도 자살은 안 한다. 다음이 또 있으니까. 그런데 물독 인생들은 다 채우면 허무 해진다. 그래서 남 쫓아가는 욕망으로 산다면 물독도 아니고, 두레박도 아니고 돌멩이다. 아름답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갈증을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면 돌멩이처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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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초월적인 힘은 매력(魅力)이다. 매력은 자신의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린 만큼, 저 높은 하늘로 가지를 치고 올라가겠다는 의지에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힘이다. 나무는 쓸쓸하지만 근사한 이유는 다른 나무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조화를 절묘하게 이루기 때문이다. 이 무심코 서 있는 나무는 매력을 발산한다. 매력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어떤 것이다. 매력을 우리가 사용하는 다른 말로 대치한다면 '아우라 혹은 카리스마'이다. 흔히 보는 화려한 옷을 입고 인상을 쓰는 것이 '카리스마'가 아니라, 수많은 군중 속에 있더라도 그를 범인들과 더욱 구별하고 빛나게 하는 그 무엇이 매력이다. 위대한 개인은 매력의 소유자며, 리더의 첫 번째 조건도 매력이다. 우리는 그런 매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매력을 연습을 통해 획득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력은 누구나 찾아 소유할 수 있기에 공짜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주어지기 때문에, 신의 은총이라고도 말한다. 신은 공짜인 매력을 줄 사람을 찾고 있다. 여기서 매력은, 더 나아가, 거기서 나오는 카리스마는, 자신을 구별하여 자신의 깊은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고독한 묵상, 그 묵상을 통해 목숨을 바칠 만한 임무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게 일관성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자기를 무한 신뢰하고 나아가는 자의 것이다. 다음과 같은 5 가지 절차를 다시 정리해 본다.
▪ 자신을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가는 곳을 절제하며 구별한다.
▪ 자신의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하게 묵상한다.
▪ 그 묵상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일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신의 소명, 아니 임무를 발견한다.
▪ 그리고 일관성 있게 말만이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 그리고 자기를 믿고 계속 나아간다.
그러니 매일 무리 지어 사람들과 다니지 말고, 먼저 자신을 위한 별도의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헌신한다. 이 구별된 시간과 공간이 고독이다. 고독이 우리를 매력 있는 사람으로 변모 시킨다. 평범한 인간은 고독을 통해 비범한 남다른 인간으로 다시 탄생한다.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 임무를 대중들에게 감동적으로 이야기 하고, 공동체의 최선을 찾아내기 위해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한다. 신은 공짜인 매력을 줄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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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ntralralization-centralization(분산-집중)을 인문학에서는 '변방-중심'으로 말한다. 주변과 변방이 더 개혁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중심부로 들어간다.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중앙은 퇴행하게 마련이며, 변경에 있던 세력이 다시 중심부를 장악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나도 주변인이라 그런지 그 말이 좋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 창조,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변방에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가려고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 변방에 있다면 오히려 기회이고, 중심에 있는 사람이 주변인으로 나서면 더 멋지다.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다섯 가지 조건들은 자기를 변방에 두라는 이야기이다. 자기가 중심이라는 오만에 대한 경계이다.
-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듯한 '외모'
- 자기 생각의 절반 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 남과 힘을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 연설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치는 '말 솜씨'
난, 변방에 있어서, "기쁘다."
나는 기쁘다/천양희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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