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대학은 배운 사람을 사회로 배출하는 패러다임에서 평생 배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을 사회에 배출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 오늘 아침에 만난 멋진 통찰이다. 그동안 우리 대학은 사회 혹은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쓸모 있는 사람’을 키우는 데 몰두하였다. 그런데 그 쓸모 있는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다른 기술들로 대체되는 미래사회, 과연 대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때 대학은 ‘쓸모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개인’을 위한 배움의 장소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문제일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뇌·인지과학전공)의 질문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쓸모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개인'으로 '무엇이 쓸모 있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건너가기를 해야 한다.
대학은 이론을 배우고 적용원리를 가르치던 기존의 교육방식을 버리고, 자기주도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서 인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먼저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소통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가능한 한 모든 수업을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토론수업으로 운영하여야 한다. 그리고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게 하여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로지 과거를 깊이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대학은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고 일방 통행으로 이루어지는 강의를 통한 정보전달이 아닌 토론 등을 통한 자기주도적 학습 기회와 작은 규모로 교수와 학생 간의 긴밀한 소통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결국 불확실한 미래사회를 대비하는 데는 전문적인 지식 만큼이나 자기 주도적인 학습과 인문교육, 그리고 사람 간 소통을 통해 축적되는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일 교수의 대안을 직접 들어 본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 치열한 입시 위주 주입식 교육으로 자기주도형 학습능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고, 미래를 위한 핵심역량 함양을 위한 인문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학은 규모의 게임에서 벗어나 개별 학생들의 니즈를 채워 줄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미래대학으로의 변화를 제안해 본다. 작은 규모에서 오는 한계는 대학연합체를 통해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 학생들은 인간을 성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비판적 사고를 배워 급격하게 변화하는 미래사회에서도 홀로 빛나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기획전문가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나만의 브랜드 만드는 미래교육, 즉 인간에 대한 성찰과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비판적 사고를 익혀,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교육의 문법이 바뀌어야 한다.
푸른 잎을 한웅 큼 훑어 꽉 쥐어짜면 푸른 물이 떨어질 듯한 산책길을 오늘 아침 걸었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색이 변화하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이 농담(濃淡, 진함과 묽음)의 붓질을 해댄다. 그리고 나무는 사람처럼 분주하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사람의 동네에서 나무들의 동네에 들어서면 마음이 고요해 진다. 나무 사이를 걸으면 절로 나무를 닮게 된다. 숲길은 마음의 길로 이어진다. 그 옛날 당신이 걸었던 숲길을 찾는다. 그리고 처음처럼 속삭인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나무 /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원래 태어날 때 사람은 생각이 없다. 살아가면서 사회 체제나 구조 등에 의해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내 생각이 진짜 내가 한 생각인가, 그 생각이 진리에 가까운가를 잘 모른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하다'는 내 생각을 '의심하다' 아니 '회의하다'로 읽어야 한다. 고집스럽게 갖고 있는 내 생각을 부정해보아야 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글쓰기와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 문법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학교에서 주입식 암기 교육을 받았고, 그 방식은 아직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심사가 뒤틀렸으면, 있는 듯 없는 듯이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 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심도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싶다면, 다소 힘에 부치는 책을 선택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주장이다.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 던지고 싶은 책들을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말했다. 작가의 그런 열정을 글 속에서 알아차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해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 활력을 느끼게 하고, 흥분시키는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
독서 행위는 수동적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작가와 더불어 적극적인 이해의 과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삶과 세계 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심화는 우리를 편협성의 늪으로부터 건져준다. 욕망의 바다를 는적거리며 헤매기보다는 인식의 광야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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