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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겸손과 절제의 태도에 관한 문화사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낙타 #신경림 #에리런 #아이러니 #알라존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27일)

겸손과 절제의 태도에 관한 문화사를 읽었다. 인류 역사 초기에 해당하는 수렵채취의 시대에도 '겸손'이라는 양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특별한 권리를 자신에게만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예컨대 발언권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존중 받을 수 있는 영우의 태도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도 겸손의 방식이 등장했던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연극이 펼쳐졌던 극장이고, 다른 한 곳은 철학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리스 희극에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일한 캐릭터가 항상 등장했다. '에이런(Eiron)'과 '알라존(Alazone)'이다. '에이런'은 자신의 진짜 능력은 숨김으로써 스스로 낮추는 인물이고, '알라존'은 실제로는 가진 게 거의 없지만 허세를 부리는 '떠 벌이' 캐릭터이다. 에이런은 알라존을 상대로 자신의 진면모를 감추지만 결국 사기꾼 같은 그를 이기고 성공한다. 여기서 에이런이 자신을 감추며 알라존을 속이는 의도는 개인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이 두 인물이 그리스 희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에리론은 힘이 약하고 겸손하며 영리한 인물이지만, 알라존은 허풍쟁이로 힘이 강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이 둘의 대립에서 겉으로는 알라존의 승리가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끝에 가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에이론이 승리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숨겨진 실제 사이의 괴리를 뜻하는 '아이러니(irony)'는 바로 '에이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렇듯 자신을 낮추는 방식과 아이러니는 묘하게 연결돼 있다.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자기 스스로를 더 낮게 표현하는 방식은, 그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니 말이다.

아이러니(irony)는 희랍어 ‘eironeia’ (에이로네이아)에서 파생된 단어로 ‘감춤’, ‘위장’, ‘시침뗌’, ‘은폐’의 뜻을 지닌다.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 희극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을 가리키는 ‘eiron’(에이런)에서 왔다. 원래 그리스 희극은 에이런(eiron)이라고 불리는 인물과 알라존(alazon)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무대에서 펼치는 논쟁을 담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에이런은 약자로서 겸손하고 양보하는 총명한 사람이지만 반대로 알라존은 강자로 자만에 빠져 있고 허세를 부리며 뽐내는 우둔한 인물이다. 그리스 희극은 약자이면서 패배할 듯 보이는 에이런이 승리하는 데 본질을 두었다. 이렇게 패배할 듯이 보이는 행위가 오히려 승리를 거두게 되고 표면에 드러난 의미가 숨겨진 의미에 의해서 전도되는 그리스 희극의 본질로부터 그 주인공 에이런에 어원을 둔 에이로네이아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래 이 단어는 ‘자신을 어리석게 가장하거나 진의와 다르게 표명하여 시치미를 떼는 것’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eironeia라는 말은 플라톤의 〈共和國〉에 나오는데, 어원은 에이론부터이다. 이 저서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에 걸려 자신의 무지가 폭로된 사람들이 그를 헐뜯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실은 잘 알면서도 표면적으로 모르는 것처럼 변장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에도 겸손의 방식이 등장했던 공간은 그리스 철학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유명한 '에이런'의 유형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고, 상대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가 모든 가능성을 짚어보고 사려 깊게 고민해 보도록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그는 '산파술'이라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알아차리도록 도왔다. 올바른 생각-앎은 '깨달은 사람'이 안겨주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는 과정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지난 주 5월 22일에 한국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신경림 시인이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 “나는 평생 한 번도 갑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을이었으니까. 그런데 을로 사니까 편안한 거 같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갑이 왜 되냐는 생각이에요.”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는 시인,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시단의 거목. 바로 신경림(申庚林)시인이었다. 인생을 대하는 시인의 해법을 물으면,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평온하게 삶과 마주하자'는 거라 했다. 나도 시인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낙타를 타고 가리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낙타/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언젠가 신경림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이다. 그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시와 교훈적이지 않은 시, 이데올로기에 엮이지 않는 시’를 꼽았다. 한마디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각과는 다른 개성 있는 시, 남이 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시가 좋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소통이 되는 시여야 하죠.” 타인과의 소통은 오랜 세월을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신 시인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한 말로,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해주고 해야지 원수가 되면 안 돼요. 나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재밌거든요? 상대가 엉뚱한 얘기를 하면, ‘어, 내가 생각 못한 거다’ 싶어서 즐겁습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 못해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거다. “쉽지 않죠. 불편할 때도 많지. 그래도 어떨 때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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