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누구나_혼자이지_않은_사람은_없다 #김재진 #물불_가리지_않기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18일)
어제도 말했던 요한 하리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에 따르면, 책이 아니라 화면으로 글을 볼 때 사람들이 내용을 훨씬 적게 기억하고, 대충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건 인터넷으로 글을 읽을 때 팝업처럼 튀어나오는 광고나 뉴스에 간섭을 받으면 집중력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특히 알고리즘 때문에 범죄, 주식 폭락, 정치 스캔들 같은 분노와 불안을 자극하는 기사가 더 눈에 띄다 보니 세상이 양극단으로 나뉘어 갈등하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이 책을 읽다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공감이 급속히 줄어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읽는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비소설 독서가 정보를 얻는 데 용이하지만,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들의 목표나 동기, 갈등을 따라간다. 왜 저렇게 행동할 까를 추측하고, 나와 다른 해결 방법에 감탄하거나 분노한다. 공감의 예행 연습인 셈이다. 동화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타인의 감정을 더 잘 읽는다는 연구 결과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급증하는 범죄와 갈등의 원인에는 공감의 부족이 있다. 소설 시장의 위축과 소설보다 잔혹한 혐오가 쏟아지는 세상 사이에서 사라지는 건 집중력만이 아니다. 집중을 요하는 모든 행위들, 가령 인내심이나 이해심 같은 가치가 빠르게 사라지며 사람들을 둘로 가르고 있다. 타인의 편에 서서 보는 ‘역지사지'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 ‘이야기'를 통해 강화된다. 구비문학 이래 인류가 소설을 읽어 온 이유다. 어제 했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홀로 독서하는 경험은 현재 위기에 처해 있고, 그것이 길러내는 공감 또한 그렇다. 독자와 필자들은 플랫폼 기술을 사용한다. 작가들은 이야기를 쓰기 위한 보조자로 인터넷을 통한 클라우드 소싱과 인공지능을 끌어드리고 있다.
우리의 도서 선택도 우리가 의지하는 플랫폼이 제공하는 카탈로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책보다 전자 도서를 스마트폰으로 읽는 사람이 많아졌다. 디지털 플랫폼을 사용하여 어떤 텍스트에 집중할 때 독자의 초점은 구체적 디테일을 소비하는 쪽으로 기울며, 텍스트에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들이 여럿이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읽는 사람들은 추론을 끌어내거나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깊이 있는 독서와 거리가 멀어진다.
좋은 책은 우리가 가까운 주변 환경을 무시하도록, 사적 생활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왕성해지는 상상의 공간 속에 빠져들도록 전력을 다해 훈련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주위 세계와 분리될 때 더 크고 더 멀리 있는 것, 이질적인 어떤 것에 연결된다. 그러니까 책 읽기는 홀로 있음 속의 연결이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보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 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지난 목요일에, 우리는 황산벌에 있는 선배님의 별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와인을 여러 병 준비하여, 주님을 모셨다.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산양리 일대이다. 영험한 계룡산 줄기가 연이어 둘러싸고 있다 하여 연산(連山)이라 부른다. 그 별장에는 선배님의 성품 답게 잘 정리된 텃밭과 정원이 함께 자리했다. 정원에는 온갖 봄꽃들이 시기하지 않고 자기 모습들을 뽐내고, 이곳 저곳에 말로만 듣던 나무들이 여러 종류였다.
황산벌 전투를 좀 그려본다. 김유신은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 사비성(현재 부여) 향하여 진격하였다. 지금 추정하는 것으로는 남천정(지금의 이천)까지 무열왕을 수행한 김유신은 다시 남하하여 삼년산성(지금의 보은)을 경유하여 지금의 옥천-대전-두마 지역을 거쳐 백제의 심장부로 들어갔을 것으로 본다. 백제의 최후 방어 요충지라 할 수 있었던 탄현은 대략 지금의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마도령(馬道嶺)으로 본다. 다행히 별다른 충돌 없이 탄현을 지난 신라군은 황산벌에 도착하였다. 이 황산벌이 어제 오후를 지낸 선배님 별장이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의 너른 들판이라고 본다.
황산벌은 동쪽으로 천호산이 자리 잡고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험준한 산세가 길게 뻗어 있어 좁은 협곡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사비성(현재 부여)까지 너른 벌판이 이어지기 때문에 탄현을 넘은 신라군을 소수의 군대로 맞아 싸우기에 그나마 적절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황산벌에서 계백은 비록 군사는 적지만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눠 거듭 네 번을 싸웠으나, 백제군의 결사적 항전에 오히려 매번 패퇴하고 전세가 불리 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 동생으로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흠순 장군이 아들 반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이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뒤이어 좌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이 역시 여러 차례 적진에 돌입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였다.
탄현을 지키지 못한 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 장군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 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영화 <황산벌>에서 남편의 칼에 죽음을 맞기 전, 계백 장군의 부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 나도 내 이름에 나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이런 곳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다음의 말을 잘 이해시키지 못했다. 와인 마시기는 '물불 가리지 않기'이다. 술이란 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러 주장이 있다.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다", "술시(戌時, 19시-21시)에 마시면 맛있다" 등이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술’이란 말에서 우리 훌륭한 ‘네이밍(naming, 이름 짓기) 기술을 지닌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술은 원래 ‘물 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를 뜻하는 ‘수불’에서 시작되어, “수불”, “수불”하다가 간단하게 ‘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술은 물과 불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술은 물과 불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 술은 그래 우리를 경계에 서게 하는 거다. 물같은 것과 불같은 것의 경계에서 물불을 못 가르는 거다. 물불 가리지 않는 거다. 그 경계에 있지 못하고 물에 있거나 불에 있거나 하면, '물불 가리는 거'다. ‘물과 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거나 맞서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불’은 비유적으로 어려움이나 위험을 이르기도 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위험이나 곤란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어떤 어려움이 위험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강행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실 불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협심하여 어떤 일을 거침없이 밀어붙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빠뜨릴 수도 있다. 또한 물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서로 배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상대에 의지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촌각을 다투는 결정 앞에서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물과 불이 함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잠자고 있던 열정을 달구기 위해,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은 불을, 불은 물을 부단히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이 만남은 세상에 나와 다른 성질을 지닌 사람이 존재함을 깨닫는 과정이자 그와 어떻게 하면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열과 증발과 소화(消火)를 오가는 동안 물이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불이 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이 될 것이다.
나는 오은 시인이 자신의 글에서 말했던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했던 다음과 같은 풀이에 동의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술 마시기'는
- 당장은 맞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경험 해보기이고,
-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 걸맞은 것을 찾아 보기이며,
- 회피의 자리에 직면을, ‘어쩔 수 없이’의 자리에 ‘기꺼이’를 배치하기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물은 물끼리 어울리고 불은 불과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우물이나 불길에 자신을 가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편한 상태에 길드는 일은 관성에 젖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물이 깊다고, 불길이 뜨겁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다른 우물에는 무엇이 있는지, 불길 밖의 온도는 어떤지 헤아리지 않으면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전부인 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물불 안 가리고' 경계에 서는 것이 '술을 만나는' 일이라 본다. 그러나 물속에 불이 있으니 절제는 당연한 일이다. 아니면, 불에 다 탈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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