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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수련(修練)

1554.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3월 2일)

 

매주 화요일은 최근에 읽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새말새몸짓의 " 읽고 건너가" 3월의 책이 루쉰의 <Q정전>이다. 짧은 단편이지만, 생각할 것이 정말 많은 작품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문제는 지난 달의 책인 <이솝우화> 읽었다. 어서 오늘과 내일 끝마칠 생각이다. 최진석 교수가 <Q정전> 정하면서 의도를 말한 내용이 마음에 든다.

 

"세상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덤비면 이익이 없다. 모든 지적인 공부와 수련은 자기 멋대로 세상을 정하는 무지를 이겨내려는 겸손한 도전이다." 주변 사람들 많은 이들이 세상을 공부와 수련 없이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덤빈다. 나도 그렇지만, 그들은 <Q정전> 나오는 "정신승리법" 기대며 시간을 낭비한다. "정신승리법"이란 어려운 글을 읽지 않고, 수련도 하지 않으며,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며 "정신승리법" 이용한다. 그러다 가는 결국 좌절을 겪을 뿐이다. "모욕을 받으면서도 거기에 저항하기보다는 모욕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무력감과 노에 근성의 발로이다." 이미 여러 읽었지만, 3월에 다시 <Q정전> 루쉰의 다른 책들을 읽을 생각이다. 코로나-19 거리주기가 완화되면 <우리마을10대학> 주관으로 함께 읽기를 제안할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화요일에는 지금 읽고 있는 배철현의 <수련> 중심으로 '지금' '여기'라는 것에 대해 사유를 본다. 수련을 시작하려면, 감추고 싶은 나를 마주하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 중에 지금이 가장 중요하고, 공간은 여기이다. 사실 나를 온전한 ''로 인정해 주는 것은 둘이다. 하나는 ‘지금’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라는 장소다. ‘지금’과 ‘여기’가 없다면, 나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만물을 현존하게 만드는 존재의 집이다. 과거를 삭제하고 미래를 앞당겨 이 순간을 종말론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이라면, ‘여기’는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생경한 나로 전환시켜주고 더 나은 나로 수련 시키는 혁명의 장소다.

 

'지금'은 과거와 미래가 하나 되는 시간이다. 내일은 가장 무서운 단어이다. 마귀가 내일이라는 영어 단어 'tomarrow(투마로우, 내일)'를 가장 즐겨 쓴다고 한다. 내일은 내 인생이 아니다. 그러니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가장 어려운 것이 시작이다. 시작은 늘 불안하다. 왜냐하면 시작이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이 3 가지가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3월의 본격적인 시작이 오늘이다. 어쩌면 한해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오늘 개학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말로는 '헝트레(rentrée)'라고 한다. 다시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1) 과거와의 매정한 단절, (2)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3) 지금-여기에 대한 확신과 집착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항상 ‘저기’를 바라보고 여기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지 않고 상대방이 아닌 허상을 떠올리고 말한다. 자신의 편견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데 안달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지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시한다. 그들에게 대화와 토론은 자화자찬의 전시장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창피주기 위한 격투경기장이다. 그들의 머리는 항상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허상에 사로잡힌 장소인 ‘저기’에 홀려 있다. ‘저기’를 위해 ‘여기’를 어리석게 희생시킨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동물이, 사물이 ‘신()적’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신적인 존재는 항상 ‘여기’에 온전히 몰입한다. 내가 보는 모든 식물과 동물은 항상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어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유일하고 독특하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저것’을 흉내 내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읽은 혹은 들은 정보를 가지고 대답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노자가 이렇게 말했고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혹은 괴테가 이런 식으로 표현했고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노래했다.” 자신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의 반복은 진부(陳腐)하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썩은 고기의 악취일 뿐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누구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를 받아 종종 죽임을 당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인용했는가? 노자가 도덕경을 들먹였는가? 셰익스피어는 단지 셰익스피어일 뿐이다. 괴테는 스스로 고민하고 인생의 해답을 나름대로 찾으려는 파우스트였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아직 멀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공부를 자신하고 상관없는 숫자와 정보를 암기하고 신속하게 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가진 핸드폰에 저장된 정보가, 서울시 전체 인구가 지닌 지식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 공부는 개인의 지닌 유일한 개성을 자극하는 체계다. 공부는 그 존재가 더욱더 그 존재 답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다.

 

어제는 봄비 치고, 비가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내렸다. 봄비 소리를 들으려고 아침에 나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도전을 했다. 봄비가 여름 장마처럼 내렸지만, 그래도 가뭄에 단비라 예뻤다. 비는 자기 차례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이다. 여름 비에 열매들이 튼실해지고, 가을 비에 나뭇잎 보내고, 뤈하게 벗은 나무에 결을 주는 겨울 내리듯이, 봄비가 내리면,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봄비/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 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여기’와 ‘저기’의 경계가 타부(taboo)이며 ‘현관(玄關)'이다. 이 경계에는 항상 괴물이 등장한다. 이 경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하다. 그 괴물은 오랫동안 수련하고 준비하지 않은 자들을 과거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는 비극적인 인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고향 테베로 들어갈 참이다.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도시 성문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 스핑크스Spinx는 그리스어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 대상을) 목 졸라 줄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이름처럼 ‘발이(푸스) 퉁퉁 부어(오이디)’ 스스로 걷지 못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어릴 때부터 자립할 수 없도록 두 발을 실로 꽁꽁 묶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불행하게도 오이디푸스의 발에 묶인 실이다. 현대인들은 손목에 명품시계를 찾고 있지만, 태양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일생 세련된 차를 타고 다니지만, 그들은 결국 발에 힘이 없어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존한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자신의 발을 마비시켰던 실을 푼다. 그는 스핑크스에게 대답한다. “인간이다!” 그는 이제 그 해답을 자신으로부터 찾는다. “인간이다”라는 대답은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의미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은 인도경전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큰 가르침을 산스크리트어 문장인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곧 “그것은 바로 너다!”와 같다. 이 말의 의미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은 바로 너 자체, 너라는 존재 안에서 발견되고 발굴되어야 한다”다.

 

‘여기’는 나를 인식하고 혁신 시키는 유일한 장소다.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노예를 해방시킨 모세는 어떤 인간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타부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곳에서 불에 연소되지 않는 신비한 가시덤불을 발견한다. 그가 가까이 가자, 그 덤불 속에서 미세한 침묵의 목소리가 들려 나온다. “가까지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장소를 거룩하다. 신발 벗어라.” ‘네가 서 있는 장소’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 단어 ‘함-마콤’(ham-maqom)은 유대인들에게 신이 계신 특별한 공간을 의미한다. ‘함-마콤’의 축자적인 의미는 ‘내가 서 있는 이 곳, 내 앉아 있는 이곳’ 즉 ‘여기’다. 내가 나를 더 나은 나로 개선할 수 있는 장소는 ‘여기’밖에 없다. 만일 내가 여기를 소홀하게 여기고 저기만 추구하다면, 여기는 곧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여기를 구별하여 성스러운 장소를 여긴다면, 여기가 곧 천국이다. 나는 오늘 내가 서 있을 장소를 어떻게 여길 것인가? 나는 오늘 내가 만드는 ‘여기’라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노자가 말한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저 멀리 걸려 있으면서 우리를 지배하려 하는 이념들과 결별하고, 바로 여기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 자신의 욕망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삶, 그것은 어떤 거대한 기회가 찾아올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내 삶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기적은 시작된다. 경계해야 것은 우리들의 탐욕이다. 탐욕은 먼데를 보고 있어서 바로 앞에 있는 행복을 못보게 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찾는 정신이 '거피취차'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획일적인 욕망 속에 있다는 것이다. , 지위, 학벌, 권력, 이런 것들말고도 다양한 가치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다양하게 욕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문명은 언제나 회고적이고, 문화는 변명이다. 우리는 어리석게, 과거 깨달음에 대한 기록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예상하고 대처하려 한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시간과, 시간이 만든 장소 안에 매 순간에 입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해답을 과거에서 찾으려 시도한다. 우주가 창조된 이후, 시간은 멈춰선 적이 없고 장소는 원래 그대로의 상태로 머문 적이 없다. 지금을 직시하여 그것에 어울리는 방안인 '혁신'만이 해답이다. 혁신은 과거를 유기하려는 용기이며, 미래를 지금-여기에 당겨오려는 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