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매주 목요일 오후에 <장자> 함께 읽기를 하는 데, 일이 있어 오늘 아침에 읽었다. 드디어 제4편 '사람 사는 세상(인간세)'를 끝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이야기 하는 <인간세>의 논지는 세속적으로 보아서 쓸모가 있으면(有用하면) 위험하니 무슨 일이든 유용하게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세속적으로 보아서'에 방점을
찍고 싶다.
그러니까 무조건 유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데 유용하겠다고 설치거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유용해야 한다고 애를 쓰면 정말로 유용할 때 유용할 수 없으니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쓸모 있음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다. 큰 나무가 소를 가려주고, 사당의 상수리 나무가 사당에 유용한 것처럼 쓸모 있음의 용도와 스케일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작은 나무가 제 유용성만 생각하고 하루라도 빨리 유용하게 쓰라고 주장하면서, 제 몸을 아궁이에게 던졌다고 하자, 이럴 경우 더 기다렸다가 거목이 되면, 아궁이에서 잠깐 동안 열을 공급하는 유용성과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유용성, 이전과 차원이 다른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에서 말하는 '쓸모 없음의 쓸모'란 쓸모의 극대화를 말하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지인(至人)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 심재(心齋)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장자가 말하는 '쓸모 없음의 쓸모'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읽어야 한다고 본다. 1층위는 지난 4월 26일자 <인문일기>에서 이야기를 했고, 2층위는 4월 17일자 <인문 일기>에서 공유했다. 오늘은 지난 번에 다 하지 못한 두 번째 층위 이야기와 이어서 세 번째 층위 이야기를 하려 한다.
(1) '쓸모 없음' 그 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다.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유용(有用)하면 일찍 명(命)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용(無用)하지만 그게 결국 유용(有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쓸모 있음을 위해 꾸준함으로 일상에서 수련해야 한다.
(2) 문제는 쓰임이 있다해도, 더욱 값진 쓸모가 있는데도 값싸게 쓰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딱한 일이다. 그러니 자기를 잘 알고, 그냥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데 써 버리고 말 것이 아니라, 더 큰 쓸모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3) 최고의 단계는 쓸모 있음은 쓸모 없음을 알아야만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의 경계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며 천수를 누리는 길이다. 그건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
<장자>의 제4편 '인간세' 34장 이야기를 공유한다. "송나라 형씨라는 곳은 개오동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었다. 굵기가 한 움큼이 넘는 것은 원숭이 매어 두는 말뚝 만드는 사람들이 베어 가고, 서너 아름 되는 것은 집 짓는 이가 마룻대 감으로 베어 가고, 여덟 아름 되는 것은 귀족이나 부상들이 널 감으로 베어 가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도끼에 찍혀 죽었다. 이것은 스스로 재목감이 됨으로 당한 재난이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힌 소나 코가 젖혀진 돼지, 치질 앓는 사람은 황하 신의 제물로 바칠 수가 없다. 무당들은 이것들을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지만, 신인들은 오히려 이를 크게 상서로운 것으로 여긴다."
이 이야기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관계를 말한다. '쓸모 있는' 나무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잘려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나무의 목적이란 천수를 누리고나서 시들시들 말라 죽는 것 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각자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급하게 조그만 "쓸모"에만 집착해서 살아가는 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고 거기에 목을 메고 사는 일은 곤란하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구의 주관적 '쓸모'의 기준에 따라 쓰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다. 천박하게 이해한 실용주의나 실리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라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 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 "때로는 한눈팔아도 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오늘 사진은 쓸데 없이 도시를 거닐다가, 한 조형물을 바짝 대고 찍은 것이다. 이 조형물이 어떻게 생겼을까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한눈팔아도 된다/유안진
선생님, 색칠이 자꾸 금 밖으로 가요
괜찮다,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겠냐
뻥튀기 구경하다 지각했어요
괜찮다, 지금 한눈팔지 않으면 언제 그러겠냐
길가의 강아지풀 꼬리가 패였는지
개미와 송장메뚜기를 구경해도 된다
낮달과 구름을 쳐다봐도 된다
소나기에 흠뻑 젖어 와도 된다
쇠똥구리네 집이 쇠똥인지 땅 구멍인지
놀며 구경하다가 와도 된다
어디나 언제나 학교이고 공부시간
누구나 무엇이나 선생님이란다
때로는 길 밖에서 더 잘 자랄 거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럴 시간 있겠느냐.
"인간세" 35장에는 곱추의 특권 이야기 나온다. "지리소(支離疎, 이름이 다 말해준다)라는 곱추는 (…) 바느질을 하고, 빨래를 하면 혼자 먹을 것은 충분히 벌고, 키질을 해 쌀을 까불면 열 식구 먹을 것은 충분히 벌었다.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들 사이를 당당하게 다녔고, 나라에 큰 역사가 있어도 성한 몸이 아니라 언제나 면제를 받았다. 나라에서 병자들에게 곡식을 배급하면 3종의 곡식과 장작 열 단을 받았다. 이처럼 외모가 온전하지 못한 곱추도 몸을 보존하고 천수를 다하는 데, 하물며 그 덕이 곱추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맨 마지막 문장이 어렵다. 오강남은 이렇게 풀이한다. 덕이 곱추인 사람은 덕이 지리(支離)한, 도덕적으로 지리멸렬한 사람, 막돼먹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리소는 몸이 이렇게 막돼먹어서 이른바 군대에 들어가 장군을 생각할 수 없고, 부역에 충실해서 고위직 자리를 꿈꾸지 못한 채, 그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근면함으로 그렇게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아 지리멸렬, 뒤죽박죽이 되어, 이른바 일사불란한 체계나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니 하면서 일반적으로 훌륭한 덕이라고 떠드는 통상적이고 일률적인 가치 체계나 사고 방식 등을 무조건 숭상하거나 거기에 지배 받는 일 없이, 자신의 처지에서 욕심이나 허세 부리지 않고 자유롭고 차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청복(淸福)이라 한다.
일상적 의식의 합리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사람을 보면, 아주 흐리멍덩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뭇사람의 이해를 얻지 못해 외로운 법이다. 이를 우리는 "실존적 고독"이라 한다.
그리고 노자 같은 성인이 "덕이 곱추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 제20장에서 자신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독하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자유스러운 사람이다. 노자처럼, 덕이 곱추인 사람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다.
앞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쓸모 없다'고 하는 이런 몸으로 이렇게 잘 살아가니, 이것이 "쓸모 없음의 쓸모"라는 말이다. 지리소는 이름 그대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아무렇 게나 뒤죽박죽 생긴 엉성한(疏) 사람이다. 그는 바느질, 빨래, 키질 등을 해서 잘 먹고 살 뿐만 아니라 군대로 끌려가거나 부역에 불려 나갈 걱정이 없는 데다 나라에서 주는 후생비까지 받으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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