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4월 25일)
1
목련이 지고, 새로 나오는 잎새들을 나는 좋아한다. 둥글고, 곡선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말이다. 자연은 곡선의 세계이고, 인공은 직선의 세계이다. 산, 나무, 계곡, 강, 바위, 초가집들의 선은 모두 굽어 있다. 아파트, 빌딩, 책상 같은 도시의 모든 것은 사각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곡선이고, 죽은 것은 직선이다. 어쨌든 도시나 산촌이나 사람만은 곡선이다. 아직은 자연이다. 5월이 되기 전, 모든 나무들의 아기 같은 새 잎들을 보면, 나는 <곡선을 기르다>라는 시를 기억한다.
곡선을 기르다/오새미
곡선을 기르는 나무
잎사귀나 꽃은
직선이 없고 곡선만 있다
무성한 줄기로 슬픔과 배려를 기르며
숲도 달빛도 동반자라고 가르친다
직선을 선호하는 사람
꺾일 수도 떨어질 수도 있어
엄마 젖을 먹으며 자라는 아기를
곡선으로 기른다
둥지 잃은 산새와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의 울음
둥글게 드리운 산그늘이 감싼 붉은 이슬
곡선이 아니고는 품을 수가 없다
나무를 가꾸며 꽃을 피우고
사람까지 키우는 곡선
봄 산을 오르다 무더기로 피어난
제비꽃과 철쭉에 멈춰서는 발걸음
햇살의 그림자와 바람의 손길
눈앞이 곡선의 세상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난 22일에 이어 <지산 겸> 괘의 효사들을 읽고 공유한다.

2
'초육' 효사는 "初六(초육)은 謙謙君子(겸겸군자)니 用涉大川(용섭대천)이라도 吉(길)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초육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큰 내를 건너더라도 길하다'가 된다. TMI: 用: 써 용(以)·쓸 용, 涉: 걸어서 건널 섭. '초육'은 양자리에 음으로 있고, <지산 겸> 괘의 맨 아래에 있다. 겸손한 괘체에서 맨 아래에 처하고 또한 음으로 있으니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다. 이렇게 겸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군자는 큰일을 시켜도 능히 이루어 낼 수 있다.
<지산 겸> 괘는 겸손을 말하는 괘이다. '초육'은 가장 낮은 자리이니 겸손 중에 겸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겸손하고 또 겸손한 군자는 큰 일을 도모해도 잘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로울 것이다'라는 뜻인데, "이섭대천" 대신에, "용섭대천(用涉大川) 길(吉)"을 사용한 것은 '이로움(利)보다 길함(吉)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이 표현은 <지산 겸> 괘에서만 등장한다.
내호괘는 <감수괘>로 대천(大川)의 상이다. 외호괘는 <진뇌괘>로 대천을 건너 나아가는 상이 나온다. 그리고 '초육'이 동하면, 지괘는 제36괘인 <지화(地火) 명이(明夷)> 괘가 된다. <지화 명이> 괘의 괘사는 "明夷(명이)는 利艱貞(이간정)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명이(明夷)는 어려운데 바르게 함이 이롭다"가 된다. 어려운 때일수록 바르게 해야 이로울 것이라는 거다. <감괘>는 어둡고 추운 곳이다. 시련이다. "대천을 건넌다는 것", '큰 일을 시도하는 것'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절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겸겸군자(謙謙君子)만이 그 시련 속에서도 바른 자세를 잃지 않기에 대전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謙謙君子(겸겸군자)는 卑以自牧也(비이자목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낮춤으로써 스스로 기른다.” TMI: 牧:기를 목. '초육'의 겸손하고 겸손함은 스스로를 낮추어 덕을 기르는 것이다. "겸겸군자"가 높이지 않고 낮춤으로써 자기 자신을 수양한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는 거다.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으니 과감히 나아가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제 뭐든 다 이루어질 거야"라는 자기 긍정이 자만으로 변질되는 순간, 큰 물 속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길(吉)'의 이면에는 언제나 '흉(凶)'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크게 성취할 것이라고 암시했을 뿐, 그것을 실제 결과로 연결시키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태도가 바르지 않게 변하면 결과도 그에 따라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육이' 효사는 "六二(육이)는 鳴謙(명겸)이니 貞(정)코 吉(길)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이는 겸손함을 울리니, 바르게 하고 길하다'가 된다. TMI: 鳴:울 명·울릴 명. 겸손함이 알려질수록 바르게 하면 길할 것이라는 거다. '육이'는 내괘에서 중정한 자리에 있어 억지로 겸손 하려고 하지 않아도 겸손함이 저절로 울려 퍼지는 상이다. 내괘의 <간산(艮山, ☶>으로 덕이 있는 상태에 <육이>가 변하면 <손풍(巽風, ☴>이 되니 더욱 겸손하다. "손위계(巽爲鷄)"와 "손위풍(巽爲風)"에서 "명(鳴)"의 상이 나온다. 중정한 '육이'의 겸손함이 닭의 울음처럼 세상에 울리는 것이다. 바람을 타고 세상에 퍼지는 것이다.
겸손함이 알려질수록 바르게 하락하라고 <<주역>>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길하기 때문인데, 공자는 그 까닭을 마음속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소상전>이 그렇게 말한다. "象曰(상왈) 鳴謙貞吉(명겸정길)은 中心得也(중심득야)라."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겸손함을 울림이 바르게 해서 길함은 중심을 얻은 것이다'가 된다. '육이'의 중정한 상에서 "중심"이 나온다. "득(得)"은 '얻다'는 뜻이고, 가운데 마음으로 얻은 것이니 마음 속으로 깨달은 것이다. 겸
'육이'가 동하면 지괘는 제46괘인 <지풍 승> 괘가 된다. 이 괘의 괘사는 "升(승)은 元亨(원형)하니 用見大人(용견대인)로대 勿恤(무형)코 南征(남정)하면 吉(길)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승(升)은 크게 형통하니, 대인을 보되 근심하지 말고 남쪽으로 가면 길할 것이다'가 된다. 매우 형통하니 대인을 만나라. 근심하지 말라. 남쪽으로 나아가면 길할 것이다. 승(升)은 겸손하고 순한 덕으로 승승장구하게 잘 자라는 상이니 크게 형통하다. 이렇게 잘 자라는 상황에서도 항상 보살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 근심하지 말고 밝고 따뜻한 남쪽으로 가면 길하게 된다.
<지산 겸> 괘 '육이'는 '구삼'과 상비(相比) 관계에 있다. 겸손하게 '구삼'을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을 쳐서 <지산 겸> 괘 '육이'를 얻으면, 윗사람이나 선배의 도움이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겸손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능력 있고 태도까지 바르기에 사람들이 '육이'를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 지는 것이다.
4
'구삼' 효사는 "九三(구삼)은 勞謙(노겸)이니 君子(군자) 有終(유종)이니 吉(길)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구삼은 수고로워도 겸손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으니 길하다가 된다. TMI: 勞:수고할 로. '구삼'은 일양오음(一陽五陰)의 겸괘(謙卦)에서 유일한 양(陽)이다. 내괘 <간 산, ☶> 괘의 위에 처하여, 큰 덕으로 다섯 음을 대신하여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니 수고로운 상태이지만, 겸손하게 일을 수행해 나간다. 이러한 군자는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게 되니 길하다. 노고를 다하고도 겸손한 군자에게는 유종이의 미가 있으니 길할 것이다. 수고로운 일을 했어도 뽐내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거다.
'구삼'은 <지산 겸> 괘의 유일한 양으로 수많은 음과 화합한다. 외괘인 <곤지 괘>의 아래 <간산 괘>가 잇으니 '구삼'이 있는 곳은 땅 밑에 감추어진 산 정상이다.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있는 큰 사람이다. "군자유종(君子有終)"은 <괘사>에 나와 있다. 따라서 "군자유종"을 효사로 쓴 '구삼'이 주효(主爻)가 되는 것이며, "노겸(勞謙)"이 진정한 군자의 겸손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계사 상전>>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수고로워도 겸손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으니 길하다”고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노고를 다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이 있어도 자신의 덕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돈후함의 초고치(두터움의 지극함)이다. 공이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덕은 성대하게 메풂을 말하는 것이고, 예는 공손함을 말하니, 겸손이란 것은 공손함을 이루어서 그 자리(位)를 보존하는 것이다(勞謙이니 君子 有終이니 吉이라하니 子曰 勞而不伐하며 有功而不德이 厚之至也니 語以其功下人者也라. 德言盛이오 禮言恭이니 謙也者는 致恭하야 以存其位者也라)." 이 대목에서 "유종지미(有終之美)"에 egks rhdwkdml 생각이 "예를 다하여 그 자리를 보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때 잘나가더라도 결국 끝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마무리가 아름다워야 한다. 자리도 그런 것이다. 웬만해서는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고 공자는 인식하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직분, 자기 소명에 한결같이 충실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勞謙君子(노겸군자)는 萬民(만민)의 服也(복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수고로워도 겸손한 군자는 모든 백성이 복종한다'가 된다. TMI: 服:옷 복·잡을 복·좇을 복·행할 복·다스릴 복. 노고를 다하고도 겸손한 군자에게는 만민이 따르는 것이다. <지산 겸> 괘 '구삼'은 유일한 양으로 온갖 일을 도맡아 수고롭게 일을 하면서도 겸손하니, 모든 백성이 '구삼'을 따르고 복종하게 된다.
'구삼'이 동하면, 지괘는 제2괘인 <중지 곤> 괘가 된다. 이 괘의 '육삼' 효사가 "六三(육삼)은 含章可貞(함장가정)이니 或從王事(혹종왕사)하야 无成有終(무성유종)이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삼은 빛남을 머금어 가히 바르게 하니, 혹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룸은 없되 마침은 있다'가 된다. 학문을 익히는데 성심을 다하면 나랏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루는 것 없이 마칠 것이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지 곤> 괘 '육삼'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含章可貞(함장가정)이나 以時發也(이시발야)오 或從王事(혹종왕사)는 知光大也(지광대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빛남을 머금어 가히 바르게 하지만 때로 발하고, 혹 왕의 일을 좇음은 앎이 빛나고 큰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이시발야(以時發也)"라고 했으니, 학문을 익히는데 성심을 다했는데 적절한 때를 만나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학문을 익히는데 성심을 다하지 않았거나, 성심을 다했어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드러나기 어렵다. 좋은 운까지 만나 공직에 등용되게 되면 "광대(光大)"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광(光)"은 '육이'의 <소상전>에 나오는 땅의 도(지도, 지도)의 밝음이고, "대(댜)"는 '육이 효사의 "직방대(直方大)"의 대이니, 하늘의 큰 이치이다. 즉 "광대"를 알면 이루고 마치게 될 것(유성유종)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성유종과 유성유종의 차이를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하늘의 큰 이치를 깨닫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지산 겸> 괘 '구삼"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까닭은 하늘의 이치를 알아 노고 다하고도 한없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을 가능한 한 예쁘게 포장해서 SNS에 드러내는 것은 "shra"과 거리가 매우 먼 행위임을 알 수 있다.
5
"노겸"이라는 말은 노자가 꿈꾸는 '성인(聖人)'의 태도와 맞닿는다. 성인은 다음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본다.
(1) 성인처무위지사(聖人處無爲之事)하고,
(2)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하고,
(3)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하고
(4) 생이불유(生而不有)하고
(5) 위이불시(爲而不恃)하고
(6)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하고, 부유불거(夫唯弗居)하면, 시이불거(是以弗居)하다.
이를 쉽게 말하면, 성인, 즉 자유인은
(1)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2)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3) 모든 일이 생겨나게 하지만 참견하지 아니하고,
(4) 낳았으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5)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6)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내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爲而不恃(위이불시)"는 '도(=성인)'은 "만물이 잘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 되어가는 모습에 기대지 아니한다"는 거다. 여기서 "시(恃)"는 '기댄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도덕경>>의 여러 장에서 되풀이된다. 제10장에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낳으면서도 나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가믈한' 덕이라 한다. 제51장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제77장에서는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현현(是以聖人委而不侍,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이 자라도록 만들어가며 그 성취에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서 처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슬기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는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거하지 아니 한다"는 거다. 자신이 공을 쌓고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해 놓고도 뽐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성취한다 할지라도 그 열매를 독차지하고, 그 성과를 따먹으면서, 그 성과 속에서 안주하는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벗어 내버리는 거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삶의 속도를 줄이고, 내 일상을 좀 더 향유하고 싶다. (2) | 2025.05.01 |
|---|---|
| 마음의 주인이 되라. (5) | 2025.05.01 |
| 프랑스는 노동절에 은방울꽃을 지인이나 동료에게 선물한다. (1) | 2025.05.01 |
| 정원과 텃밭은 다르다. (0) | 2025.05.01 |
| 오늘은 노동자의 날이다. (0) | 2025.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