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25일)
노자 <<도덕경>>은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은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풀이한다.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1. 자연은 말이 없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나도 처음 <<도덕경>>을 읽을 때는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보통 큰소리로 말을 많이하며 자기 과시를 하거나 길게 논리를 늘어 놓으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러나 "희언자연"을 만나고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천지(하늘과 땅)가 합하여 온갖 일을 이루어 내지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하지 않는다는 거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는 등 자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것을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말로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말은 중요하다.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배 철현교수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감동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그 말을 '다바르(dabar)'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의미도 지니고, 그 말이 실행된 '사건'이란 뜻도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말은 잘 하고, 실천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즉 말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말로 공수표를 쓴 것이다. 말이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며 악이 된다.
못 배운 사람, 문명적이지 못한 야만적인 사람은 자신이 던진 말의 결과를 헤아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어,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악취가 나는 험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그래 나는 다음 말을 좋아했다. 노자의 "희언자연(希言自然, 긴 말 없는 게 자연이다)" 그리고 공자의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이 언제 말하더냐!)". 그래 나는 늘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낸 보석이라고 보았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말(言)에 해당하는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있다. 로고스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문법'이다. 이를 동양 철학에서는 '도(道)'라고 본다. 나는 이 '도'를 '삶의 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법은 문자가 발명되고 더 중요해 졌다. 글 뿐만 아니라,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문법을 숙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즉 언행이 다듬어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로부터 지적 받아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법'이란 이타심에서 나온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를 말씀 대신 로고스라고도 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에서 로고스는 '인간 세상을 문법으로 움직이는 에너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말은 에너지인 셈이다. 인간은 두 발로 서면서 얼굴이 생기고 말을 하면서, 그 말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우연한 경험을 기초한 생각은 타인을 부정하는 구별을 만들지만, 로고스를 통한 새로운 안목은 타인을 나의 일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바로 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구별된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배 철현교수에 의하면, 그 말을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은 '다바르'라고 불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라고 명명"하였고, "갠지스 강의 시인들은 '다르마(dharma)로 이 말을 가슴에 품었고, 중국인들은 '언'이라고 여겨, 입으로 나오는 소리로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였다" 한다. '다르마'란 산스크리트어는 중국으로 와 '법(法)'이 된다. 여기서 '법'이란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한 법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한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이치이자 도리이다. '법(法)'이란 한자어를 풀면 '수(水, 물)'과 '거(去, 가다)'가 만나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만물은 흐른다. 말도 그렇다.
그런 흐름으로 말은 말을 낳는다. 말은 리듬과 파동을 수반하며, 소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따라서 말하기와 듣기는 하나이다. 그래서 태초의 인류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무딘 것이 '청각'이라 한다. 그런데 그 '귀'가 '트이면'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고 한다.
다시 <<도덕경>> 제23장으로 되돌아 온다. 하늘과 땅도 가끔씩 말을 하기는 한다. 가끔씩 회오리 바람이나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가 하늘과 땅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천지의 말도 아침 마절이나 하루 이상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천지도 이렇게 가끔씩 짧게 말할 뿐인데, 어찌 사람이 그토록 오래 말을 계속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 가 하는 이야기다. "희언자연"에 대한 다른 해석들은 내일로 넘긴다.
어제는 매우 좋은 봄날이었다. 모처럼 일요일이었고, 동네 5일장이 서는 날이었고, 오후에는 대전챔버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가 있었다. 그래 기분 좋게 외출을 했다. 그리고 봄날을 즐겼다. 이 때면 늘 기억하는 시가 황인숙 시인의 <봄노래>이다. 오늘 공유한다.
봄 노래/황인숙
낮잠 좀 자려는데
동네 아이 쉬지 않고
대문을 두드리네.
"공좀 꺼내주세요!"
낮잠 좀 자려는데
어쩌자구 자꾸만
공을 넘기는지.
톡톡톡 누가
창문을 두드리네.
"하루해 좀 꺼내주세요!"
아아함, 낮잠 좀 자려는데.
마음껏 꺼내가렴!
대문을 활짝 열고
건들건들 거리로 나섰네.
아아함, 아아함
낮잠 좀 자렸더니.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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