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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의 화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이 말은 '쓸모 없는 것의 '쓰임'이라는 뜻으로서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별로 쓰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도리어 큰 쓰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쓸모 없음의 쓸모' 이야기는 <장자>의 여러 곳에 나온다. 내가 알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1편 '소요유' 12-14장, 제4편 '인간세' 28-33장, <장자> 외편인 '산목'편 그리고 "외물"편에 나온다. 이번 주는 차례로 공유해 볼 생각이다. 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1) '쓸모 없음' 그 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다.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유용(有用)하면 일찍 명(命)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용(無用)하지만 그게 결국 유용(有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쓸모 있음을 위해 꾸준함으로 일상에서 수련해야 한다.

(2) 문제는 쓰임이 있다해도, 더욱 값진 쓸모가 있는데도 값싸게 쓰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딱한 일이다. 그러니 자기를 잘 알고, 그냥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데 써 버리고 말 것이 아니라, 더 큰 쓸모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3) 최고의 단계는 쓸모 있음은 쓸모 없음을 알아야만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의 경계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며 천수를 누리는 길이다. 그건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

오늘 아침 시는 바쁜 사람에게는 '쓸모 없음'일 것이다. 지난 주에 한 후배가 와서 시어머니 발톱을 깎아 준 이야기를 했다. 나이를 먹으면 손톱깎이를 쥘 힘이 없어 발톱을 혼자 못 깎는다고 한다. 난 몰랐다. 그래 언젠가 적어 두었던 오늘 아침 시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
나라에 가신 어머니가 생각나고, 내 삶이 되돌아 보아진다. 이게 시의 쓸모 있음이다. 오늘도 소유와 증식의 길에서 정신 없이 달려야 할 사람들에게 좀 쉬라고 하고 싶다. 욕망의 배치를 다르게 하면, 일상이 훨씬 단순 해진다.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 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장자>는 대부분이 다 우화(寓話)이다. 오늘 내 사유의 흐름을 위해, 1편 소요유 14장을 공유한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이지. 길가에 있지만 대목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지금 자네의 말은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거네."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너구리나 살쾡이를 본 적이 없는가? 몸을 낮추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다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이 뛰고 낮게 뛰다 결국 그물이나 덫에 걸려 죽고 마네. 이제 들소를 보게. 그 크기가 하늘에 뜬구름처럼 크지만, 쥐 한 마리도 못 잡네.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고을(無何有之鄕)' 널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무위)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는 자도 없을 걸세.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얼핏 읽으면, 쓸모 없게 사는 것이 차라리 해를 입지도 않고 오래 갈 뿐만 아니라,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냥 편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낭만적 태도로 보이기 한다. 그렇지만 장자가 말할 때,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장수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최고 단계의 성취를 의미한다.

위의 문장에서 쓸모 없음을 비판할 때, "먹줄을 치지 못하고", "자를 갖다 대지 못한다"고 표현되고 있다. 먹줄은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선을 긋는 데 사용하고, 자는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데에 사용한다. 재단하고 길이를 재기 위해서는 이 먹줄과 자를 피할 수 없다. 먹줄과 자란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기준이다. 만들어지는 어떤 것도 이 먹줄과 자의 지배력 아래서 생산된다. 먹줄과 자는 지배적인 능력을 가지고 군림한다. 문제는 세상이 먹줄과 자처럼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또 거기서 미래를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준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먹줄과 자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먹줄이 자가 변화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화에 따라 오히려 먹줄과 자의 쓰임새가 달라져야 한다.

변화에 맞춰 먹줄이나 자의 쓰임새가 습관적이거나 관습적인 사용법을 벗어나야 한다면, 아직 새로운 기준의 먹줄이나 자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접근은 분명히 쓸모 없는 것이라는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쓸모 없음'을 향한 새 도전 나서야 한다. 꿈 없는 작은 쓸모인 '기능' 추구 땐 본질 놓치고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정해진 기준만 따르는 것은 과거에 종속되고 미래로 발전 못 한다. '쓸모 없음'으로 큰 쓸모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도 달라진다. 이를 먼저 알아차리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필요하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기업들은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한다. 기업들은 항상 쓸모 있는 것들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면에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때라면, 쓸모 있는 것에 관한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 그 요구는 더 급할 수 있다. 사실 세상의 변화는 무엇이 쓸모 있는 것인가라는 말을 채워주는 내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런 쓸모 있는 것에서 저런 쓸모 있는 것으로의 이동이 변화의 실재 모습이다. 쓸모 없던 것이 쓸모 있어지거나 쓸모 있던 것이 쓸모 없어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 대응하는 것을 우리는 선견지명이라 한다. 흔히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자리잡기 전에는 쓸모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쓸모 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쓸모 있음에 갇혀서 쓸모 없음을 지향하는 동력을 상실하면 새로운 도전이나 모험은 불가능하다. 꿈을 가진 사람이 꿈 없이 기능만 행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룬다. 사실 지적 성장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아직 쓸모 없이 보이는 것을 향한 부단한 도전에 다름 없다. 쓸모 있음에 갇혀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대답'만 할 줄 알고, 쓸모 없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질문'이 없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https://paka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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