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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온전한 삶을 살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22일)

온전한 삶을 살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내면의 진정성에 가 닿을 때마다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준다. 우리가 내면의 안내를 충분히 따르지 못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약간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러면 다음에 내면의 진실과 바깥세상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할 때, 우리는 우리 삶을 이끌기 원하는 내면의 교사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잊거나 부인하기 힘들게 된다.

우리는 현실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다. 그는 악명 높은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복수심과 파괴적 욕망에 매몰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는 과거의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되짚어 가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그는 관찰하고 경청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정직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솔제니친은 또한 자신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뜯어보고 불필요하고 해로운 부분을 지워 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1973년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를 고발한 <<수용소 군도>>라는 작품을 냈다. 이 작품을 보고, 한 남자가 운명을 탓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병적인 시스템의 폭정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가 완전히 붕괴한다. 솔제니친의 용기가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기적의 주인공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박해 받은 작가였지만,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주의 체코 정권을 무너뜨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후에는 다시 한번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이다.

위대한 정신은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삶을 혐오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삶이란 것이 그렇다. 우리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체계를 세운다.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가를 만든다. 이런 체제의 밑바탕이 되는 원칙을 정하고 믿음의 체계를 만든다. 그러면서 성공이 계속되면 무사안일에 빠져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어렵고 귀찮고 안 좋은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린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그 전에 우리는 우리의 주변 환경을 작은 것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질문해 본다. ‘질문하는 연구소’의 설립자 마릴리 애덤스는 <<질문의 기술>>에서 질문을 ‘심판자의 질문’과 ‘학습자의 질문’으로 나눈다. “누구 탓이지?” “어쩌다 패배했지?” 라는 ‘심판자의 질문’은 사람을 불안과 패배감에 젖어 들게 하는 반면, “이 상황에서 배울 점은 뭘 까?”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은?” 같은 ‘학습자의 질문’은 긍정적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새로운 도전 의식을 준다는 게 책의 논지다.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서 읽었다. "공원을 걷다가 “나이 들어 좋은 것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한 선배가 “이젠 내 한계를 알아!”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제 못하는 걸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하겠다는 게 요지였다. 이 질문과 대답은 이후 일에 대한 내 태도를 크게 바꿨다. 이때 질문의 또 다른 이름은 ‘지혜’이다."

(1) 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100% 활용해 왔는가?
(2) 혹시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맥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3) 건강과 행복을 파괴하는 나쁜 습관은 없는가?
(4)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가?
(5) 주변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야 한다.

'분리된 삶'은 상처 입은 삶이다. 영혼은 그 상처를 치유하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 상처가 주는 고통을 잊으려고 술과 약물 또는 일과 쇼핑에 중독된다. 그리고 개인에게는 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분리된 삶이 사회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사회 제도는 온전한 사람을 사는 이들에게 벌할 때가 많다. 그러나 평생 동안 거짓된 삶을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부름 대로 살아가면 자신이 하는 일에 좀 더 충실하고,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 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영혼과 역할을 다시 결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자기 내면과 바깥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고 개인의 성실성과 공공선을 모두 성취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린 시절 "기쁨의 날개를 단 에너지"에 대해 쓴 시인 릴케는 같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내 실천의 힘을 붙잡아 그것을 내뻗어라/두 모순의 갈리진 틈에/다리를 놓을 때까지, 신은/네 안에서 그 자신을 알기 원하므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에 있는 신성한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 분리의 벽을 넘어서, 영혼과 역할이 만나야 한다.

릴케의 <인생>이란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즐겁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꽃잎을 모은들 그것이 얼마나 갈까. 아이들처럼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인생은 족하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쥐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 앞에서는 헛것들일 뿐이므로." (은미희 작가)

인생/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곳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떼어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꽃잎으로 손을 내밀 뿐

오늘 아침 사진은 지난 주 계룡산 도예촌을 산책하다가, 어느 집의 정원에 있는 것을 찍은 거다. 아직도 4월인데, 거리의 나무들은 벌써 연두를 잃고 초록을 건너 수채화가 유화가 되어간다. 삶과 생존은 다르다. 진정한 삶은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생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낸 것을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세네카는 삶이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치자.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누구나 바라는 장수가 오랜 인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세네카의 통찰이 놀랍다.

내 삶의 사자성어는 "지족상락(知足常樂), 수분자안(守分自安)" 중에 '수분자안'이다. '지족상락'은 '족함을 알면 늘 즐겁다'는 뜻이다. 족함을 아는 것은 현재에 체념하거나 안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를 긍정하면서 밝은 내일을 위해 즐겁게 노력한다는 밝은 마음이다. 흔히 사람들은  "지족상락(知足常樂), 능인자안(能認自安)"이라 말한다. 여기서 '능인자안'은 '참고 견디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말이다. 나는 이보다 "수분자안(守分自安)'이 더 낫다고 본다. 이건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말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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