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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제의 결정을 반추해 보았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 피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를 존중할 수 없다면 따로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 지난 3월 12일에 썼던 <인문 일기>를 다시 소환한다. 장자는 성심과 사심을 버리고 허심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장자의 주장은 부정의 소극적 사유나 현실 도피적인 초월적 사유가 아니라, 부정의 부정을 통한 세계 긍정의 적극적인 사유이다. 나를 부정의 부정으로 몰아 긍정의 에너지를 되찾고 싶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시치미" 떼고.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 두는 인식표를 말한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를 훔쳐 시치미를 떼어버리고는 새 시치미를 붙여 자신의 매라 주장했다 한다. 그래 '시치미를 뗀다'라는 말의 유래가 여기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뻔뻔해 졌다. 수줍음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너무 수줍음이 많아 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수줍음은 사라졌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위대한' 수줍음이 되었다. 뻔뻔해 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시치미 떼기의 명수가 되어야 돈도 많이 벌고, 남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 꼭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해, 라는 의문이 자꾸 든다. 잃어버린 수줍음을 어디에 가서 찾아올까?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의 '멋진' 덧붙임을 갈무리 했다.

시치미 떼기/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 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일상이 복잡하고 얽혀 있다할지라도, 지금-여기서  편안한 상태를 얻을 수 있는 ‘동어대통(同於大通,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됨)’의 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해지는 삶의 길인 가’ 질문을 해 본다.

장자는 북명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큰 새로 변신하여 남명을 향한 사유 여정에서 도달한 목적지가 ‘나 없음’(無己, I'm nobody.)라는 것과 ‘나 없는 마음’(虛心, I'm nothing.) 앞에 현현하는 세계가 곧 ‘제물(濟物)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만물제동(萬物濟同, 만물은 도의 관점에서 보면 등가이다)인  ‘제물의 세계’는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세계’라는 것이다. 따질 것 없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말이다. 다만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 피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이를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마참가지로 내가 상대를 존중할 수 없다면 따로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허심은 늘 유지한다.

이런 만물제동, 즉 평등은 허심에서 비롯되며, 허심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인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는 더하기 공부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즉 해체 시키는 공부이다. 이 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성심에서 사심(師心)으로 가지 않고, 허심으로 가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용선 선생의 블로그와 그의 멋진 책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에서 얻은 생각 갈무리 한 것이다.

(1) 허심을 위한 공부로 첫째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成心)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화 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 화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此=이것)과 저쪽(피,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 적으로 발생하는 사태라는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 는 일이다.  

장자는 이를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이라고 했다. 피차, 즉 주체와 객체라는 말은 기준으로 삼는 시각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장자는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의 구분에는 이미 시비 판단의 계기가 전제 되어 있다.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 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니까.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을 둘러 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사심은 성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이라  했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 인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2) 허심을 위한 공부 둘째는 ‘시비를 화(和)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만 ‘자신이 옳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아무도 옳지 않다. 그러면 누가 그른가. 아무도 그르지 않다는 것. 각기 각자의 방식으로 옳은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각자의 옳음에서 비롯하여 각기(각기)의 근거로 시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인식의 기초인 ‘우리의 앎’은 과연 신뢰할만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과 지성(분별지)은 부분성과 편파성으로 인해 사물의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볼 때에 그 사람의 이마와 뒤통수를 동시에 볼 수 없고,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태생적으로 편파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계가 있다. 서 있는 건물을 보면서 동시에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양면을 모두 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서로 의지해 있고, 이웃해 있다. 밤과 낮은 연속되어 있으나 동시에 볼 수 없다. 이처럼 제한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시비가 발생하는데, 장자는 이를 원숭이들의 조삼모사에 비유한다. 때문에 모든 시비와 갈등의 고조는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어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시비(和是非)'는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천균'은 자연 상태에서 유지되는 균형감각을 지닌 조화로운 마음이다. '천균에 머문다'는 것은 옳다 그르다는 지식의 작용을 그치고,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경지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비는 사라지고 마음은 지극히 조화를 얻게 된다.  비슷한 말이 '양행'이다. 대립되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바라보고 두 입장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쪽을 모두 수용하는 전체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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