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8일)
오늘 읽을 노자 <<도덕경>> 제19장은 전체 문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앞장인 제18장과 한 장이었는데 별도의 장으로 분리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든지,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린다는 문구는 앞장과 그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위적 가치관을 버리고 무위하도록 두면 사회가 저절로 다스려지고 백성들에게도 그것이 백 번 낫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한다. 성스러움, 지혜, 인, 의, 기교, 이익 등은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이런 덕목들은 마음을 꾸미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이며 거기에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이런 인위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연스러운 심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 지혜를 준다. 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는 이 문장을 나는 나의 만트라 삼았다. 이게 도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활철학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인위적 의식 세계에서 떠받드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우리 본래의 마음 바탕,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만'은 '마음'을 의미하고, '트라'는 '도구'이다. 만트라를 말 그대로 하면, '마음 도구'이다.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문장을 반복하면 강력한 파동이 생겨 마음이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트라는 나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경종이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변화와 이로운 변화로 나뉘듯이, 어떤 문장이나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 시키고, 어떤 단어와 문장은 기도처럼 마음에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이게 '만트라'이다.
제 19장의 원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絶聖棄智(절성기지) 民利百倍(민리백배),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로움이 백배가 된다.
絶仁棄義(절인기의) 民復孝慈(민복효자),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들이 효성과 자애로움을 회복할 것이다.
絶巧棄利(절교기리) 盜賊無有(도적무유), 기교를 끊고 이해관계를 버리면, 도둑이 없어진다.
此三者 以爲文 不足(차삼자 이위문 불족) : 이 세 가지는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자족한 것이 아니다.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 그러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라!
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 순결한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좀 더 자세하게 풀면, 물들이지 않은 무명천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는 것이다.
이 장의 구조는 '절(絶, 끊다)'과 '기(棄, 버리다)'가 세 번 나온다. 타동사로 보면 이해가 쉽다. 그 목적어가 각각 ① '성(聖)과 지(智)', ② '인(仁)과 (義)', ③ '교(巧)와 리(利)'이다.
① '성(聖)과 지(智)'
여기서 '성'은 '성인'이나, '성인이라는 이상적 모델'을, '지'는 '지혜'나 '지혜로운 자의 형상'을 말한다. 거듭 말하지만, 유가에서는 인정된 어떤 내용(친, 親)을 그거로 나누고(분, 分), 그 나눈 것들 사이의 직분을 정하고(정명, 正名) 그 정해진 것들 사이의 행위 규칙을 세운다(禮). 유가에서 말하는 예(禮)의 기초가 나눔이자 구별이다. 어떤 특정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여 나눈 후, 그 나눈 것들 사이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다. 그러나 노자가 보는 이 세계는 관계와 변화 속에 잇기 때문에, 정지시켜 구분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유가에서는 사회를 하나의 전통으로 묶고, 그 전통에 대한 부단한 학습을 요구하여, 부단한 학습 과정 끝에 전통과 모순이 되지 않은 경지(從心小慾不踰矩, 종심소욕불유구,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까지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전통은 '성(聖)'이라는 관념이나 성인의 모습으로 이상 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에서는 모든 것이 이 '성(聖)' 관념을 기준으로 차등 화되고 나누어진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갈등과 경쟁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사회 혼란의 출발점이 되다는 거다. 이런 구조보다는 갈등과 경쟁의 원인이 되는 '성(聖)'과 ''지(智)의 관념을 아예 끊어 버리는 구조가 사회의 이익을 극대 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② '인(仁)과 (義)'
공자가 말하는 '인(仁)'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이다. 즉 인간은 '인'을 통해 인간으로 완성된다. 다른 모든 덕목은 이 '인'을 바탕으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인'이 가장 직접적으로 발휘도는 공간이 부모와 자식 사이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효(孝)를 인을 행하는 근본 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은 '효'로 가장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데 서 알 수 있듯이 인간적인 정서이므로 '친친(親親)'이라는 내용을 가진다. 즉 더 가까운 사람을 더 가깝게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묵자는 '겸애'를 주장한다. 이 문제는 언제 다시 한 번 이야기할 기회를 갖고 싶다. 그러나 노자는 자연이 "천지불인(天地不仁, )"이라 했다. 즉 "천지불인"은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는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도무친(天道無親, 하늘의 도는 편애하는 일이 없다)"이라 했다. 노자는 어떤 것을 더 편애하는 정서가 이 우주 자연의 운행에는 깃들여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우리에게 자연성으로 있는 진정한 '효'가 손상된다는 거다. '의(義)' 또한 바로 무엇과 무엇을 가르치는 기준인데, 이것도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 즉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③ '교(巧)와 리(利)'
여기서 '교(巧)'는 재주 내지는 기교를 가리킨다. 즉 자연적인 것에 인공적인 것을 가하여 뭔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또한 어떤 특정한 문화적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긍정적인 가능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利)'도 교와 똑같은 의미에서 유용함으로 인정된다. 즉 상업적인 수단이든 무엇이든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요약하면, ① '성(聖)과 지(智)'가 학문의 전통이나 종교적 이상을 말한다면, ② '인(仁)과 (義)'는 우리의 일상 규범을 지배하는 윤리적 가치를 총괄해서 말한 것이고, ③ '교(巧)와 리(利)'는 과학이 증진시키는 문명의 정교함이나 혜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도올에 의하면, "코로나-19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발생하고 있는 모든 현상은 우리에게 의심할 바 없는 선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나, 그 가치에 기초한 우리의 행동이나 삶의 목표를 재고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으니, "성지, 인의 교리"가 모두 가치전복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此三者 以爲文 不足(차삼자 이위문 불족)"라 말한다. 즉 '이 세 가지는 문명의 장식일 뿐이며, 자족한 것이 아니다'라는 거다. 여기서 "문(文)"이란 '문식(文飾)'을 말하며, 장식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문'은 '질(質)'과 대비된다. 노자는 문명의 화려함을 원하지 않는다. 질박한 원초적 삶을 지향처로 삼는다. 노자는 이러한 문명의 문식은 인간의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부족(不足)"한 것이라 규정한다. 즉 본질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화려한 장식을 버리고 다시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 다음 문장,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그러므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라)의 의미이다. 들뜨지 않고 진짜 속한 곳이 있게 하라는 것이다. 문명의 화려함 속에서 부유(浮游)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하라 한다. 순결한 흰 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좀 더 자세하게 풀면, 물들이지 않은 무명천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노자가 '무사무욕(無私無欲)'을 말하지 않고, '소사과욕(少私寡欲)'의 현실적 처방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와 '과'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일정한 눈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적게 하고 끊임없이 줄이는 역동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올이 말하는, 우리의 몸의 살을 빼는 것도 끊임없이 줄이는 것"이 멋진 예이다.
오강남은 더 나아가 "사(私)"를 줄여 자기 중심주의, 차원 낮은 이기주의, 자의식 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멸사(滅私)', '무아(無我)'의 경지로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심을 점차로 줄여 가서 무욕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이 반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거다.
천장호에서/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 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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