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코로나 19로 큰 어려움과 타격을 입은 것이 교리와 제도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교이다. 제도권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만들어진 근거는 마태복음 19장 20절의 이 대목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공동체가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이질 못한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와 함께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글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볼 수 있다. 사진은 어제 딸과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다 찍은 것이다. 모과나무 같다. 저렇게 잘려야, 나무가 튼튼해 진다.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를 좀 해 본다. 언론에 보면, 아직도 미국의 일부 교회는 마스크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딱한' 눈으로 보도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교의 근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치료법'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신을 두려워 하지라." 20세기에 인간을 보는 눈을 바꾼 세 명의 인물이 있다. 배철현 교수의 주장과 나의 생각을 섞어서 정리해 본다.
▪ 찰스 다윈
▪ 니체
▪ 프로이트와 융
19세기 말, 찰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으로, 인간을 신의 형상을 담은 신적인 존재이자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진화된 동물'이란 점을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증명하였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강렬하게 그의 주장, 즉 진화론을 반대했다. 20세기 초, 다윈의 진화론을 반대하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주도한 운동이 '근본주의'이다. 이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일부 종교 집단이 폭력을 쓴다.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고 믿는 건 오만이자 무식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다. 예를 들면,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을 전면 부인하면서, 성경을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틀림없는 소위 '성서무오류설'을 주장한다.
니체는 그 전까지 세상을 지배해 온 두 가지 기둥을 무너뜨렸다. 하나는 이데아 세계를 상정하여 선과 악,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천국과 지옥과 같은, 이분법적으로 보는 세계관을 허물고, 그 구분을 초월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은 초인(超人)이 될 때 행복하다'이다. 초인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구원이란 '자기 극복'이다. 구원을 누구를 믿어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응시하고 극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이라는 용어를 인간에게서 삭제하였다. 인간에게 발견되는 정신적인 질환을 신의 저주가 아닌,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겪은 마음의 상처에서 찾았다. 인간의 원죄는 아담으로부터 유전적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본능 에너지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융은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원래의 자신을 찾게 되는 '개인화'의 과정을 주장하였다.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외부인 산의 도움이 아니라 인간 내부, 심리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20세기 초, 서양은 과학, 이성 그리고 이념으로 무장한 자신들을 과신하여,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자신이 알고 증명 가능한 사실이 진리라고 확신한 사람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을 야기한 것이다. 그런 서양이 전쟁 후, 다시 오만해 지자,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등장해, 그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나는, 박노자 교수처럼,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신화가 무너질 거라고 본다. 그 위에 새로운 세계 질서가 생겨날 것으로 본다. 우선 무너질 세 개의 신화를 살펴본다.
첫째는 선진국에 대한 신화가 무너졌다.
근대로의 전환이, 우리보다 더 빨랐던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한국인들의 지배적 집단의식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19 사태는 이 의식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주었다. 그들이 근대로 먼저 나아갔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공공성을 크게 약화시켜온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무조건 선망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신종 바이러스와 고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바람에 제때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귀중한 시간을 잃었다. 특히 만성적인 예산부족 등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공공의료는 상당히 부실함을 드러냈다. 미국의 영리 목적의 민영병원 위주 의료시스템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대응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미국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일본의 경우, 검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지금까지 드러난 확진자 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고 <시엔엔(CNN)>과 같은 주요 서양 언론사들이 보도하는 판이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조직적 은폐 의혹이 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선진국의 신화는 깨졌다.
▪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한 부족한 예산지원
▪ 바이러스에 대응하지 못하는 영리의료
▪ 재난 규모의 은폐와 축소 의혹
당연히 배울 점을 배워야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선진국’들의 민낯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더 이상 ‘선진국’ 신화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에 대한 신화가 무너졌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미국,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미국은 정부 주도로 무기 생산을 시급히 확충 시키는 등 국가가 산업구조에 개입하여 비교적 능숙하게 재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4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를 거쳐 미국은 이러한 능력을 거의 상실한 듯하다. 세 가지 점을 박노자는 지적하고 있다.
▪ 의료설비 부족이 드러나도 국가가 처음에는 생산에 개입하기를 주저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 바이러스 위협이 계속 남아 있고 확진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약업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공공의료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절실히 필요한데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장기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대신에 트럼프는 중국에 책임을 돌리기에 바쁘고, 확진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부활절 이후의 경제활동 재개’를 거론하는 수준이다.
이 무책임, 이 인명 경시는 단기적 이익 본위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는 미국 지도층의 정신상태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인 ‘중국 탓 하기’가 중국인과 외관상 식별이 가지 않는 모든 재미 아시아계 소수자들을 정신 나간 인종주의자들의 폭언과 폭력에 노출시키고 있는데, 트럼프는 개의치 않는다. 종족적 소수자, 그리고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은 노약자층 등의 인명과 인권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고 보호하려 하지도 않는 국가가 세계의 ‘리더’를 여전히 자처할 수 있을까?
세 번째는 시장주의에 대한 신화가 무너졌다.
시장이 마스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스크를 공급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여실히 본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기본소득이나 소비 진작을 위해 주민들에게 국가가 현금을 지원하는 것은 ‘급진적인 주장'으로 인식됐지만, 지금 미국같이 비교적 보수적인 나라 마저도 국민들에게 현금 지원을 할 예정이다. 상당수 항공사 등이 어차피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항공업과 같은 사회 필수 시설의 국유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아직 위기의 초기지만, 시장만으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음은 이미 명백해 졌다. 앞으로 세계 경제의 재가동과 회복을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개입과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가 공공시스템의 부실을 떠안게 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이제 팬데믹(세계 대유행) 위기의 ‘약한 고리'가 되었다. 그들을 포함 해서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과거 신자유주의 시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불황 내지 공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을 방불케 할 수준의 국가적 경제 개입이 필요할 것이고, 앞으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함께 공공부문, 그리고 재분배 장치들이 대대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이 세계적 추세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럴 때는 살아 남아야 기회가 온다. 비정하게 들리겠지만, 숱한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은 살아남은 자들에겐 더 없는 축복이 되곤 했다. 실제로 14세기 유럽 인구의 30%인 1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가 물러가자 생존자들은 전에 없던 호시절을 보냈다. 인구가 확 줄면서 임금은 올랐고 가구당 토지는 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듯 코로나에 깊은 내상을 입은 나라와 덜 다친 국가가 생기면서 국제 질서가 지각변동을 할 수 있다. 예컨대 “감염이 확대되면 2주 만에 감염자 수가 30배 이상 뛸 수 있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경고가 현실화되면 일본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특히 지역사회 감염을 제때 못 막으면 사태가 장기화할 공산도 크다. 수출 품목이 여럿 겹치는 한국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방역의 성공 요인은 투명성과 빠른 정보 요구, 이에 대한 정부의 신속한 반응이라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빛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믿기에 사재기를 안하고, 또 사재기 하는 사람을 비판하면서 시민의식도 빛을 발휘했다. 중앙집권적 행정능력과 정보화의 힘이다.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방식은 더 혼란을 야기 시킨다. 한 명도 안 버리고 끝까지 챙기려 했던 정부의 대응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 가로 관심이 집중되고, 약자일수록 자구책을 구하는 데 몰입하게 된다. 어쨌든 경제가 무너져,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두 가지를 제언한다. 하나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신의 책 <새로운 빈곤>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집단적 궁핍화'에 대해 유일하게 긍정적인 대안은 '집단적 소박함'이다." 지나침 소비주의를 피하고, 우리들의 삶을 다시 소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생적 온존(symbiotic wellbeing)", 즉 생태학적 경계를 인간 중심에서 생태까지 확장하는 것이 답이다. 나부터, 코로나 19 이후, '다르게' 살려 한다. 잘 닦는 위생 생활, 덜 소비하는 생활, '발가벗은 힘'을 키우기 위해 남의 수고가 아닌 나의 수고로 살아가는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주변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겠다. 풍부하게 소유하기 보다 풍요로운 존재를 꿈꾼다. 풍부하게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풍요롭게 존재하라.
가진 것/한성례
몽골의 초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가능한 덜고 버리고서, 빠드득 물기 마른 지평선 한 자락 몰고 올라가 산뚯하게 걸린 무지개처럼 정말이지 몸이 가벼워지는 것. 지구라는 행성에 나란히 동거하면서도 우린 서로 가진 것이 달랐지요. 몇 마리의 양과 말, 한 나절이면 거뜬히 접어 길을 떠났다. 발 닿으면 다시 세우는 서너 평 남짓한 '겔'. 고작 그 안을 채울 만큼이 온 가족이 가진 것 전부. 그러기에 몽골의 유목민에게는 짙푸른 하늘과 끝없는 초원, 머리 위로 열리는 밤하늘의 수박만한 별들. 이 모두가 다 그들 차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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