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6년 3월 18일)
1.
'안다고 생각하는는 것과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 먹을 것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아끼는 수제자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부엌 안을 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았다. 공자는 놀랐다. 안회는 제자 가운데 가장 도덕 수양이 잘되어 늘 아끼는 제자였는데, 공자는 실망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알리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 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들은 안회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제가 밥 솥 뚜껑을 여는 순간, 부엌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려니 더럽고 버리려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의심한 게 부끄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 하거라."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제대로 아는 것의 힘은 새로운 앎을 찾아 나서게 하는 힘이 된다. 제대로 알고 있을 때, 비로소 구체적 표현이 가능하다. 제대로 아는 것에서 오는 구체적 표현에는 불필요한 생각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적 표현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행동을 하게 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다룰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여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진실과 믿음은 다르다. 인문학의 힘은 이걸 의심한다. "강에 가서 말할" 내용인데...
강/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3.
'아는 것'과 '믿는 것'도 다르다. 최근 몇몇 주변 분들을 보면, 극우 유튜브 채널의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그곳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어떤 사안의 사실관계를 면밀히 판단한 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을 만한 사람, 혹은 믿고 싶은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화순 불암사 주지이신 법인 스님에 의하면, 석가모니 붓다가 살던 당시에도 여러 종교 수행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가르침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했다는 거다.
4.
초기 불전에 따르면, 당시 62명의 종교사상가가 존재했고 각자는 자신의 견해가 가장 우월하다고 여기며 그에 따라 수행하면 악업이 소멸하고 천상에 태어나 열반을 깨달어 얻을 수 있다고 했다는 거다. 또한 다른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틀렸다고 비난하며 대중을 설득하려 했고, 학습하고 사유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지식인들은 물론 그렇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혼란스러웠다는 거다. 지금 우리 사회처럼, 누구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신자들 사이에서도 반목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칼라마 지역의 사람들은 붓다에게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물었고, 그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 <칼라마경>이라 한다. 오늘날의 세태를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5.
<칼라마경>에서 붓다는 ‘믿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어떤 가르침이 오랜 전통 속에서 전해 내려왔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떠돈다고 해서, 혹은 권위 있는 성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합리적인 사유와 정직한 실천 없이 단순히 믿어 버리면 그 믿음을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권위 있는 인물이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주장을 펼치더라도, 그 말을 깊이 숙고하지 않고 맹신하면 위험하다고 붓다는 경고한다. 오늘 우리 사회도 많은 사람이 교수,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의 권위와 교묘한 논리에 현혹돼 '부화뇌동(附和雷同, 자기 생각이나 주장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임)하며 자신의 좁은 의식 세계에 갇혀 살아간다. 붓다는 특히 사람들이 명망 있는 스승의 말을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열렬히 추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이 우려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장의 교조주의'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극단적인 사고와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결핍, 불안, 고립, 분노 그리고 사적 이익이 누군가의 말에 의해 자극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6.
극단적인 사고를 벗어나려면, 참회(懺悔) 아니 고백(告白)의 시간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하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 결핍 분노를 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가끔 듣는 이야기이다.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네.” “그거 말고 서울에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냥 생각 없이 하는 말일 거다. 그런데 세상이 한번 망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보수진영은 이를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수의 기반이 이 사람들이다. 선거를 믿지 못하고, 법원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헌법재판소를 없애 버리겠다고 한다. 무엇인가를 파괴하고 싶은 ‘불안'의 분노가 이어진다. 여당 의원이 ‘선관위로 쳐들어가자'라고 하자, 그들을 대표한다는 목사님은 “오늘부터 내전"이라 했다. 이런 보수가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사람들을 정치가 활용한다. 그게 무섭다. 100년 전쯤 독일에서 나찌(NSDAP)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반대했다. 이 주장은 점점 ‘우리가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 주장은 몇 년 뒤 ‘다시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다’로 바뀌었다. 결국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을 되돌아볼 기회가 없다. 이럴 때는 공동의 적이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사멸시킬’ 위험한 존재다. 그 두려움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죽였다. 갑자기 보수 진영 플랫폼에 '중공군과 CCP'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응보의 칼자루를 쥐고 거리에서 마구 적대감을 드러낸다. 유튜브에는 당시 선관위 기숙사에서 붙잡혔다는 중국인들의 영상이 올라오고, 미국 정보 요원(가짜)이였다는 청년은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하고 중국대사관에 뛰어든다. 요즘 보수 커뮤니티에서는 ‘중국인들이 떠나면 첨단 일자리 20만 개가 쏟아진다'는 주제가 최고 화두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가 망해서 오는 게 아니다. 허구가 사실을 이길 때 폭력이 숙의(熟議)를 사라질 때 그래서 성찰이 설 공간이 없는 곳에서 집권자는 법을 뛰어넘어 그들 만의 질서를 만든다.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거리에는 자꾸 ‘이 사회가 망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거짓’을 믿고,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들고 ‘파괴’적인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7.
거기서 출발하는 맹신은 권력, 이해관계, 정치적 편향과 종교가 결합 하면 더욱 완고해 진다. 중세 사람들은 과연 천동설을 이해하고 믿었을까? 아니면 당시 종교 권력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그들은 믿음과 앎을 동일시했다. 실로 어이없는 착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붓다는 진리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가르침이 탐욕, 분노, 어리석음("탐진치", 삼독)을 증가시키는지, 그것이 자신과 이웃에게 해로운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그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했을 때 고통을 초래하는지, 행복과 안락을 주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문자를 못 읽는 사람이 대다수였던 옛 시대나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오늘날이나,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지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대화와 소통을 이룰 것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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